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내용엔 정치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나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나는 1909년 바르샤바 시내의 조용한 골목길 모퉁이에서 마법적으로 태어났다.

나의 가족과 난 바르샤바 외각의 소박하고 작은 집에서 살았다.

나의 성적은 그저 평범했고,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아침,저녁 마다 아버지께서 읽어주시는 신문과 라디오를 들으며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수있었다.

1918년, 우린 러시아와 독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당시 분위기와 사람들의 함성을 잊을수 없다.


1919년, 폴란드가 벨라루스를 선제 공격했다.

거대한 연방국가와 한날 독립한지 10년도 안된 국가가, 어떻게 이기겠는가?

아버지는 징집되셨고, 그후로 아버지를 다신 만날순 없었다.

어느날, 라디오에서 말하길,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 근처에 왔답니다!

나는 공포에 떨었다. 곧 멀리서 그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포격 소리와 총격의 소리후엔, 그들이 더이상 오지못하고 쓰러져있는걸 볼수있었다.

바르샤바 외각에서 붉은 군대의 깃발을 노휙한 폴란드군



우리나라 군대는 빠른속도로 그들을 쫒아가기 시작했고,

1921년,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도움으로 승리할수있었다.


                              그당시 그제고즈.

우리는 옛땅을 되찾았고, 라디오에선 피우스트스키를 찬양하는 프로파간다만이 나왔다.

후에 알았는데, 사실 소련은 전부터 독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중 하나로 만들려 하였다는것이다.

공산주의를 몰아넣었다.

    국가 원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하지만, 피우스트스키가 죽은후, 그후론 또다른 몇몇 바보같은 독재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는 하락하기 시작했고, 내가 성인이 되는 그날엔 , 다시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가난해졌다.

독재자놈들과 우리는 민족주의에 물이들렸다.

소련은 우리에게 협상을 하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뭐든 안된다고만 하였다.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몇몇의 국가의 땅에 여긴 폴란드인들이 많이 사니 가져갑니다. 라고 하면서 땅을 가져갔다.

이건 무슨 깡패아닌가? 나는 이때부터 무언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1939년, 우린 그단스크를 주었어야만 하였다.

그조금만한 뭐 얼마나 한다고 버티는가? 우리는 거기 없더라도 다른곳을 찾으면 될텐데?

하지만 나말고 다른사람들은 프로파간다에 홀렸는지, 반대가 극심했다.

제 3제국은 우리나라가 했듯이, 같은 논리로 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답변은 좆까란거였다.

나는 그당시 군대에 있었다.

이러다 전쟁나는지 궁금했다. 자존심만 쓸대없이 강해서.

그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서쪽에선 독일이, 동쪽에선 소비에트 연방이, 괜찮다. 우리에겐 프랑스와 영국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계약이라도 한듯 아무것도 안했다.

실제로, 아니 진짜로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방관했다.




                                   그당시 그제고즈

나는 비츠나 전투에 참전을 하였다.

60:1 이였다. 700명과 42000명이 싸우면, 누가 이길거 같냐?


                                      폴란드군


결국 우리는 4일만을 견디고 포격과 공습에 결국 80명만이 살아남았다. 독일군은 최소 900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대위는 수류탄으로 독일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나는 독일군에게 잡혀서 소련군에 넘겨졌다.

곧, 폴란드라는 나라는 사라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지하정부를 만들었다. 정부,법정,학교등을 건설하였다.

독일군들은 수백만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였고,소련군들은 여자,아이들 할꺼없이 강간을 하였다.

당시 하사관이 였던 나는, 몇개월간 수용소같은데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였다.

그리고 어두운 카틴숲으로 끌려갔다.

나는 두명의 소련군이 나를 쌔게 잡아서 끌고갔다.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갈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가, 나는 트럭에 시체가 트럭의 천장보다 높게 싸인걸 보고야 말았다. 가다가 시체 하나가 덜그럭하면서 트럭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잠시 모든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이 굳었다.

소련장교로 보이는 남자가 건물 입구 앞에서 앉아 나에게 허리띠를 풀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곳에 싸인 허리띠들을 보았다.

1000개는 넘는것 같았다.

이런 씨..ㅂ...

나는 허리띠를 강제적으로 풀리고 작은 콘크리트 건물로 들어갔다. 이렇게 작은곳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을리 없잖아...!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군인이 리스트를 꺼내서 나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제고즈 브젱치슈츄키에비치... 하사관 맞나?

네, 맞습니다. 나는 답했다.

그들은 러시아어로 대화를 하더니 갑자기 나를 어딘가로 또 끌고 갔다.

아....앗



                                   카틴 숲

나는 기차역에 끌려갔다.

내가 받은건 오직 소세지 하나와 상한 빵이였다.

그곳엔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까지 있었다.

20명씩 기차 화물칸 한칸에 구겨넣어진뒤, 기차는 시베리아로 출발했다.

1941년, 굴라그.

안데르스는 군대를 만들었고, 우리는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던 와중에, 사람들은 굶어죽고, 얼어죽는 사고가 많았다. 결국 우린 페르시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친절하였다.

그들의 음식은 복통과 구토를 유발하는 영국의 통조림보다 100배는 더 나았고, 그들의 일이 아닌데도, 영국이 주지 않은 관심은 주었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아이들에게 수영장을 마음껏 사용하게 하였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켜주고, 배불리 먹여주었다.

우리는 동쪽으로 갈지, 서쪽으로 갈지 골랐다.

내 말은, 소련군, 혹은 영국군. 이말이다.

추운 날씨는 지긋지긋하다.

나는 영국쪽에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아, 아직 말하진 않았지만, 영국에 이미 간 군인들도 있더라.

운좋은 놈들.

몇년후, 우리는 몬테카시노로 갔다.

우리는 승리해 죽음의 산에서 사라진 조국의 깃발을 개양했다.

폴란드 국기를 개양한 몬테카시노.


공수부대는  기밀 자료를 탈취해, 망명 정부를 지원했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에니그마 코드를 풀어서 수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렸다. 또한 몇번의 아우슈비츠를 정체를 밝히기 위해 들어간 군인들이 많았다. 증거까지 들고왔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정치보다 사람목숨이 중요한거 아닌가?

몇개월이 지났을까, 바르샤바엔 큰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우린 돕고싶었지만, 못했다.

마켓 가든 작전때문에...

나의 형 토마슈는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어머니도...

전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찾지 못했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돌아갈수 없다.

장병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든 것은 영국의 배신이었다. 1946년 여름, 런던에서 열린 승전 기념 행진에 자유 폴란드군은 초청을 받지 못하면서 이런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영국은 에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권이 집권하며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공산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상태였고, 따라서 자국에 남아 있는 자유 폴란드군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일부 예외도 있어서 본토 항공전에 영국 공군 소속으로 참전한 폴란드 공군 조종사들은 초청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우들과의 의리를 고려하여 영국 정부의 초청을 거절했다. 전후 야당지도자로 활동한 처칠은 승전 기념 행진이 있기 사흘 전에 하원 연단에 올라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며 유감을 표명했다.

기밀이 풀린 후에 안 사실→ 처칠이 스탈린 한테 폴란드를 넘겼다.

나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돌아갈려고 했다.

하지만 자유의 세계가 철의 장막에 가로막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고향땅을 밟고 죽겠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착륙하기전,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모든게 파괴되었다.

난 온몸에 힘이 빠진체 하염없이 울었다.

군복을 입은채 귀국 했고, 폴란드 비밀경찰은 24시간 동안 날 감금했다. 심문관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당신이 폴란드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아. 우리는 당신같은 사람이 필요없어."


내가 살았던 작은 집은 다행히 무사했다.

나는 열쇠가 숨겨진 곳을 알고있었고, 오랫동안 관리받지못한 것같은 마당과 말라죽은 꽃이 꽃힌 화분을 들쳐서 보았다. 있었다. 나는 들어가서 그들을 불렀다.

엄마,형! 여기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애인의 집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곳엔 쌩판 처음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주인이 죽었다고 알렸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내가 제일 아끼고 사랑했던 그녀는 죽었다. 오, 아냐... 너가 가면 난..어떻게... 하라고...

나는 눈물이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없어졌다.

친구들,애인,부모님,형..모두 없어졌다.

애인은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에서, 형은 바르샤바 봉기때, 어머니는 민간인 신분이였지만, 볼라에서 학살이 일어났을 당시, 다른 시민들과 죽었다. 그걸 난 듣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은 오이시비엥침, 엄마와 형은?

나는 내 옛친구를 찾아갔다.

그도 바르샤바 봉기에 있었는지 나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듣고, 실성을 할뻔했다.

나는 절규를 하였다. 땅

길을 가다가 바닥에 누워서 어머니와 형, 애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한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였지만, 이젠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땅에 쓰러진체 절규하고 있을 당시, 어떤 아가씨가 나에게 왔다.

그녀는 나를 지켜보았고, 힘을 내라는 말을 하고 갔다.

다음날, 집앞엔 하얀 장미 다발이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계속 나왔다.

그녀가 보낸것이였다.

그녀의 이름은 니콜라 코베츠키.

그녀는 나를 보고 잘생긴 노인이라 칭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5세.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였다.

우린 결혼식을 성당에서 한번, 구청에서 한번했다.

성당에서 한건, 법적 효력이 없다고 법을 제정시켰다.

나는 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나의 나이는 반백년을 바라보는 나이다.

적은 임금에 우린 굶을때가 믾았다.

그래서 불법적인 일도 하였다.

전국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살인적 물가에 빵조차 못먹었다.

우린 파업과 봉기, 시위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1956년 포즈난에서,

1966년 새천년 세례식,

1968년 바르샤바에서 행진,

1970년 그단스크,

1976년 라돔, 우르수스

1979년 바르샤바

교황은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당시 교황 파울 2세.

그는 폴란드인이였다.


                              무관한 사진


전국의 노동자들은 파업에 임하였다.

1989년, 사회주의는 패배했고, 철의 장막은 무너졌다.




우린 승리했다.


우린 자유를 위해 구걸하지 않는다,우린 직접 싸움을 택한다.

          -303 비행중대 사령관 비톨드 우르바노비치-


                

                      그제고즈 브젱치슈츄키에비치

                                   1909-2003












                          본 인물은 창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