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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세계관:

국정원 5급 사무관, '대악마' 기사단장 그리고 콤비네이션 피자

1: https://arca.live/b/monmusu/56612857

2: https://arca.live/b/monmusu/60406822

3: https://arca.live/b/monmusu/64667155


네이비씰 대원, 고위 서큐버스 심문관 그리고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왜 그냥 포기하지 않는거야? 영원한 쾌락이 눈앞에 있는데!" 


202X년 11월 16일, 균열 개방 이후 60분간 정부 초기대응 기록

https://arca.live/b/monmusu/94990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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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미 어두워진 빌라촌의 좁은 2차선 도로를 여전히 노란 불빛으로 비추고 있는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던 케시흐가 갑자기 우뚝 서며 말했다.


"...?"


케시흐의 말에,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살짝 앞에서 걸어가던 릴라쉬와 그 옆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릴라쉬를 바라보던 안 대위가 멈춰 선 뒤 천천히 사방을 두리번 거렸지만, 거리는 여전히 가로등의 불빛과 주인 없는 가게의 LED 간판들만이 이따금 깜빡이고 있었고, 무언가의 폭발음만 천둥같이 저 멀리서 쿠르릉 대며 들려올 뿐이었다.


"...다시 가지."


"뭐야? 뭔데?"


"군단의 전투 나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거리로 보아, 당장 우리와 관련 있는 건 아닐테지."


"역시 군단 최정예 호위 기사 아니랄까봐~"


미묘하게 깐족거리는 듯한 릴라쉬의 말에도, 케시흐는 익숙한 듯 아랑곳 않고 양 손에 창백한 혈색의 김 준위를 품에 안은 채 도로를 묵묵히 걸어갔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중세풍 갑옷을 입고, 머리엔 뿔이 돋아나 있는 거대한 푸른 피부의 여성과 그 가슴팍에 카키색 군용 항공복을 입은 성인 인간이 안겨있는 광경을 뒤로 흘끗 보며, 안 대위는 정말 자신이 일 평생 보아온 광경보다 오늘 본 광경이 더 기괴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부하를 타인에게 온전히 맡긴다는 불안감과 안 대위 자신의 지휘관이라는 책임감, 그리고... 김 준위의 성인 남성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고자 (사실, 마지막 이유가 제일 컸다) 케시흐에게 같이 김 준위를 부축해 가자고 했지만, 2미터를 훌쩍 넘는 그녀와의 키 차이 때문에 어떻게 들던 김 준위가 불편해지는 어색한 자세로 옮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극한 상황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의 힘으로 움직이던 안 대위의 신체는 80kg의 성인 남성을 부축한 채 수 시간의 행군을 버틸만한 힘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애써 무시하고 거의 순수 악다구니와 정신력으로만 김 준위의 한 쪽 어깨를 힘겹게 부축하던 안 대위의 의지는, 결국 보다못한 케시흐가 "당신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당신 상태로는 오히려 당신 부하에게 도움보다는 방해가 더 되는 것 같군." 라고 무심히 말을 던지자마자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결국 안 대위는 케시흐의 양 손에 들린 채 품에 안긴 김 준위를 가끔씩 흘끔 바라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한 채 비어있는 도시의 거리를 터덜 터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권총이라도 있었으면 좋을텐데, 라고 안 대위는 손에 착 잡히는 묵직한 쇠 덩어리의 느낌과 화약 무기가 주는 어떤 안도감을 그리워 하며 자신의 카키색 항공복의 가슴팍을 바라보았지만, 시야에 들어온 플라스틱 권총집은 텅 빈 채 안 대위가 걸을 때 마다 힘 없이 달각 거릴 뿐이었다.


언제나 묵직한 느낌으로 존재감을 내보이던 자신의 K5 권총이 앞에서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릴라쉬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바라보다, 작게 내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인 안 대위의 눈에 카키색 항공복 바지 한 쪽에 어울리지 않게 매달려 있는 허름한 가죽 칼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 저곳이 헤진 채, 오랫동안 제대로 관리도 안한 듯 거뭇거뭇한 갈색 빛으로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중세풍 가죽 단검집에 꽂혀있는 단검의 손잡이를 잡고 꺼낸 안 대위가 단검을 들어 올린 뒤 살펴보았다.


찌르는 것에 특화된 듯, 끝으로 갈 수록 가늘어지는 20cm 정도 길이의 금속빛 칼날이 가로등의 밝은 LED 조명을 반사하며 곳곳에 녹슨 자국을 내보인다.


아니, 아무리 자신이 포로라지만, 저 이계인들이나 나나 적진 한가운데서 탈출해야 한다는 입장은 똑같을텐데 무기랍시고 이런걸 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차라리 조종사용 표준 지급 생존 대검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플라스틱 대검집이 달려있어야 할 전술 조끼의 가슴팍이 휑하게 비어있는 것을 바라보며, 안 대위는 출발하기 전 몸수색을 받던 상황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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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주머니가 많아? 무슨 사티로스 연금술사도 아니고."


양 손을 든 채 서있는 안 대위의 카키색 항공복 주머니와 위에 걸친 진녹색 전투 조끼의 주머니들을 뒤적이던 릴라쉬가 귀찮다는 듯 중얼거리다, 가슴팍에 있는 대검집을 보고는 흥미롭다는 듯 똑딱이를 풀고 안에 끼워진 대검을 꺼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뭐야, 이건. 단검?"


"조종사용 표준 지급 대검이야."


"흠... 마나는 안 느껴지는데. 케시흐, 어떻게 생각해. 주면 위험할까?"


릴라쉬의 말에, 큼지막한 금색 팔목 보호대를 차고 있던 케시흐가 검은색으로 무광 코팅된 대검을 흘끗 바라보았지만,


"마음대로 해라."


그 한 마디 만을 내뱉은 채 다시 갑옷을 입는데 집중했다.


"풋, 하긴. 한 쪽에는 톱날이 있질 않나, 날 한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지 않나. 무기보다는 조각칼 같은 도구에 가까운 것 같은데. 이걸로 싸울 수는 있어?"


얼굴에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표준 지급 대검을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릴라쉬의 말에, 안 대위가 발끈했다.


"그냥 찌르기만 하는 대검이 아니니까. 이름 부터가 '서바이벌 나이프' 라고. 생존에 필요한 여러 기능들이..."


안 대위의 말을 릴라쉬가 지루하다는 듯한 말투로 끊는다.


"그래, 그래. 대단하신 고대 인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칼이니 무한한 빵이랑 맥주, 금 덩어리랑 시종들도 나오겠지."


"아니, 나 참..."


"흠... 비싸 보이긴 하는데 말이야."


어이 없다는 말투의 안 대위를 무시하고, 물품을 감정하는 골동품점의 상인처럼 대검의 손잡이와 날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흐음' 소리를 내던 릴라쉬가 갑자기 안 대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다, 네 말이 맞아. 마력도 없이 하늘을 나는 강철 골렘을 만드는 당신들의 기술력을 가진 고대 인류 전사들의 단검이라면, 분명 최고의 전사들과 학자들이 심사숙고 하여 그들의 지혜로 만들어낸 무기겠지. 나 같은 이방인이 이렇게 섣불리 평가하는 것이야 말로 멍청한 행동 아니겠어?"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안 대위의 속을 긁으려는 듯 비웃음이 가득 담겨있던 빈정거리던 말투는 온데간데 없이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안 대위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어, 그 정도까진 아닌데. 뭐... 알면 됐고."


"그러니, 네가 이걸로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내가 압수하고 있는게 맞겠지. 무슨 기술력이 숨겨져 있는지 모르는 고대 인류 기술의 무기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한 릴라쉬는, 얼굴에 조소를 씨익 띄며 대조적으로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 일그러지는 안 대위의 표정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이런 씨ㅂ... 나도 호신 정도는 할 수 있게 뭐라도 줘야할 것 아냐! 뭔 일 생기면 그냥 죽으라고?"


욕지거리를 간신히 틀어막은 안 대위가 항의하지만, 릴라쉬는 가소롭다는 듯 풋 하고 웃을 뿐이었다.


"마력도 못 다루는 인간이 아인종 병사한테 단검 하나 들고 뭘 어쩌려고? 날개 없는 하피 정도는 뭐 어떻게 해 볼 수도 있겠네."


그 말에, 안 대위도 질세라 이번에는 당돌하게 맞받아친다. 


"그럼 칼 주면 되는거 아냐? 왜, 자신 없어?"


안 대위의 말에, 잠시 멈칫한 릴라쉬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검은 자위가 또렷하게 보이는 노란색 동공이 잠시 안 대위를 향하지만, 이내 '흥' 소리를 내며 가죽 가방을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꺼내 안 대위에게 휙 던지며 말했다.


한 손으로 낚아 채 살펴보자, 허름한 가죽 칼집에 꽂혀있는 단검집이 안 대위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뭐. 너도 빵 써는 일 정도는 필요할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픽 웃는 릴라쉬를 흘겨보며, 안 대위는 말없이 가죽 칼집에 달린 매듭을 항공복의 한 쪽 허벅지에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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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쉬의 그 재수없는 표정과 말이 기억에서 스멀스멀 떠오르자, 안 대위는 방금까지 잠시나마 가지고 있었던 '그래도 명색이 군인인데, 아무 무기라도 들고는 있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빠르게 접어버렸다.


'에휴, 그만두자... 들고 있어봤자 저 썅년이 인간 주제에 애쓴다, 귀엽다 이딴 소리 하는거 밖에 더 듣겠어.'


성인 남성을 양 손에 들고 있지만, 여전히 날카롭게 주변을 훑는 케시흐의 시선과 움직임과는 달리, 릴라쉬는 소풍이라도 나온 양 여전히 조명이 군데군데 켜져있는 밤의 길거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이미 국군이 방어를 포기하고 후퇴한지 수 시간이 지났었지만, 이세계의 군세들도 당장 버려진 도시를 약탈하고 재물을 챙기는 것보다 군사적 승리를 먼저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는지 국군의 뒤를 쫓아 저 앞으로 진격해 버린 탓에 거리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상태였다.


평소와 다르다, 라고 말할만한 모습은 삼거리 한 가운데에 승용차의 옆구리를 들이 받은 채 널부러져 있는 SUV 뿐이었다.


비상등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는 두 차량 옆을 지나가며, 안 대위는 최악을 상상하며 차량 내부를 슬쩍 보았지만 다행히도 텅 빈 검정 가죽 좌석만이 깨진 유리창 뒤로 보일 뿐이었다. 


가볍게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쉰 안 대위는 다시금 밤 거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평범한 주택가의 밤 거리와 다를 바 없이 식당의 LED 간판은 연신 번쩍이며 음식과 가격을 자랑하고, 신호등은 아무런 의미 없는 적 녹 신호를 번갈아 키며 존재하지 않는 교통량을 조절하고 있었지만 꽤나 길게 뻗어있는 도로 어디를 보아도 움직이는 생명체의 흔적은 안 대위 일행 외에는 없었다.


"아무리 밤 이라지만, 이렇게 텅 비어있는 거리는 처음 보네..."


너무나 평범한 밤 거리의 모습이었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 한 명이 보이지 않는 사실이 안 대위에게는 낯설고 을씨년한 광경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그렇다 치는데, 너희 그... 뭐야. 이종족 연합군? 걔네들은 왜 한 명도 안 보이는거야?"


안 대위의 질문에, 케시흐가 여전히 주변을 훑어보며 말한다.


"성문을 격파하고, 방어선에서 구멍이 난 부위로 병력을 투입해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도시 곳곳으로 숨어들어간 방어자들의 부분적인 저항을 제거하는게 통상적인 공성전 전술인 건 알고 있겠지."


'성 쓸모 없어진게 2세기는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생각한 안 대위였지만, 입 밖으로 꺼냈다가 받게 될 케시흐의 차가운 눈총과 릴라쉬의 뜨거운 비꼼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과 나의 '전투'는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 17 군단은 당신들을 상대로 한 공성전을 진행 중이다. 지금은 비록 반역자 마도사단장이 군단장님의 이름을 찬탈해 군단을 제 수족처럼 휘두르고 있지만, 하루 아침에 각 종족의 정예병들이 마적떼로 변하지 않는 법. 여전히 군단장님이 지휘했던 군단이다. 도시를 점령하기도 전에 전리품에 눈독 들이고 약탈을 하는 건 마적떼나, 투지와 대의도 없는 싸구려 용병단들 뿐이다."


자긍심이 느껴지는 케시흐의 말에 안 대위는 어느정도 납득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으나, 그래도 완전히 이해는 못했다는 듯 '씁'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예비대가 투입된다거나, 부상자를 후방으로 보낸다던가 정도는 하지 않나? 우리가 걷기 시작한지 30분은 됐는데 진짜 생명체 라고는 하나도 못 본것 같은데."


"그거야 내가 피해 다니니 그렇지."


앞서 걸어가던 릴라쉬가 어느새 엿들은건지 뒤를 돈 채 말한다.


"네가 수인들처럼 후각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하피들처럼 시각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닌데, 너가 봤으면 이미 걔네들은 너 주머니에 뭐 있는지 까지 다 알았겠지. 다~ 내가 마력 흔적도 지우고 기척도 지우는 마도술을 지금 시전하고 있으니까 안 걸리는거야. 나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은 걸리고도 남았을걸?"


"아, 그래..."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케시흐의 표정을 슬쩍 보는 안 대위의 시선을 캐치한 릴라쉬가 어이 없다는듯 말한다.


"하, 이것 봐라? 야, 나 같은 상급 마도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지 너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알기는 해?"


"모르지. 이 세계에 마법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안 대위의 시원스런 대답에, 릴라쉬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짝이다, 투정 부리듯 말한다.


"...흥, 마력의 기본도 모르는 미개인들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동대륙의 왕국들을 멸망시켰던 재앙처럼 기록되었던 건지 이해가 안가네."


릴라쉬의 말에, 안 대위는 반박을 하려다,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잠시 곰곰히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연다.


"아니, 애초에 우리가 너네 세계를 침략 했다는게 말이 안되는데... 내가 아는 한 인류가 다른 종족이 있는 세계를 침략했다는 얘기는 그 어떤 역사서 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그 '침략' 이라는 건 대체 무슨 얘기야?"


안 대위의 질문에 릴라쉬는 안 대위의 눈을 말없이 응시한다. 마치 표정을 읽으려는 듯 안 대위의 동공을 똑바로 바라보는 릴라쉬의 밝은 노란색 동공에 안 대위는 잠시 자신이 질문을 잘못 골랐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릴라쉬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뭐, 우리 세계에서는 이제 시시콜콜한 전설이나 부풀려진 옛날 이야기 정도로 취급하는 거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당신들도 그렇게 여길 줄이야."


"진짜로 살면서 비슷한 것도 들은 적이 없다니까? 우린 니들 역사상 처음 보는거라고!"


안 대위의 항변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릴라쉬는 대꾸도 없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동대륙에 다양한 아인종 종족들과 그들의 왕국이 크게 번영하고, 서대륙에서 제일 마도술을 잘 다루는 인물들 조차 그 들에게 배우러 목숨을 걸고 대양을 건너던 시절. 나날이 커져가는 그 위세에 인간들의 영토가 점점 줄어가던 2천년 전, 갑자기 인간들의 영토에서 침략하는 정체 불명의 인간들의 군세가 언급돼. 그들의 신에 대한 광신적 믿음으로, 그들 만의 언어와 보지 못할 깃발을 쳐들고 아인종들의 국가를 향해 진격하는 처음 보는 인간들의 군세. '그들'이 기록에서 등장하자마자, 1년도 안되어 동대륙 아인종들의 국가들이 역사에서 지워졌고, 셀 수 없는 아인종들의 마을과 부족들의 기록이 그 시점에서 영영 끊겼지."


갑자기 진지해진 릴라쉬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안 대위의 머릿속에서는 오히려 물음표가 늘어나고 있었다. 


2천년 전이면 화약 무기는 커녕, 인류의 제련과 야금술도 초보적인 시절일 테였다. 상식적으로, 혼자서 손짓 하나로 건물 하나를 날려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종족들이 대체 어떤 면에서 그냥 평범한 칼과 창이나 휘두르던 그 시대의 인간들에게 공포를 느낀다는 것인지, 안 대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깐, 그냥 네 말대로 우리같이 그... '마력'도 못 다루는 인간이 수천, 수만명 있어봤자 아냐? 너희들 한테 그렇게 큰 위협이 될 수가 있어?"


"우리 세계는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마나의 흐름이 있어. 저주받은 검은 모래 사막의 한 가운데라도 실낱 같은 마나의 흐름 정도는 느껴지고,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마나의 손길이 스쳐가지 않는 생물은 없어. 너무나 당연한 세계의 섭리지. 그 마나의 힘을 빌어 누군가는 '신의 권능', 누군가는 '어머니 자연의 기적', 또 누군가는 '차원의 틈새에서 얻어낸 힘' 이라 부르는 마도술들을 구사하지." 


"그런데, 그 '고대 인류'들의 기록은 첫 등장부터 그들의 멸망까지 동일하게 서술되는 것이 있어.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저주받은 인간들'. 원소계 마도술, 광원계 마도술은 물론이고, 공간계 마도술도 통하지 않고, 정신계 마도술 조차 통하지 않는... 세계의 섭리조차 거부하는 재앙!"


마치 어린 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듯, 연기하는 목소리와 과장된 손짓을 하며 릴라쉬가 말했다.


"당시 여러 종족의 '대장군', '용사', '대신관', '대추장' 들이 수십년의 수련으로 완성한 술식이나, 세계의 심장에서 채취한 미스랄을 사용하고, 4원소 신수들의 가호를 받아 만들어낸 검과 마이스터 드워프가 장인의 집념을 발휘해 제련한 갑주와 같은 세기의 마도구를 걸치고 호기롭게 덤볐지만... 동대륙의 대마도술사 들이 생명을 바쳐 시전한 메테오 스톰은 그들에게 닿기만 하면 마치 한 송이 눈꽃과 같이 스르륵 녹아 사라졌고, 웬만한 영주의 성보다 비싼 갑주와 무기들은 그 고대 인간들의 평범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갑옷과 무기에게 그저 장식용 무기마냥 날이 나가고, 뚫려 버렸지."


"결국 그 시대의 영웅들은 마도술도, 마도구도 먹히지 않는 고대 인간들을 상대로 둘러싸여 잡병처럼 칼과 창에 찔려 죽어갔거나, 명예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친 자들만 남았지. 당연히 머리를 잃은 군대는 목 잘린 닭 처럼 허둥대다가 무너져 버렸고. 그렇게 동대륙 아인종 국가들의 황금기는 순식간에 끝났어."


릴라쉬의 말을 들은 안 대위가 믿기 힘들다는 듯 말한다.


"그럼... 그 고대 인간들은 불사자 였다는거야? 아예 죽지를 않는?"


그의 말에 릴라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웃음 소리를 내며 말한다.


"푸, 그럴리가 있나. 진짜 불사자 였다면 인간들 제외한 모든 종족들이 2천년 전에 멸종 당했겠지. 그냥 평범한 강철 칼에 찔리면 평범하게 죽어. 단지, 마나를 이용한 것이라면 마도구든, 마도술이든 그들의 몸에 아무런 영향을 못 끼칠 뿐이지."


릴라쉬의 말을 들은 안 대위가 별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그럼 그냥 마법 안 쓰고 싸우면 되겠네. 그게 뭐 어렵나?"


대화의 흐름이 갑자기 끊기고 침묵이 수 초간 이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은 안 대위가 슬쩍 릴라쉬의 눈치를 보았지만, 이미 그녀의 미간이 좁아지고 있는 모습이 그의 판단을 확정 시켜 주었다. 음, 또 3분은 지랄하겠군. 


그러나 장황한 설명이나 조롱을 대비하고 있던 안 대위에게는 천만 다행으로, '흥' 소리만 작게 낸 릴라쉬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약간은 짜증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본격적으로 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배우는게 뭔지 알아? 자신의 무기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는거야. 뛰어난 전사들은 이제 그걸 신체의 마나 흐름과 공명 시킴으로써, 말 그대로 무기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되지. 전투 중 즉각적으로 무기에 마법 부여를 하는 것도 가능해 지고."


"단순히 전사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대장장이 조차도 어떻게 제련을 해야 마나의 흐름을 원활히 조절할지 배운다고. 마나는 그냥 '안쓴다' 라고 할 수 있는게 아니야. 마나는 이 세계의 기본이자 종착점이라고. 이 세계의 전사들에게 마나 없이 싸우라는 건, 사지에 쇳덩이들을 매달고 싸우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야."


좁혀진 미간이 점점 펴지며 설명을 끝내고는, 이내 그 특유의 비웃음을 다시 얼굴에 담은 릴라쉬가 피식 웃었다.


"뭐... 당신 세계 인간들은 마나를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으니 애초에 이해할 수가 없겠지만. 간단한 원소 마도술만 봐도 아주 화들짝 놀라거나 벌벌 떠는 모습이 아주 웃겨."


그 말에 안 대위가 갑자기 이때다 싶다는 듯이 소리를 높여 말했다.


"거봐! 그 간단한 마법에도 벌벌 떨고 대항도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니들이 말하는 그, '어떤 마법도 안 통하는 재앙' 이냐고?"


안 대위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릴라쉬는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고는, 몇 초간 침묵하다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 그거야, 우린 아직 모르지만 뭔가 방법이 있었겠지. 차원 균열을 넘어 가서만 발동하는 술식이라던가, 아니면 정예병들 에게만 했던 마법 부여일 수도 있고. 당신 나라의 고위직들이 당신 같은 일개 기사한테 그런 비밀을 다 알려줄리도 없으니 당신은 모르는게 당연하지. 아무튼 당신들은 기록에 나온 그 고대 인류, 아니면 최소한 그 후손이 맞아."


"아니, 결국 아무튼 그럴거라는 확증편향 아냐! 제대로 된 증거는 없고!"


답답하다는 듯한 안 대위의 말에,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듯한 릴라쉬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는 잠시 무어라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자, 지팡이가 붉은 빛으로 밝게 빛났다.


"뭐, 뭐야, 갑자기?"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안 대위를 무시한 채로, 릴라쉬는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는 지팡이를 바로 앞에 있는 바닥에 겨누고는,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흔들어 나갔다. 


적색 보도블럭에 까맣게 탄 자국이 각각 'III' 'V' 'IX" 라고 써진 문양을 그려나가며 가느다란 연기를 피어 올렸다.


"너, 이거 무슨 숫자인지 알아?"


갑자기 뭘 이런걸 물어보나, 라고 생각한 안 대위가 퉁명스레 말했다.


"로마자 3, 5... 9 잖아. 갑자기 이건 왜? 근데 너희가 어떻게 로마자를 알..."


안 대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릴라쉬가 비틀린 미소를 씨익 지으며 말했다.


"어머, 기록상 그 '고대 인류'들이 썼던 숫자 방식인데, 신기하게도 당신이 정확하게 알고 있네. 이 세계의 인간들 중에 아예 '고대 인류'의 언어도 구사할 줄 아는 인간도 있던데 말이지. 이게 정말 완전한 우연일까?"


"뭐어? 아니, 그럴리가..."


"안 대위, 토론은 나중에 하는게 어떻나."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안 대위의 눈에, 그 둘을 차갑게 내려다 보는 케시흐의 세로 동공이 마주쳤다.


겨우 케시흐의 가슴까지 올라오는 안 대위의 신장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불과 몇 시간 전 편의점에서 수 초만에 냉장고에 처박히는 식으로 제압 당해 버린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대위를 내려다 보는 케시흐의 노란색 동공은 그녀가 아무런 표정을 짓고있지 않음에도 안 대위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 그, 그렇지."


"아직 우리는 전장이다. 발각되는 순간, 수십명의 추격자가 우리 등 뒤로 따라 붙을테고. 조금은 더 긴장감을 가져야 하지 않나."


"...미안."


기분이 나쁠 때마다 표정으로 드러내며 협박 해대는 릴라쉬 보다, 변함 하나 없는 케시흐의 눈빛이 더욱 무섭다고 느껴진 안 대위는 침을 자기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풋. 케시흐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네~"


"릴라쉬, 너도 왕국의 상급 마도사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해라. 언제까지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취급 받기 싫다면."


"네, 네, 죄송합니다~"


머쓱한 표정의 안 대위 옆에서 깐족거리는 릴라쉬를 향해서도 케시흐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며 그녀를 지적하지만, 릴라쉬는 마치 철 없는 반항아 고등학생이 선생의 훈계를 듣듯이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후."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는 케시흐의 발걸음이 갑자기 우뚝 섰다.


"잠깐."


"아, 잘못 했다니깐. 설마 여기서 훈계할 건 아니지?"


"그게 아니다. 저 앞에... 무언가 이상하군."


케시흐의 말에 안 대위도 눈을 가늘게 뜨고 도로 저 끝 편에 위치한 불빛 들을 바라보자, 어느 지점 부터 하얀 장벽 같은 안개가 도로 위로 넘실대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 장벽 뒤로는 가로등의 노란 불 빛만이 안개 속에서 노랗게 빛을 내뿜고 있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 정말이네... 뭐 안개가 저쪽에만 생겼지? 그것도 밤에."


"설마."


아까의 장난기는 순식간에 사라진 얼굴로 지팡이를 겨누고 잠시 눈을 감은 릴라쉬가 이어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렸다.


"쯧. 안개 마도술이네. 마나 농도랑 규모를 보면... 최소 7클래스 이상이고. 야, 인간. 우리가 가야하는 그 대피소라는 곳, 정확히 어느 방향이야?"


"...우리가 지금 여기쯤 이고, 북쪽이 이쪽 방향이니까.... 저기네."


작전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잠시 이리저리 움직인 안 대위의 손이 가리킨 곳은, 정확히 안개 한 가운데 였다.


"네 계획, 좀 바꿔야 겠어."


"왜? 뭐가 문젠데?"


콰광-


거리는 여전히 좀 있지만, 분명 이전의 폭탄 소리들 보다는 확연히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폭발음이 갑자기 안개가 있는 방향에서 울려왔다.


움찔하는 안 대위를 뒤로 하고, 안개를 바라보는 릴라쉬가 말했다.


"이정도 마도술이면 최소 숙련된 메이지 이상의 마도사가 시전한거야. 근데, 이 폭발음으로 듣자하니... 네가 말한 그 '대피소'에서 메이지가 소속된 우리 종족 연합군 부대랑 당신들 군대가 벌써 한바탕 싸우고 있는 것 같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대피소가 함락되기 전에 빨리..."


"뭐, 종족 연합군들 하고 인간들 피튀기게 싸우는 와중에 한 가운데로 털레털레 걸어 들어가서 잠깐만요~ 여기 이 사람좀 치료해 주세요~ 하려고?"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자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얘 죽어. 내 부하 죽으면, 나한테서 도움 받는건 기대도 하지마. 이 전쟁통에 무기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자발적으로 이 도시의 길잡이를 해줄 인간 장교 찾을 자신 있으면 맘대로 해!"


이전보다 확연히 창백해진 안색으로 가쁘게 숨을 쉬는 김 준위를 가리키며 말하는 안 대위를 향한 케시흐의 차가운 눈동자가 조금 누그러졌지만, 안 대위는 그것을 신경쓸 겨를도 없이 목소리를 높여 씩씩대고 있었다.


"아우, 진짜. 하여튼, 아예 쓰레기라면 쓰고 버리기라도 편할텐데, 쓸데없이 전우애만 돈독하네."


한 숨을 쉬며 인상을 쓰며 중얼거린 릴라쉬가 가방을 뒤적이다 안 대위를 향해 투박한 금속 고리 같은 것을 던졌다. 


"자. 목에 차."


"뭐, 뭔데?"


안 대위가 반사적으로 손에 받아든 금속 고리는 마치 거대한 수갑의 한 쪽 처럼 완전히 닫히지는 않은 채로 그의 손에서 미약한 초록 불빛을 빛내고 있었다.


"노예 구속구. 아, 그거 차고나면 억지로 열려고 하지마. 그대로 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뭐?! 근데 이걸 지금 왜 나한테..."


"네 동료 살리고 싶다면서? 그럼 연극 정도는 해야지."


"아니면, 이 전쟁통에 네 친구 살리는거 도와주면서 아인종들에게 찢겨 죽지 않게 도와줄 아인종 마도사랑 기사 찾을 자신 있으면 맘대로 하든가."


투박한 금속 고리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는 안 대위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릴라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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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특) 맨날 7000자 쓰고 올리려다 아 이거 좀 너무 절단 신공인데 하고 조금만 더 쓰다보면 14000자 되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