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1904년, 러시아 제국 바르샤바)

 나는 나라없는 민족이었던 폴란드인의 자손으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낮에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밤에는 폴란드어를 몰래 가르치는 학교의 교사였다. 위로는 두 누나가, 아래로는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는 폴란드어를 같이 교육하면서 100년이 지났지만 조국을 되찾으려고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러시아어와 더불어 폴란드어를 꽤 잘했으며, 폴란드어로 쓰인 책을 읽으면서 폴란드의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하지만 1913년 가을, 폴란드어를 가르치던 야학이 적발되면서 어머니는 체포되었고, 아버지는 나머지 가족을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 어머니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고, 국경을 넘어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크라코프였다. 크라쿠프는 어느정도 폴란드계의 자치를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폴란드인으로써 살아가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다시 공장에서 일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폴란드계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인으로써 잘 살아가는 것을 길게 지속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웠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던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라코프)

 전쟁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이 국경도시 중 하나였던 크라코프에 가까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뒤,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독일 제국의 포젠으로 이사했다. 포젠 지역은 독일인이 많았지만 폴란드인도 어느 정도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폴란드인으로써 사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젠으로 열차를 타고 가면서 독일군이 가는 것을 보았는데, 포젠이라면 러시아군의 손에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포젠으로 옮겨서 아버지는 탄약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생각과 다르게 포젠에서는 독일화 정책이 강하게 시행되고 있어서 가톨릭을 믿으며 폴란드식으로 사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독일어를 배웠고, 독일인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 폴란드인으로써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와 다르게 현실에 맞추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아버지는 독일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돈을 아껴가며 독일어 책을 사오기도 하셨다.



 (1920년, 폴란드 제 2공화국 포즈난)

 그렇게 독일인으로써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독일은 결국 전쟁에서 패배했고, 아버지가 다니던 탄약공장은 문을 닫아버렸다. 폴란드의 일부 부분은 바로 독립했지만, 독일은 그 부분을 바로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폴란드인들이 독일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봉기가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약간씩 빼돌린 물건으로 가족을 먹여살렸다.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 독일과의 문제는 완전히 정리되었다. 하지만 독립 직후 내전 중이던 러시아에서 적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고 들었고, 아버지는 일자리가 없었던 탓에 전쟁에 참전해 우리에게 돈을 보내주셨다. 포젠은 꽤나 서쪽에 있었던 덕에 전쟁으로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는 포젠, 이제는 포즈난이 폴란드 영토가 되면서 독일로 이주한 독일 귀족의 재산을 일부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얻은 재산으로 차를 산 다음 택시 기사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제대로 폴란드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 세워진 독일은 폴란드에게 구 영토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냥 이것을 거절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아버지도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폴란드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의 물건에 관세를 어마어마하게 매기기 시작했고, 포즈난의 모든 상점에서 공산품의 가격은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택시를 타는 승객들도 점점 적어졌고, 가족들은 점점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수학을 좀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대학에 다니길 포기하고 다른 도시로 가서 일자리를 얻어야 했다. 누나들은 포젠과 그단스크에서, 나는 바르샤바에서 공장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이 생활은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괜찮은 수준이 될 수 있었다. 바르샤바에서 나는 어머니와 같이 폴란드어 교사였던 여자를 만났고, 곧 결혼하게 되었다.

 

 (1936년, 폴란드 제 2공화국 바르샤바)


 대공황이 지구의 모두에게 닥쳐왔고, 나도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독일과 무역분쟁중이던 폴란드는 이 충격을 쉽게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나라는 아니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수입은 떨어져갔고, 겨우 구한 일자리도 순식간에 일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다니던 공장은 문을 연이어 닫았고, 정부에 고용된 교사였던 아내의 월급만으로 겨우겨우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정부가 어려웠던 탓에 월급은 점점 더 줄어만 갔다. 나는 포젠에 계속 살고 있던 아버지를 모셔왔고, 대신 택시기사일을 하면서 입에 겨우 풀칠할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의 수입만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낳은 첫 딸은 잘 먹지 못해 키가 잘 크지 못했고, 둘째인 아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묻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과의 관계는 점점 사나워져갔고, 독일은 순식간에 경제 위기를 극복한 것 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폴란드의 독재자는 굉장히 한심했다. 머지 않아 독일은 재무장을 선언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점점 늘려만 갔다. 신문에 나오기를, 폴란드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는데 동참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이 폴란드에게 굉장히 나쁜 쪽으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점점 나빠져만 가는 국제 관계가 좋은 쪽으로 풀리기만을 기대했다.



(1939년,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바르샤바)

 전쟁! 전쟁이다! 나는 도망쳐야만 했다. 독일은 폴란드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달려왔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는 뉴스를 듣고 피난 갈 준비를 멈췄던 일이 후회될 정도로 두 국가는 한심하게 대처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딸과 아내, 아버지를 태우고 차를 운전했다. 최대한 동부로 도망치면 독일로부터는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나쁜 생각이었다. 소련은 예전에 얻는데 실패한 폴란드의 영토를 노리고 순식간에 쳐들어왔고, 나는 남쪽으로 핸들을 돌려 루마니아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리비우에서 붙잡혔고, 도망치는데 실패했다. 폴란드는 한번 더 분할당했다.
 소련이 적(赤)군이던 때에 소련에 맞서 싸운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리비우에서 붙잡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군에게 끌려갔고,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 포젠과 그단스크에 남아있던 두 누나와 바르샤바로 가서 공부를 계속 하려던 동생과는 연락이 전혀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소련의 지배 아래서 숨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어렸을 때 배웠던 러시아어 덕에 다른 폴란드인처럼 큰 어려움은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웃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어디론가 끌려간 후 돌아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더욱 멍청해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아내도 폴란드어 선생이던 것을 숨기고 폴란드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척 노력했다. 집에서는 몰래 딸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쳤고, 딸에게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는 척하며 살기위해 노력했다. 이 지옥이 언제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지옥은 끝났고, 나는 지옥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1944년,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바르샤바, 봉기 진행중!)

 독일은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에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루마니아는 독일편이었고, 발트의 국가들은 소련이 합병해버렸다. 자동차를 타고 핀란드까지 가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그렇게 리비우는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나는 평소대로 리비우가 점령당한 다음날에 일어났다. 하지만 바깥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폴란드인들을 모두 다 잡아들여 어디론가 보내버리고선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딸과 아내를 유품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택시에 태워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바르샤바에는 폴란드인이 많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몰래몰래 바르샤바로 도망쳤고, 다행히 폴란드인 지하조직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르샤바의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밖으로 나갔던 폴란드인 조직원 중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잠시 봤던 바깥에는 독일군이 유대인을 짐짝처럼 싣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유대인을 도우면 즉결처형당하니 돕지 말라고도 알렸다. 이렇게 끔찍한 몇년이 지나갔다.
 지하조직은 다른 지하조직과 연계해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자기 입맛대로 처리하기 전에 바르샤바를 되찾자는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내 가족은 뒤에서 물자를 옮기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봉기가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무자비하게도 폭탄, 총알, 처형으로 보답했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알아채고 도망치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폴란드인으로써는 도망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내는 아무리 설득해도 도망칠 수 없다고 말했고, 나는 우선 딸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겠다며 딸을 데리고 도망쳤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폭격이 쏟아졌다. 나는 무조건 바르샤바에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바르샤바로부터 좀 떨어진 숲에서 쓴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아버지의 차는 수명을 다 해버렸다. 나와 딸은 사람이 없는 곳을 이리저리 뒤져가며 겨우 살아가다가 소련군에게 구조될 수 있었다.


(1945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 바르샤바)

 바르샤바로 돌아온 나와 딸은 희망을 모두 잃었다. 아내는 죽은 것이 확실했다. 모든 건물은 가루조차 남지 않았고, 그곳에 있던 한 소련 군인의 말로는 바르샤바 봉기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여했던 사람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모든 민간인들은 죽었다고도 전했다. 이런 독일군의 점령 아래에 있던 그단스크와 포젠에 있던 누나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조차 없었다. 바르샤바에서 대학을 다니던 동생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그들을 찾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단지 희망을 잃었을 뿐이었다.
 10살을 조금 넘긴 딸은 전쟁 때문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그런 딸을 학교에 보내면서 나는 바르샤바 재건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잔해를 치우고 자재를 옮겼다. 그러던 중 폴란드 정부를 구성할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는 이전 폴란드 정부와 다르게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람에게 표를 주었고,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에게 표를 주었다고 한다. 분명 노동자당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거에서 이긴 것은 노동자당이었다. 분명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그래도 나는 이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사람이 그 내용을 말하는 날이 우리가 그들을 본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 폴란드 인민공화국 바르샤바)

 나는 평생을 제대로 된 민주주의 아래에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단지 이 망할 고생을 해서 얻은 나라가 제대로 된 폴란드인의 나라가 아니였기 때문에 그것이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 불만은 딱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잡혀가던 시절은 스탈린이 죽어버린 뒤 점점 끝나갔고, 총을 들고 저항하는 사람만이 현장에서 사살당했을 뿐이었다. 나는 바르샤바가 완전히 재건된 이후에도 재건하는 동안 얻은 기술을 통해 건설현장에서 계속 적당한 봉급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었다. 딸은 자신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던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에 진학해 자신이 원하던 물리학을 전공할 수 있었다. 딸은 같이 물리학을 연구하던 사람과 결혼했다. 
 사람들을 탄압하면서 나라 꼴이 점점 말이 아니게 되어가다가 내 두번째 고향인 포즈난에서 항쟁이 일어나면서 당에서도 느낀 것이 있는지 조금 숨은 쉬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점점 나라의 경제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게 되었고, 나는 이런 당의 정책을 점차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1970년, 폴란드 인민공화국 바르샤바)

 나는 나이를 어느 정도 먹었기 때문에 더 이상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아버지처럼 (하지만 아버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소일거리 삼아 택시기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딸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예전에는 보지도 못했던 TV나 냉장고 같은 신기한 전자제품들도 집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귀여운 손자를 보는 것도 삶의 낙 중 하나였다.
 하지만 택시에 넣을 기름값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면서 살림을 꾸리기가 어려워진 것처럼 보였다. 딸은 물건값이 크게 뛰었다면서 불평했고, TV에서 나오는 뉴스에서도 계속해서 물건 값을 올리겠다고만 나왔다. 딸과 사위 모두 물리학 연구원이어서 완전히 가난한 30년대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밥상에 올라오는 것들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1980년, 폴란드 인민공화국 바르샤바)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운전을 할 만큼 나이를 적게 먹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택시기사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거나 자동차로 여행을 하곤 했다. 손자와 손녀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신기하게도 손자는 딸과 사위처럼 과학에 관심이 많아 천문학을 전공했지만, 손녀는 전혀 과학에 관심이 없어 문학을 전공했다. 자동차로 여행을 가는 횟수도 해가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는데, 나라 꼴이 점점 말이 아니게 되어갔고 석유 값은 계속해서 올랐기 때문이다. 손자와 손녀는 종종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TV로 보는 뉴스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같았기 때문에 뉴스를 집중해서 보는 일은 줄어들었다. 식료품 값을 올리겠습니다, 공산품 값을 올리겠습니다, 일에 힘써 나라를 되살립시다 등등. 하지만 굉장히 이상한 뉴스가 하나 있었는데, 공산당이 제대로 된 투표를 진행하겠다고 말하는 뉴스였다. 나는 이 뉴스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딸과 사위에게 이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손자와 손녀는 이제 우리 시위가 빛을 보았다며 기뻐했다.



(1989년, 폴란드 제 3공화국 바르샤바)

 이번엔 TV 뉴스에서 조금 많이 새로운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폴란드가 새로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느껴본 적이 많이 없었다. 20~30년대에도 쿠데타로 인해 독재정부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이 좋고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 폴란드의 새로운 탄생이 무지 기쁘다. 폴란드인을 위한 폴란드가 다시 생겼고, 이번 폴란드는 저번 폴란드와 달리 제대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폴란드 제 3공화국이 성립했다는 뉴스를 듣자 손자와 손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딸은 나에게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었고,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멍하니 있던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듣고 나서 밖으로 나가 폴란드 국기를 휘둘렀다. 나는 폴란드 국기를 휘두르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러시아 제국시절 어머니에게서 배운 폴란드어 낱말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바르샤바에서 도망치던 일도 떠올랐다. 나는 다음날 바르샤바, 포젠, 그단스크를 돌아다니며 가족들에게 이제 평화롭고 안정적인 폴란드인을 위한 폴란드가 생겨났다고 전했다. 나는 이 폴란드 만큼은 폴란드인의 폴란드로 남아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손자와 손녀만큼은 나와 딸이 겪은 아픈 일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