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1911년, 러시아 제국 리가)

 나는 대부분 가난한 라트비아 지역에서도 꽤나 지식인이었던 조부모님과 부모님 덕에 어느 정도 제국 내에서 중산층 정도의 생활 수준을 가진 집안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내 위로는 형 둘이 있었고, 밑으로는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러시아인, 할머니는 에스토니아인이었고, 상인 집안이었던 할아버지의 집안이 리가에서 대대로 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가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쪽은 두 분 다 라트비아에서 쭉 살아오신 모양이다. 내 집안은 라트비아인들이 농노에서 해방되자 여러 일들을 하다 상업으로 크게 벌어들이고서는 독일어를 배워 지배층으로 올라가고자 노력했다.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아버지가 태어날 때 쯤까지는 유효했다. 하지만 제국은 독일어를 탄압했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러시아어와 라트비아어를 가르치고 라트비아의 전통적인 민족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
 가장 서구화된 도시에서 태어난 나는 라트비아 신화, 문학, 언어 등을 배우며 아버지의 뜻대로 능숙한 상인이면서 민족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작가로 커서 라트비아를 널리 알리게 될 것으로 알았다.


 
 (1915년, 동부전선 어딘가에서)


 머나먼 곳의 세르비아의 일 때문에 제국에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이때야말로 라트비아가 드디어 독립할 때라며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제국은 부패해있었다. 아버지는 어느 정도 뇌물을 주고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면제받았다. 대신 몇몇 물건들을 군대에 공급하면 되었다. 우리 집은 큰 문제 없이 1915년에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자연스럽게 제국에 물건을 납품하는 것을 중단했다. 아버지는 확실히 라트비아가 독립할 것이라 믿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각대로 라트비아는 발트 연합 공국이라는 이름 아래에 독립하게 되었다.



(1919년, 라트비아 제 1공화국 리가)


 하지만 발트 연합 공국의 뒤를 봐주던 독일 제국은 패했고, 러시아 제국은 붕괴해 러시아 공화국으로, 소비에트 연방으로 계속해서 이름과 이념을 바꾸며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트 연합 공국은 무너지게 되었고, 대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쪼개져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계속 생기는 전쟁 중에 적군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큰형을 불러 잠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독일과 제국의 싸움과는 달리 라트비아를 지키기 위해 큰형과 함께 군대에 입대했고, 집안의 재산을 라트비아군의 무장에 쓰라며 정부에 꽤 기부하기도 했다. 적군이 리가까지 밀고 들어오자 잠시 라트비아의 서쪽 끝인 리예파야로 피난가기도 했다. 에스토니아가 적군을 물리치고, 라트비아를 위한 지원군이 도착했으며, 다시 라트비아는 점령된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리가를 수복했지만 아직 위험할 수 있으니 리가로 돌아오지 말라는 아버지 친구가 전해준 말을 듣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리예파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라트비아가 에스토니아에 이어 적군과의 평화조약을 맺고 완전히 독립한 다음 날, 아버지와 큰형은 리예파야의 우리집에 우리를 리가로 데려가러 찾아왔다. 리가에서 벌어진 전투 탓에 집과 상점은 대부분 부서져버렸고, 재산은 라트비아 정부에 군대를 위해 쓰라고 기부해버렸지만, 우리에겐 조국이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주어졌다. 아버지는 다시 처음부터 하듯이 노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살만한 형편이 되고, 전쟁 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큰 상인 집안이 될 수 있었다.



(1931년, 라트비아 제 1공화국 리가)


 나는 글 짓는 솜씨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상인 일은 형들에게 맡기고 나는 작가로 키우고자 했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해 라트비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큰형은 수완 좋은 사업가가 되어 리가를 멋지게 개발하고 있었고, 작은형은 공학자가 되어 라트비아를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다. 여동생은 나를 따라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내가 대학교에 있던 1934년,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 때를 기점으로 국제 정세도, 국내 정세도 애매하고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라트비아가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에 시위를 하다가 잠시 끌려가서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 시위 참가를 후회하지 않는데, 같이 시위에 참가했던 같은 과 여학생이 지금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부모님들은 우리의 결정을 지지해주셨고, 우리는 리가에 집을 구해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난 그 쿠데타로 극에 치달은 정치인들이 잘려나간 것은 좋지만 독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신문사에서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일을 맡아서 하기 시작했고, 아내는 시를 지어 시집을 내었다.


(1942년,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라트비아 리가)

 나는 라디오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와 큰형은 크게 화를 내면서 당장이라도 정부를 뒤집어 엎을 것 같은 기세로 소리쳤다. 라트비아는 소련에게 합병당했다. 이건 말도 안된다. 아버지와 큰형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얻어낸 독립인데. 나는 가족들과 함께 합병 무효, 합병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함께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시위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잡혀가거나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도 시위 도중 사라지셨고, 연락을 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시위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는데, 1년도 되지 않아서 라트비아를 해방시켜 줄 구원자가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해달라며 적절한 자치를 주었다. 몇 대의 폭격기가 라트비아에 잠시 착륙하기도 했다. 몇몇 유대인들과 집시들이 끌려가는 것을 봤지만, 나는 모른 체 했다. 소련보다는 훨 나은 사람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 구원자들에게 완전히 지지를 보내진 않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예전에 하신 말씀인 "우리 조국이 아니면 굳이 바칠 필요가 없다."에 따른 것이었다. 아버지의 말은 옳았다. 아직 라트비아 전체가 소련에게 짓밟히진 않았지만, 1944년 중순이 되자 라트비아는 소련에게 다시 짓밟혀 합병당했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은 사라졌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저 동쪽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다 죽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전쟁은 끝났고, 라트비아는 사라졌다. 나는 라트비아를 지키기 위해 글을 짓기로 했다. 큰형도 작은형도 여동생도 아내도 모든 가족들이 라트비아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1957년, 소련 라트비아SSR 리가)

 빌어먹을 콧수염 녀석! 꼴 좋군! 그 새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끌려가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질까봐 떨던 것이 생각났다. 1944년에 태어난 아들과 1946년에 태어난 딸을 데리고 우리는 익명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집에서 라트비아에 대해서 가르치기도 했다. 큰형은 라트비아 독립단체에 돈을 대주다가 사라졌고, 큰형의 가족들을 위해 작은형과 나, 여동생은 소련이 독일을 몰아냈을 때 서로 한 약속대로 여러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콧수염 녀석이 정말 기쁘게도 뒤져버린 다음 날, 콧수염 녀석에게 저항하다 사라진 큰형이 돌아오는 꿈을 꾸기도 해서 일어나 계속해서 울기도 했다.
 다음으로 소련을 맡은 대머리 녀석은 콧수염 녀석을 굉장히 비난했다. 나는 그 콧수염 녀석을 비난하는 글을 계속해서 쓰기도 하면서 라트비아의 독립에 대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스푸트니크에 대한 축하글을 써달라고 하는 부탁을 나는 곧바로 거절했다. 그건 너희들의 성과지 우리들의 성과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1975년, 소련 라트비아SSR 리가)

 아들은 자신이 관심있던 사학을 전공해 라트비아의 고대 신화와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몰래 이곳저곳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딸은 우리를 따라 작가가 되기로 하고 소련의 독재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소설을 계속 발표했다가 비밀 경찰을 피해 바다 건너 스톡홀롬으로 망명했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거늘... 우리는 정부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버려서 출국이 힘들어졌고, 딸은 소련에 들어오는 즉시 체포될 것이 분명했기에 우리는 당분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지 25년이 다 되어가자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큰형을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버텼다. 라트비아는 언젠가 독립을 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매일매일 펜을 집어들었다.



(1991년, 라트비아 공화국 리가)

 나는 오늘 주저앉아서 울었다. 아내는 80먹은 노인네가 왜 갑자기 우냐고 하면서도 같이 울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여동생과 작은형, 큰형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광장으로 나갔다. 아들도 손자 손녀를 데리고 광장으로 모였다. 모두가 멋진 라트비아 국기를 흔들었다.
 작년에 바로 남쪽의 리투아니아가 갑자기 독립한데 이어 라트비아도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립하자마자 딸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 리가에 왔다. 남편인 스웨덴 남자는 편집부에서 만났다고 한다. 나는 딸을 만나서 기뻤고, 딸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기뻤다. 독립의 날에 광장에 쏟아져 나온 라트비아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와 큰형이 떠올랐다. 그리고 리가에서 떠나서 잠시 살았던 리예파야의 집도 생각났다. 이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은 작은형도 떠올랐다. 나는 작은형의 묘지에 찾아가 라트비아 국기를 꽂아주며 독립을 알렸다. 아버지와 큰형은 행방을 알 수 없어 집에 있는 사진이 전부였는데, 그 사진을 모두 작은형의 묘지에 같이 두고 라트비아 국기를 꽂아두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인생의 절반은 라트비아와 함께, 인생의 나머지 절반은 라트비아를 위해 살았다. 라트비아가 아무 일 없이 행복하고 가난하지 않게 독립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라트비아를 위해서 희생한 모든 것들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라트비아가 독립국이 되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