개념글 모음

빗속에서 젖은 불꽃이 발악하듯 짙은 연기를 내뿜었다. 물먹은 연기가 부풀어 올랐고, 허공에 스며들었으며, 떨어진 담배꽁초 끝에 매달린 주백을 물웅덩이가 순식간에 삼켜버린다. 낮을 연기하는 가로등 주위로 모든 것이 새까맣게 식어갔다. 그래도 독일보단 낫군. 생각하는 그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공동주택의 창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가 지나온 길이, 그리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물안개 속에 잠겨있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모든 창문에 셔터가 달린 독일을 생각한다. 해가 지면 집마다 셔터를 내려 바깥으로부터, 안으로부터의 빛을 차단하는 창문. 길은 암흑에 휩싸이고 베틀러bettler만 그 검은 사막의 방랑을 시작한다. 100년이 넘은 주택과 마을 공동묘지의 낮은 담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잠겨있는 밤. 그의 운동화 밑바닥으로 물이 차오른다. 비가 더욱 거세게 내렸다. 축축하고 불쾌하군. 하지만 괜찮아. 적어도 이곳에는 온전한 창문이 있으니까.


그는 아침과 저녁의 반을 살았고, 저녁과 아침의 반을 잠을 자는 것으로 보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적당히 흩어지는 불빛처럼, 그는 해가 사라지고 난 적절한 어둠을 기대했다. 나는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어둠을 원하지 않아. 이곳에서 나는 자유롭지. 빛이 들지 않는 거리는 익명이 보장되니까. 그가 자주 걷는 회탁한 거리가 그랬다. 그의 취미는 창문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창문은 사진과 동영상과는 다르다. 멈춰있지 않고, 일정하게 반복되지도 않으며, 유동적이며 새로웠다. 헤겔이 그랬지. 제6의 예술은 공연이라고. 카누도는 제7의 예술이 영화라 그랬고. 그렇다면 제10의 예술은 분명 창문이어야만 해. 회화도, 사진도, 만화도 저 완벽한 사각을 뛰어넘을 순 없지. 서로가 서로를 신경 쓰지 않는 밤. 그는 멈춰 서 건물을 바라본다. 회백의 벽을 중간에 끼고 켜지고 꺼진 창문들이 보인다. 급하게 전등을 갈았는지 주백색 주광색이 뒤섞인 조명이 눈에 띄었다. 4층의 불이 꺼진다. 2층의 불이 켜지고,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로 실루엣이 스쳐 간다. 아무도 있지 않고 머물지 않아도 혼자 빛을 뿜어내는 거실. 혀를 길게 내빼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숙이는 사람들. 창틀에 나뉜 수십의 컷들. 한쪽의 극이 멈추면 다른 쪽의 극이 시작되는 끝나지 않은 무대.


그에 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빛을 굴절시킨다. 빛을 왜곡시키는 게 아니야. 빛이 왜곡인 거지. 피사체를 담는다는 말은 거짓투성이야. 빛을 온전히 담는다고? 멍청한 소리. 블라인드 뒤로 그림자가 뻗어 나왔다. 길고 짧은 그림자들이 겹쳐지며 서로를 때린다. 그 옆으로 노부가 고개를 내민다. 노부의 주름과 처진 살들을 빛들이 녹인다. 하지만 그의 우울은 빛으로도 감출 수 없다. 그 아래 식사를 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이고, 토끼 머리띠를 한 아이가 웃음 짓는다. 그는 그 모습을 관음한다. 이건 발굴이야. 사라질 것들을 구하는 중이라고. 해석하려고 들지 마. 저들이 사랑을 나누는 방법일 수도, 슬픔을 공유하는 방식일 수도 있지. 그래도 애석하군. 그는 다시 거리를 걷는다. 그가 우산을 쓰고 있는 건 단순히 비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다. CCTV야말로 엄청난 방관자지. 그는 CCTV의 렌즈 뒤의 수십 개의 모니터를 상상한다. 창문처럼 층층이 쌓인 수십 개의 사각의 눈을.


그는 우산을 접었다. 그의 머리부터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는 우산을 떨어트린 채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음폐되어 있는 방 안에 텔레비전 한 대가 놓여 있다. 어둠에 사장되어버린 것 같은 깨진 화면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어두운 화면 속에서 그는 또 다른 창문을 본다. 창틀이 발현되며 탄생 되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창문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리고 그 안에 그의 뒷모습이 있다. 그는 뒤돌아볼 수 없었다. 그럴 용기가 없다. 꼼짝없이 그는 빗속에서 서 있는 자신을 마주한다. 창문들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한다. 폭력과 불행이 비췄다가 모습을 감춘다. 지우고 싶은 자와 발굴해내려 내는 자들의 끊임없는 대립항이 반복된다. 그는 창문 가까이 몸을 뻗는다. 공포에 떠는 두 손을 창문 아래의 버튼에 가져다 댄다. 모니터가 꺼지듯 사방으로 빛이 튀었다 소멸한다. 그리고 검은 창문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