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분량이 꽤 많을 것 같아서, 2편으로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본 스토리는 허구이며,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서 찬양할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선통 2년(1910년), 청국 쿠룬(현 몽골 울란바타르)


우리 아버지는 광서 23년(1896년), 청국 쿠룬에서 태어나셨다. 내 양친이 모두 투바인인데 왜 아버지가 할하몽골 땅에서 태어났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텐데, 19세기까지만 해도 내몽골 이북에 도시라고 할만한 곳은 쿠룬, 지금의 울란바타르와 러시아 제국의 영통였던 베르흐네우딘스크밖에 없었다. 귀족 출신이었다가 단 한번의 실수로 인해 가축을 모두 잃은 우리 조부모님이 가신 곳은 나름대로 큰 도시인 쿠룬이었다. 그때가 광서 21년(1894년)이었다. 그곳에서 조부모님은 다른 사람의 말을 관리하는 일을 하셨고, 그곳에서 우리 아버지이신 쯔렌 다라이오글루를 낳으셨다.


우리 아버지가 15살이었을때, 남쪽에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혁명이 일어나 황제를 실각시키고 전국이 전쟁터처럼 변하고, 눈이 파랗고 머리는 금색이며, 피부색이 하얀 외계인들이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별 생각이 없으셨다. 그렇게 생긴 외계인들은 북쪽에도 있다는 소문을 언뜻 듣기 했는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부모님께서는 그때 아버지를 안심시키시었다. 멀리 서쪽에서 온 사람들이 그렇게 생겼고, 네 친구들이 하는 말을 다 믿을 필요는 없다고.
곧 청나라 사람들이 몽골 땅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리 조부모님은 정말 중요한 짐만 들고 먼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동안이나 말을 타고 도착한 곳은 조부모님의 고향, 탄누 우랑하이의 차단이었다.


1910년?, 우랑하이 공화국의 샤먼들


1911년, 고향 차단으로 돌아온 할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형제들과 재회하시었다. 할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은 서로 마유주를 나눠 마시며 오랫만에 서로 본 형제들을 반겨주시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웃 부족인 할하 몽골의 귀족들과 왕족들이 중원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독립국을 선언하였다면서 우리도 어서 한족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우리 투바족의 국가를 설립해야 한다고 호소하시었다. 곧 투바 지역의 귀족들과 승려들이 예니세이 강가에서 긴 논의를 갖고 우랑하이 공화국을 건국하기로 결의하였다.

곧 서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계인처럼 생긴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물들을 전해주었다. 길거리에 있던 중국인 상점과 중국식 건물들은 불에 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콤부도르주 오유 선생께서는 곧 공화국의 암반 노얀(국가수반) 자리에 오르시었다.
콤부도르주 오유 선생께서는 의형제였던 우리 할아버지를 러시아에 사신으로 보내시었다.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서쪽의 러시아에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서한을 들고 말에 올랐다.
아버지가 바라본 러시아의 첫인상은, 정말 다른 세상에 온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말을 타고 달릴수록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버지가 서역에 도착하자, 회족들이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사신 일행을 역으로 안내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일행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쇳덩어리'에 탔다. 그 쇳덩어리를 타고 며칠을 더 가자, 러시아의 임금이 살고 있다는 페트로그라드가 나타났다. 차르와 러시아 귀족들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할아버지는 콤부도르주 오유 선생이 적은 서한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서는 러시아 차르에게 정중하게 우랑하이 공화국을 보호국으로 편입시켜줄 것을 부탁하시었다. 러시아 차르는 흔쾌히 수락하며 사신 일행에게 만찬을 대접해주었다. 차르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러시아 귀족에게 장가보낼 것을 권유하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어머니와 결혼하였고, 나의 형을 낳고, 2년 뒤 투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말을 맡아주었던 서역 사람들과 감사의 의미로 함께 술을 마셨다.


곧 투바 곳곳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고, 길가에는 우랑하이의 깃발과 함께 러시아의 삼색기와 차르의 사진이 걸렸다. 그러나 러시아의 관리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투바인들을 향해 눈을 찢거나, 냄새난다는 시늉을 보였다. 세금은 가혹하게 걷어갔고, 샤먼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으며, 부족의 가축을 훔쳐가는 일도 잦았다. 부족의 전통과 초원의 법칙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중요시했던 만주족의 청국보다도 못한 시절이 계속되었다.
«이건 아니오!»
할아버지께서 분노한 채로 말씀하시었다.
«이건…이건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 아니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소이까…우리의 서쪽에서는 서역과 열강들이 득세하고 있고, 남쪽에서는 군벌들에 의한 혼란과 분쟁이 계속되며, 동쪽에서는 할하 부족이 언제 우리를 침략해올지 모르니,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뎌내야 하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의 꿈에 서역 사람처럼 생긴 산신령이 나타냈으니, 이제 곧 새로운 세상이 찾아올 것이고, 이 땅의 서쪽 끝에서 억압된 민중을 해방시킬 자가 찾아오고 모든 억압의 사슬이 끊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한편, 1920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그것이 바로 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민족 교육과 불교 교육을 받았으며, 말과 함께 초원에서 놀았다.


오래지 않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잠시 중국인들이 찾아왔으나 곧 러시아인들에 의해 격퇴당했다. 다시 초원은 전쟁터로 변했으며, 러시아 백군의 수탈은 더욱더 심해져 갔다. 할아버지와 여러 귀족들, 젊은이들은 압제자를 견디다 못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대장정을 떠났다. 대륙의 서쪽 끝에서, 할아버지와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사회주의 교육을 받고, 붉은 군대와 함께 나타났다. 해방자들은 악명높은 우랑하이 지역의 최고 관리를 끌어내 목을 베고 그 목을 예니세이 강가에 걸어두어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침을 뱉도록 하였다. 곧 그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돈두크 쿨라르 선생이 투바가 압제자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언하였으니, 이것이 투바인민공화국 건국이니라.



1921, 투바인민공화국 선포식에서 발언하는 돈두크 쿨라르 선생(1888, 청국 탄누우랑하이~1932, 소련 러시아SFSR)


그러나 내가 고작 9살이었을때, 평화로운 초원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소련 스탈린과 몽골 처이발상의 지원을 받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한 돈두크 쿨라르 선생을 몰아내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끝까지 반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막강한 지원을 받은 쿠데타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쿨라르 선생과 함께 우리 할아버지는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당했고, 아버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아버지는 끌려가시기 전 자신의 친구였던 세르게이 퀴쥐겟에게 부탁을 해두었다. 세르게이 퀴쥐겟에게는 쇼이구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나와 절친한 사이었고, 어렸을때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총명했던 그는 한 가지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되게 쓸데없는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그가 정부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할때, 이름이 쇼이구이고 성이 퀴쥐겟인데 앞뒤를 바꿔서 이름이 퀴쥐겟, 성이 쇼이구가 되도록 등록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듣고 한참을 웃었고, 그를 부를때 퀴쥐겟이라고 불렀다.결국 강경파였던 살착 토카와 헤르텍 안치마가 통치하는 시대가 왔다. 수도 크즐에는 비밀경찰이 돌아다니고, 스탈린의 사진이 붙여졌다. 처음엔 욕하던 나와 퀴쥐겟도 도시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으며 공산주의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비록 자유는 덜해졌지만, 그건 초원에 나가서 지도자 욕을 하면 그만이고, 사람 없는 이 땅에서는 멀리 나가서 욕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 정도면서 모두가 평등해지는 시대가 온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조금 달랐다. 내가 본 이 시기는 피로 물들어진 시기였다. 승려, 샤먼, 할하족, 오이라트족 등 종교를 믿지 않는 투바인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목이 날아갔다. 절들은 모두 불에 타 하나의 사원만이 남았다. 전통 문자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오직 서양의 글자로만 우리말을 쓸 수 있었다. 곧 그 칼날은 유목민을 향했다. 가축들은 모조리 공산당 정부로 귀속되었고, 나와 퀴쥐겟은 크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