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글을 잘쓰는 편이 아닙니다. 다소 문장이 난해해도 이해해주십시오.

-이 소설은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2부로 나눠져 있습니다.



나는 1934년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주의 힐베르쉼(Hilversum)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힐베르쉼은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약 20km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다. 나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셨고 어머니는 그 당시 사람 치고 드물게 종교가 없는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사회주의 정당 네덜란드 노동당의 당원은 아니었지만 조금의 호의를 가지고 있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항상 그랬던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계셨다.




공영방송국인 미디어파크로 유명한 노르트홀란트 주 힐베로쉼(출처: https://www.google.co.kr/search?q=hilversum&prmd=minv&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ipi6j8_8HnAhWKOnAKHSsLBYIQ_AUoAnoECBgQAg&biw=360&bih=572#imgrc=DgOklMdmk1j_qM)


우리 아버지는 개신교 방송 협회 NCRV를 자주 들으셨다. NCRV는 공영 방송 협회에서 총 시간의 30%를 할당받아 방송하고 있었는데 주로 개신교 예배나 설교 내용이 들어있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유난히도 사랑하셨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마을의 사람들, 친척들을 다 데리고 축가를 부르며 내 인생에 축복을 빌었다. 나는 커서 이 이야기를 곱씹을때 마다 가끔씩 눈물이 나오고는 한다. 힘들었던 인생 와중에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을때 뭉클해지는 상상을 해보면 내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독자 여러분도 이해할 것이다.


태어날때 우리나라의 여왕은 빌헬미나 여왕이었다. 빌헬미나 여왕 폐하는 1880년 생으로 10살밖에 안됐던 1890년에 즉위하셔서 그 해에 40년이 넘게 왕위에 있었다. 빌헬미나 여왕에 대한 우리나라 시민들의 지지도는 높았는데 내 생각에는 강렬한 카리스마, 민주주의에 대한 어느정도의 존중, 강한 추진력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는데에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다만 내 기준으로 조금은 비판하고 싶은게 있었다. 여왕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는데 내가 태어나기 몇 해전인 1928년에 개최했던 암스테르담 하계 올림픽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개막식에 불참하는 등(폐막식에는 마음을 돌려 오시긴 했다.)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대에 맞지 않고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성향 때문이었는지 시민의 손으로 뽑은 의회와 이견으로 인해 다툼을 몇 번 벌이기도 하였다.


내가 어렴풋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5살 무렵인 1939년, 아버지는 어머니와 탁자에 있는 라디오로 독일이 옆나라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짤막한 뉴스를 듣고 한숨을 쉬며 "에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쟤네는 팽창에 무비판적이고 광적으로 집착해." 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우리 가족, 아니 더 나아가 우리들의 이웃을 화목한 가정에서 이웃에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940년, 우리 가족이, 시민들이 그렇게 걱정하던 것이 찾아오고 말았다. 나치 독일 군이 침공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나에게나 가족들에게나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웃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렇게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나이가 많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너무나 생생하고, 또 그렇기에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알고 지내던 몇몇 이웃들은 다른 공습이 덜한 지역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으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이웃도 있다.


옆집에 나를 특히 이뻐해주던 15살 누나는 발레리나를 꿈꾸며 학교가 끝나고 무용 교실을 다니기도 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결국 그만드었다. 이 해 9월, 나는 초등학교에 첫 입학을 하게 됐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나치에 먹혀버린 후였다. 학교의 선생님은 나치 독일 정부의 강요에 학생 중 유대인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강요를 받았고 한번은 이런 강요에 힘들어하며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인적도 있었다. 정말로 비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몇달을 방공호에 숨어있었다. 너무나 답답해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주던,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라디오였다! 그 라디오 중에서도 정말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존재가 나와 연설을 했는데 빌헬미나 여왕 전하였다! 빌헬미나 여왕은 영국 런던으로 피난하며 BBC의 방송 시설을 빌려 네덜란드인에게, 그리고 저 멀리 지금은 인도네시아로 독립한 동인도 지역에 희망을 주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이러한 여왕의 노고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정말이지, 라디오가 눈물로 젖어서 고장나지 않은것이 신기했을 뿐이다. 우리 가족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숨어서 듣고 있었을지 모르는 다른 우리나라 시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치 독일에 발각되지 않으려고 라디오를 깊은 곳 어딘가에 숨겨놓기도 했다. 그러다 검사라도 하러 오면 재빨리 숨기기에 바빴다. 


영국 런던 BBC에서 네덜란드를 향해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빌헬미나 여왕 (출처: 나무위키)


밖에서는 독일군이 유대인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있었다. 유대인을 보면 당장 신고하라는 삐라 공문이 여기저기 공공시설에 써붙여있기도 했는데 실로 공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숨어다니던 유대인들의 공포는 하늘을 찔렀을 겄이다. 숨으러 간 곳에 갑자기 독일군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길을 돌아다니면 길 위에 널브러져 있는 시민들의 시체를 보면 어린 나의 눈에도 눈물을 쏟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끔찍했다. 이렇게 방공호에 숨어있는 것만 해도 마음고생이 심한데 시민, 군인들의 시체를 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나도 가족도 우리나라 군인들도 전쟁에 다 지쳐있는 상태로 몇 년이 지난 후였다. 1944년, 나는 10살이 되었고 그해 6월......


미국, 우리나라 군을 포함한 다국적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상륙하고 탈환했다! 독일은 위축해지는 듯 싶었고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도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연합군은 그 해 크리스마스때에 위축의 끝을 본 독일이 항복할 것이라 믿었다. 연합군은 영국군을 위시로, 벨기에 쪽에서 에인트호번, 아른험 쪽으로 진격로를 정하고 독일과 싸웠으나 예상치 못하게, 17000여 명의 포로가 독일군에게 잡히며 패전하고 말았다. 너무나 참혹했다. 연합군이 너무 안이하게 작전을 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 이전에, 시민들 군인들 할 것 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는 너무나 심해졌다. 더 심했던건, 그동안 독일군의 협박에 시달려온 네덜란드 국철 기관사, 직원들이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을 하며 파업을 벌였고 마켓가든 전투가 실패해버리자 독일군은 철도로 물자, 식량 수송을 금지해버려 많은 우리나라 시민들이 기아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도 너무나 굶주림에 시달려 먹을 것만 있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던, 없던 그냥 내 판단에 먹을 수만 있다면 줏어서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피로가 쌓여가고 있던 참이었다.


마켓가든 작전의 진격로

(출처: 나무위키)

마켓가든 작전으로 파괴된 아른험(Arnhem)대교

(출처: 나무위키)


반년 좀 넘게 지난 1945년 5월 쯤, 라디오로 히틀러가 죽었다는 내용을 라디오로 속보로 들었다! 우리나라를 침공하고, 우리나라의 군인들을 많이 죽게 만들고, 장애인, 유대인 등의 소수자, 소수민족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그 놈이 말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우리의 손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준비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