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서대문역)


나는 한양의 남대문 근처에서 2남 1녀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정위 계급으로 한양 근처에서 복무하셨고, 어머니는 집에서 주로 수를 놓으시거나 바느질을 하셨다. 우리는 그래도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으며, 아버지는 가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하층민들과 그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조정의 무능함을 우리 앞에서 비판하곤 하셨다.


어느날부턴가, 아버지가 우리 집에 불러들이시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궁금해진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얘기를 살짝 엿들었다. 듣기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황상께서 계시는 궁궐에 군대를 배치해 황상을 겁박하고 있다며, 그때 어렸던 나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만 하셨기에 얼마 안가 엿듣기를 포기했다.


내가 7살 때, 집에 들어오셔서 신문을 펼쳐보던 아버지가 갑자기 통곡하시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위로하러 오신 부모님 앞에서 하시던 말씀이 무슨 외교권이 뺏겼단가? 그런 얘기였는데 역시 나는 무슨 얘긴지 모르고 갑작스럽게 통곡하시는 아버지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날 아버지는 "사내라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울 줄 알아야 하고, 니가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열심히 배우는 것이다" 라며 이상한 꼬부랑말과 수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에 나를 보내셨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져 9살 때는 아버지의 직장인 시위대가 해산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 역시 직장을 잃은 것이다. 한창 무기력하게 계시던 아버지는 "이렇게 나라는 뺏길 순 없지. 그렇고 말고!" 라고 하시며 집 밖으로 뛰어나가셨다. 듣기로는 무기 반납이 진행되던 아버지의 병영으로 가셨다고 했다.


1시진 정도 지나고, 뜬금없이 총소리가 드문드문하게 들리더니 그 소리는 어느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된 고함, 대포소리로 까지 바뀌었다. 우리 가족은 집에 숨어있었고 집 밖으로 황색 옷을 입은 군인아저씨들이 남대문 쪽으로 뛰어가는 걸 보았다. 아버지는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그 다음날, 다다음날이 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로부터 3년 뒤, 우리 집 밖에 무슨 종이가 나붙고 그걸 본 우리 엄마, 누나들과 그걸 보던 삿갓을 쓴 아저씨들이 하나같이 통곡했다. 듣기로는 나라를 빼앗겼다고 한다. 나도 이제 12살이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그게 무슨 의민지 알았기에, 나도 같이 통곡했다. 이때부터 나의 가슴속에서 하나의 열망이 꿈틀거렸다. 나의 손으로 나라를 되찾아 일본놈들을 몰아내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자고. 어느날부턴가 학교의 선생님이 칼을 차고 교단에 나오시고, 거리에는 일본 헌병들이 득실득실했다. 삼엄한 감시속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열정은 차츰 식어가는 듯 했다.


21살이 되어 학교를 졸업해 인력거를 끄는 일을 하던 나는 황제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황제 폐하야 딱히 내가 좋아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던 분이셨지만 그래도 탑골공원에서 열리던 추도식에 참석했다. 그때, 나보다 약간 어려보이던 학생들이 단상 위로 올라가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패자, 약자, 떠돌이, 조국을 잃어버린 자가 우리의 별명이요,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가 나라 없는 죄요 뼈저린 설움이 나라 잃은 설움이다. 제 어깨로 제 몸뚱이를 지키지 못하려니 금수로 살려는가? 나라 없는 개가 되려는가? 동포여, 거리로 나가자, 삼천리의 형제들이여, 죽은 혼들이여 모두 거리로 나가 외치려무나!"


갑자기 수백명의 학생들이 국기를 꺼내들며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 국기는 이제 다시는 볼 수도 들 수도 없을 것만 같던,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의 태극기였다. 그때, 9년 동안 식어가던 나의 꿈과 열정이 다시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와 옆의 모든 사람들이 학생들이 나눠주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숭례문 쪽으로 가던 우리는 일본 경찰들을 마딱트렸다.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체포하겠다고 외치는 서슬 퍼런 헌병 경찰들 따위 아랑곳 않고 우리는 계속 만세를 불렀다. 우리 나라에서 우리 국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데 너희가 웬 참견이더냐. 그러자 헌병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와 사람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겁먹지 않았다. 우리는 몽둥이에 맞아 피가 터지고 뼈가 얼얼하면서도 해가 질때까지 계속 만세를 부르고 흩어졌다.



(3.1 운동 당시 광화문 앞)

다음날 나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흠씬 두들겨 맞고 다행히 훈방 되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나의 조선 독립을 위한 꿈은 더더욱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소년이 아닌 어엿한 조선의 남아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을 알아봤고 김구 선생님, 서재필 선생님 같이 유명한 분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단 소식을 들은 나와 몇몇 친구들은 평범한 장사꾼으로 위장해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우리는 임시정부를 찾아갔고 그곳의 동지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조선 안에 있는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임시 정부의 밀지를 전해주고, 회신을 받아오는 교통국이라는 기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할 때마다 일본놈들의 눈을 피해 조선에 들어가느라 힘들었지만 편지를 받은 동지들이 나에게 감사인사를하고, 함께 독립을 이뤄보자는 말을 듣는 보람으로 이 일을 했다.

1년도 안되어, 우리 임시정부 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싸웠고, 결국 그에 질린 몇몇 사람들이 여길 떠났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10년 뒤인 1932년 까지 우리는 아무 일 없이 그냥 잡일이나 하고 지내곤 했다. 그곳의 여자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했다. 이런 나날을 지내며 처음엔 독립을 위한 혈기로 모인 임시정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그때,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김구 선생님이 만든 단체인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이 일왕의 생일잔치에 폭탄을 던져 일본 장군들을 여럿 죽였다고 한다! 이를 들은 중국 주석이라는 분도 신문에 우리를 지지하는 말을 했고, 뿌듯해진 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점점 심해지던 일본놈들의 감시에 한인애국단은 해체되었다. 좌절하던 나는, 김구 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희망을 되찾았다. 그 분은 나에게 앞으로 창설할 대한광복군에 지원할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고, 나는 당연히 지원했다. 중국 본토에서 미국의 SS라는 곳의 대원들의 지도를 받아 훈련에 매진했고(이때 브루스라는 장군님에게 칭찬도 들었다. 헤헷), 그 사이에 아들도 낳았다.가끔 들어오는 고국의 소식은 일본이 무슨 전쟁을 일으켜서 폭정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뿐이었다. 1945년 쯤 나는 우리 광복군이 조선의 본토를 수 개월내로 직접 탈환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며 더욱 열심히 훈련하던(사실 병사들을 내가 훈련시키던) 그때,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본토 진공 5일전 일본놈들이 갑작스럽게 항복했단다.

나는 나라를 되찾아 매우 기뻣지만 한 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우리 나라를 우리 손으로 되찾지 못했단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독립한게 어디냐는 기쁜 마음과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나는 미 군정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어머니도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누나들은 어디 정신대라는 곳에 끌려간 뒤로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게다가 미국이랑 소련이 우리를 38도 선으로 갈라 통치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것을 들은 나는, 나라를 이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심정으로 신탁통치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하지만 북쪽의 사람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면서(나중에야 이게 오보란 걸 알았다), 우리 나라는 점점 남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건 별로 없었고 UN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의결하면서 우리나라는 완전히 갈라지고 말았다. 

2년도 안되서, 김일성이라는 놈이 이끄는 소련의 괴뢰군이 남쪽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라디오에서 이승만 대통령님이 "국민 여러분, 서울은 안전하니 안심하시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걸 듣고 나는 안심이 되었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걸 알기에는 오래 걸리진 않았다. 3일 뒤 탱크를 타고 녹색 군복을 입었지만 이마에 붉은 별을 단 군대가 서울에 들어와서, 자본가들을 인민재판이라는 것으로 닥치는 대로 잡아 족치기 시작했다. 옆집에서 조그맣게 가게를 차려 장사하던 허 씨도 그놈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아버지가 이런 나라를 보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오늘따라 아버지가 보고싶어 진다.


(북한군의 장갑차)

3개월 후, 그 놈들이 갑자기 철수하더니 다시 우리의 국군이 돌아왔다. 하지만 중국의 마오쩌둥이라는 사람이 장 제스를 몰아내고 중국을 빨갱이 나라로 만들어, 그 중국이 다시 우리나라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국군은 다시 밀려나고, 이때는 나도 철수 대열에 합류에 포항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2년 정도 뒤 휴전이 체결되고, 우리는 다시 평화롭지만 전쟁 전보다 훨씬 가난해진 일상을 살아야 했다. 이미 50대가 된 나는 우체부 일을 하며 살았고, 어느새 고등학교에 간 아들은 낮에는 학교에, 밤에는 옆집 김 씨의 가게 일을 도우며 집 살림을 열심히 보탰다. 그렇게 1960년, 여느 때 처럼 4년에 1번 하는 선거를 하러 투표소에 간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투표소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3명씩 조를 짜지 않으면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나를 막았고, 아들은 어떤 사람에게 이승만, 이기붕을 찍으라며 돈 봉투를 받았단다. 뭔가 찝찝했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며칠 후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시위는 며칠 안되어 이곳 포항에서도 열렸고, 독재를 그대로 볼 수 없었던 나는 마을 사람들과 "독재정권 물러나라" 고 외쳤다. 그리고 얼마 안되, 라디오에서 이승만이 하야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환호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찾아온 줄 알았다.

1년 뒤 새벽에 잠이 안 와 라디오를 듣던 나는, 갑자기 흘러나오는 긴급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 듣자 하니 박정희라는 장군이 부패한 정부를 끌어내려 뭐 어쨌다나, 뭐 차피 2년 뒤에 민정으로 정권을 이양 한다니까 별 걱정은 안했다. 그가 취임하고 우리나라는 하루하루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 근처 바닷가에는 제철소라는 철을 만드는 곳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렸고, 우리 아들도 포항 제철이라는 곳에 입사해 제철소 공사현장에 일을 하러 나갔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1963년과 67년에 선거에 나가 연이어 당선되었고, 70년 쯤에는 우리 밑 동네인 경주에 서울-부산을 잇는 고속도로가 들어선다는 말도 들렸다. 또한 새마을 운동인가 뭔가라는 농촌 개발 사업을 해 우리 동네의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내가 뽑혔다! 나는 70대라는 나이에도 매일매일 나가 도로를 닦는 걸 돕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도록 마을 어른들을 설득했다. 우리 마을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대부분의 집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고 마을길도 대폭 넓어졌다. 이때쯤 늦게 장가 간 아들이 손자도 낳았다.


(새마을 운동기)

그러다가 몇년 뒤 대통령이 유신이라는 걸 선포하면서 서울에서는 분위기가 흉흉해졌다고 하고, 여기서도 4년에 한 번 하던 대통령 선거가 갑자기 없어졌다. 그리고 또 몇년이 흘러,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이 김재규라는 부하에게 암살 당함으로써 끝났다고 한다. 기분이 씁쓸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제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 전두환이라는 장군이 또 계엄을 선포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곳의 선출을 받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군사독제를 몰아내고 싶었지만 이미 다 늙어 90을 바라보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TV를 보니 광주에서는 좌익들의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게 손주를 돌보며 살던 1987년, 연세대라는 큰 대학교에서 시위를 하던 이한열이라는 학생이 눈에 최루탄을 맞아 실려갔다고 한다. 시위는 점점 퍼져갔고, 우리 마을에서도 군사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시위가 일어났다. 나 역시 4.19의 추억이 떠올라 시위에 참가해 힘을 보탰다. 6월 29일, TV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선거를 시행하겠다고 선언하고 우리 마을은 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마을에 하나 있는 다방은 차를 무료로 팔았고, 술집도 탁주를 한 사발씩 돌렸다. 그러나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의 수하였던 노태우라는 사람이 당선되었다. 나는 내심 또 쿠데타가 일어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별일 없었다.

1998년 내가 100세를 바라보던 때에 서울로 올라가 회사를 다니던 손자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내려왔다. 자기네 회사가 부도났단다. 난 노인이라 잘 모르지만 손자의 말로는 요즘 IMF인가 뭔가로 회사들 싹 다 부도나고 난리라고 한다. 갑자기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화 될 시절, 내 감독하에 우리 마을의 일꾼들이 마을길을 넓히고 전깃줄도 깔던 희망에 차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걸 원하는 건 아니다. 끝도 없을 것 같던 IMF는 몇년 뒤 우리나라가 돈을 다 갚았다면서 끝났다. 손자도 네이버라는 작은 회사에 다시 취업했다. 이 녀석, 기왕 취업하려면 삼성이나 롯데 같은데다 할 것이지 네이버가 뭐냐, 네이버가. 

2달 쯤 뒤에 우리나라에서 축구 대회가 열렸는데,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4강을 갔단다. 우리 마을회관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빨간 옷을 입고 TV를 보며 우리나라를 응원했고, 걸을 힘조차 떨어져가던 나도 휠체어를 타고 가 응원했다.

내가 살아온 삶을 보니 우리나라가 참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어왔고, 우리 민족에게는 힘들 때 언제든 이겨낼 수 있는 저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얼마 못 볼 것 같아 아쉽지만 우리나라의 미래가 참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