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프랑스인과 독일인 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알자스인의 관점에서 썼습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1899년, 독일 제국 슈트라스부르크)


 나는 꽤나 복잡한 혈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할아버지가 알자스 지방 토박이었고, 할머니가 벨기에-하노버(당시는 프로이센이 아니었다.) 혼혈이었다. 아버지와 두 삼촌은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 쪽은 할아버지가 파리 출신이었고, 할머니는 리옹 출신에서 파리로 올라온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외삼촌 둘은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작은외삼촌은 슈트라스부르크에 살았고 큰외삼촌은 벨기에에 살았다.

 아버지는 집안의 대를 이어서 광산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어릴 때 프랑스인으로 살고 있다가 갑자기 독일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신조는 시대의 '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였기에, 아버지는 프랑스어도 배웠지만 독일어를 주로 배웠다. 우리 집안의 광산에 관련된 일로 어머니 집안이 이 쪽으로 이주와서 우리 가족이 생길 수 있었다. 나는 첫째로 태어났고, 밑으로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내가 집안의 광산을 경영하는 일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며 아버지는 나에게 많은 독일식 교육을 시켰고, 나는 그것을 잘 따라갔다.


(1914년, 슈트라스부르크 방면의 독일-프랑스 국경)


 전쟁은 모든 것을 뒤엎었다. 아버지와 두 삼촌은 독일군에 징집되어 프랑스를 공격하게 되었고, 작은외삼촌은 어머니와 함께 독일에서 추방당한 뒤 큰외삼촌과 함께 프랑스군에 징집되었다. 예전에 군에 복무해서 예비군이었던 외할아버지는 하급 장교로 프랑스군에 징집되었다. 나는 두 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파리 교외에 있던 외가로 피난갔다. 나는 어느정도 나이를 먹었지만 그렇게 사이가 좋던 두 나라가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독일군에 징집된 가족과 프랑스군에 징집된 가족들이 서로를 죽이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독일어가 프랑스어보다 더 자연스러웠던 나는 전학간 파리의 학교에서 독일의 앞잡이, 제국의 노예라며 따돌림만 당할 뿐이었다. 광산을 경영할 수 없었던 우리 집의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다.

 전쟁이 끝나자 우리 가족은 많은 것을 잃었다. 큰외삼촌과 외할아버지, 작은삼촌과 아버지는 모두 같은 전투에서 전사했다.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라고 했다. 나는 겨우 살아돌아온 작은외삼촌이 우리를 슈트라스부르크, 또는 스트라스부르로 데려가는 동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큰삼촌은 실종 상태였고, 수십년이 지나도록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집안의 광산은 파괴되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나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와 작은외삼촌을 따라 프랑스인이 되어 살 수 밖에 없었다.



(1927년, 프랑스 제 3공화국 스트라스부르)

 독일의 알자스 로렌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 색을 빼겠다며 모조리 독일과 관련된 것을 탄압했다. 프랑스어가 서툴었던 나는 프랑스 국적이었던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라인강 너머로 추방당했을 것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사라졌고,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과 내가 다니던 독일계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추방당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고, 나는 적응할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프랑스군에 잠시 복무하기도 했지만 날짜가 되자 더 복무하지 않고 바로 전역했다.
 나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두 동생들을 위해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프랑스 색이 되어가는 스트라스부르는 완전히 독일식으로 교육받은 나에게는 만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단지 바뀌어야할 독일인으로 보았다. 어머니의 국적을 따라 프랑스 국적을 얻지 못했더라면 나는 광산에서조차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재앙이 우리 모두에게 닥치기 2~3년 전, 나는 서로 사랑하게 된 공장의 여공과 결혼할 수 있었다. 나는 동생들이 잘 교육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집을 도와야했기에, 집은 원래 집과 한 블록 정도 떨어진 지역에 마련했다. 


(1933년, 프랑스 제 3공화국 스트라스부르 직업 소개소)

 대공황이 닥쳐왔고, 내가 일하던 광산과 아내가 일하던 공장은 문을 닫았다. 수입원이 모두 끊어진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삼촌들 몫으로 나오는 전쟁 전사자와 관련된 연금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32년도에 태어난 첫째 아들은 이런 가난함을 견디기에는 너무 약했다. 첫째 아들을 잃고서는 계속해서 상심에 잠겨있었다.
 프랑스는 식민지를 쥐어짜며 경제를 살리려 노력했었고, 나는 신문을 배달하는 일 정도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36년도에 딸이 태어났고, 나는 프랑스보다 더 빠르게 경제가 회복되고 있었던 독일의 자르 지역으로 건너가 광산 중간 관리직 정도는 구할 수 있었다. 독일은 갑자기 조약을 파기하며 재무장을 시작했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0년, 나치독일 점령 하 파리)

 전쟁의 징조는 계속해서 있었지만 나는 이를 계속해서 무시해왔다. 독일은 갑자기 폴란드를 침공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과 전쟁을 시작했다. 나는 프랑스군에 잠시 복무했었기에, 프랑스군이 소집되자 바로 일을 그만두고 국경 방어선으로 배치받았다. 다행히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침공할 생각이 없어보였고, 나는 새해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다.
 독일이 갑자기 프랑스를 침공하기 시작하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겪었던 끔찍한 대 전쟁으로 내가 아는 모두가 또 희생당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나는 미친듯이 떨면서 방어선에서 경계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하던 걱정은 모두 필요없었다. 독일군은 내가 있는 쪽으로 오지 않고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나는 잠시 포위되었다가 정부가 항복하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스트라스부르는 독일로 다시 돌아가 슈트라스부르크가 되었고, 나는 아버지가 독일인이었고 독일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며 꽤 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독일인이므로 독일인 취급을 받으며 전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 때의 나는 프랑스 해방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독일인으로써 독일을 위해 일할 뿐이었다.

 
(1945년, 해방된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가 다시 프랑스의 손에 넘어가자 나는 다시 프랑스인이 되었다. 나는 나치 부역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자진 부역이 아닌 점과 부계가 독일계였던 점, 국경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서 나고 자란 점 등을 감안해 석방되었고, 그 대신 포로수용소에서 잠시 근무하게 되었다. 안정적인 포로수용소 근무는 포로들이 모두 석방되기 전까지는 딸이 충분히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혹시 몰라 독일어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설득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이제는 더 싸우지 않을 것이니 굳이 강박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딸이 독일어와 프랑스어 모두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둘 다 가르쳤다. 포로수용소 근무에서 포로들이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포로들과 독일어로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친하게 지낼수도 있었다. 그 중 폭격기 조종사도 있었고, 전차 조종수도 있었으며, 고속정 승조원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빠르게 재건되기 시작했다. 폭격으로 쑥밭이 되어버린 도시들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잔해들을 치우고 건물을 올릴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포로 수용소에서의 근무가 끝나자 나는 광산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폭약을 다루는 일을 맡게 되었다.


 (1960년, 프랑스 제 5공화국 스트라스부르)

 1920년대의 독일 추방정책이 주민들의 큰 반발을 만들었기 때문에, 스트라스부르는 어느정도의 자치를 얻을 수 있었다. 원래 독일인이었던 나도 차별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50년대 대부분은 평화롭게 건설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성인이 된 딸은 성적이 괜찮았고 독일어와 프랑스어 모두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다른 언어도 어느정도 할 수 있었기에 파리로 올라가 어문관련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고 식민지 곳곳이 독립하려하자 정부는 전쟁을 벌여서라도 막으려했다. 사람들은 전쟁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딸은 대학에서 반전시위에 참가하곤 했다. 나는 내가 겪은 첫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기에 전쟁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딸을 응원했다. 전쟁은 알제리의 독립으로 끝이 났고, 딸은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쓰며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0년, 프랑스 제 5공화국 스트라스부르)

 이제 서독과 프랑스가 공동체로 묶이기 시작한지 시간이 꽤 지났다. 나는 이렇게나 많은 피를 흘려서까지 평화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을까, 겨우겨우 공동체로 묶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일인과 프랑스인이었지만, 프랑스 땅이었다가 독일의 영토가 되어버린 지역에서 잘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역은 프랑스령과 독일령을 좀 더 오가다가 프랑스령으로 정착되었고,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강 건너와 잘 연결되어있다.
 솜 전투와 베르됭 전투가 벌어진 지역으로 가서 큰외삼촌과 외할아버지, 작은삼촌과 아버지에게 이제 두 나라 사이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왔으니 더 이상 슬퍼할 사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전해주고 왔다. 큰삼촌은 슬프게도 아직까지 찾을 수 없었지만, 큰삼촌에게도 스트라스부르의 집으로 돌아와 전해주었다. 나는 이 평화가 영원토록 지속되어 이 국경도시에 더 이상 슬픔이 내리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내 딸의 아들은 평화로운 시대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