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대체역사로 인해 뒤바뀐 나라의 운명/이념/인물 등은 글쓴이의 견해와 상관이 없습니다.

* 이 글은 대체역사로, "만약에" 로 시작하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현실과 혼동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1870년 유럽

 먼저, 이 1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1888년으로 돌아가서 프리드리히 3세가 조금 더 오래 산다는 가정 하에 출발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후두암으로 재위 99일만에 죽었는데, 1887년에 후두암을 치료할 기회가 한 번 있었음에도 그 시기를 놓쳐 암으로 죽고 말았다. 여기서 조금 가정을 해서 프리드리히 3세가 암을 치료했지만 좀 지난 후 재발하여 죽었다는 가정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덴마크 원정에서 오스트리아 사촌들과 싸우는 것은 형제살해 행위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것과 황태자 시절에 시행하려 한 정책들을 참고해서 프리드리히 3세는 오스트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프리드리히 3세가 재위에 올라있는 기간동안 시행할 정책은 박물관 예산 증가와 같은 문화적 측면에서의 확대와 유대인 차별 금지와 같은 관용적인 정책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도 유대인 차별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이것으로 독일 제국이 패망하여 폴란드 지역 영토를 내주지 않더라도 폴란드인이 차별당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대체역사 시간대에서 프리드리히 3세가 한 가장 큰 업적은 1890년에 오스트리아와 친밀한 관계가 되기 위해 영 상태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완전히 동맹으로 만들고 오스트리아군을 독일군처럼 강력한 군대로 만들기 위한 군사협정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 협정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독일군 수준은 아니더라도 콩가루 군대에서 적어도 덩치값은 하는 군대로 변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후두암이 재발하여 1895년 죽고, 빌헬름 2세가 다음을 잇게 된다.

 이후 1914년까지의 변화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관계가 조금 더 좋고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이 조금 더 나은 처지에 처해있다는 것이 실제와 다른 점이다.

1914년 유럽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계기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같지만 이후의 진행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오스트리아군이 어느 정도 믿음직한 군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프랑스를 동시에 치기 위해 프랑스에게 선제공격을 날리는 짓은 하지 않게 되고, 대신 프랑스와의 국경인 알자스-로렌 방면에서 미친듯이 단단한 방어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게 전쟁을 날렸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게 전쟁을 날렸으며, 독일은 러시아에게 전쟁을 날렸다.
 1914년 8월 1일,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슐리펜계획이 없으므로 독일은 양쪽으로 병력을 크게 분산시킬 필요 없이 알자스-로렌에서 방어군만 둔 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방면을 방어로 일단 둔 뒤 독일군과 함께 폴란드 지방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빠른 속도로 폴란드를 점령해갔고, 러시아는 초기에 쾨니히베르크 방면의 공세와 갈리치아 방면의 공세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공세를 펼 수 없었다. 게대가 쾨니히베르크 방면의 공세는 금세 막혔고, 갈리치아 방면은 막히진 않았으나 원래 목표의 1/3정도만 진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1914년 8월 25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는 독일의 방어선을 깨기위해 알자스-로렌의 움푹한 부분을 파고 들어가려는 공세 계획을 실행한다. 하지만 이 공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양측의 큰 피해를 만든 채 실패하고, 원래 국경과 가까운 지역에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독일은 프랑스가 선제로 공격한 것이니 이탈리아의 참전을 요구했으나, 이탈리아는 참전을 원하지 않았다. 9월 14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탈리아인 다수지역을 할양받는 조건으로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 틈을 노려 독일군은 벨기에에게 군사통행권을 요구했지만, 벨기에는 거절했고, 독일군은 무시하고 프랑스를 공격하려 한다. 이 때문에 영국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일본은 아직까지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1914년 11월 15일, 오스만제국은 주문한 전함을 돈까지 다 줬음에도 넘겨줄 수 없다는 영국을 굉장히 싫어하게 되었으며, 전함과 각종 군사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독일의 말에 세바스토폴 요새를 포격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오스만제국은 이집트와 쿠웨이트 방면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영국군에게 밀려 제대로 진격할 수 없었고, 캅카스 방면으로 진격하려던 군대는 조금만 진격한 뒤 멈춰섰다. 같은 시간대에 이탈리아는 프랑스 방면으로 공세를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에서 조금 이탈리아쪽으로 후퇴한 부분에서 대치하게 된다. 벨기에를 건너 파리를 점령하려고 했던 독일의 전략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서 독일은 파리 직전에서 후퇴하고 적당한 고지대에서 대치하게 된다. 서부전선은 북해부터 지중해까지 스위스를 제외한 지역에서 참호전의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1915년 봄, 독일군은 잠수함으로 영국의 상선을 격침시키는 작전을 시행하고, 꽤 많은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이 때 죽은 사람 중 미국인이 꽤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로부터 격침 작전을 자제하라는 요구를 받고, 독일 제국은 격침 작전을 그만둘 것을 약속한다. 여기서 독일 제국은 격침 작전을 그만두게 된다.
 1915년 7~8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폴란드와 발트해 부분을 완벽하게 제압할 작전을 구상한다. 이후 8월, 독일군은 바르샤바와 빌뉴스, 리가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군은 벨라루스 지역을 점령하면서 갈리치아 지방을 완벽히 수복한다.
 1915년 10월 15일, 불가리아는 동맹국에 가담하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방면에서 방어군으로써 둔 병력과 함께 세르비아에 진격한다. 1916년이 되기 전에 세르비아는 완전히 점령당해 항복하고, 잔류 병력들은 알바니아와 그리스로 도망친다.
 1916년 2월 21일, 베르됭 전투가 시작되고 양측 군인들이 미친듯이 소모되기 시작한다.
 1916년 3월 9일, 포르투갈이 독일의 요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영국으로 군사물자로 쓰일 수 있는 물자들을 판매하자, 독일은 마지막으로 최후통첩을 보냈고, 포르투갈은 이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물자를 판매하자 동맹국은 포르투갈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 시점에서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탄자니아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점령당한 상태이다.
 1916년 5월 17일, 일본은 동맹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영일동맹을 파기한 다음 영국에게 선전포고한다. 이후 일본은 홍콩과 마카오를 점령하기 위해 노력한다.
 1916년 5월 31일, 유틀란트 해전이 시작되고 결과는 현실의 유틀란트 해전과 거의 같다. 하지만 영국측이 조금 피해를 더 입었다는 점이 다르다.
 1916년 6월 4일, 러시아 제국은 부르실로프 공세를 진행하지만 오스트리아군과 독일군이 합해서 방어하고 있던 지역인데다 이 대체역사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약하지는 않은 군대이므로 원래 목표로 잡았던 지역의 1/4정도만을 건질 수 있었다. 인명피해는 러시아측이 훨씬 많았으며, 러시아는 이후로 추가 공세를 진행할 정도의 병력을 모집하기 어려워진다.
 1916년 6월 24일, 솜 전투가 시작되고 경과는 현실과 거의 같다.
 1916년 8월 27일, 루마니아는 연합국 측에 가담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와 알바니아로 건너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던 불가리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루마니아를 점령하기 시작하고, 트란실바니아 지역으로 진격하고 있던 루마니아군은 다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루마니아의 절반 이상(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끼인 지역)은 1917년이 되기 전에 전부 점령당한다.
 1916년 9월 15일, 영국군이 솜에서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하기 시작한다. 전차를 뚫을 방법이 많지 않았던 독일군은 잠시 후퇴하기도 한다.
 1916년 11월 21일,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죽고 카를 1세가 즉위한다.
 1917년 2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가 독일 제국 내에서 나왔지만 빌헬름 2세가 이 작전을 다시 시작하면 미국이 분명 참전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독일이 전쟁에서 이기기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며 작전을 폐기한다. 이 영향으로 미국은 고립주의를 계속해서 고수하게 된다.
 1917년 3월 4일, 일본이 마침내 마카오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홍콩은 점령하지 못하고 영국의 해군의 영향으로 해상 무역에 차질이 생긴다.
 1917년 3월 8일,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독일은 열차로 레닌을 러시아로 보낸다. 이후 러시아 공화국은 여러번 공세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다. 이 시점에서 오스만제국은 터키와 그 남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 영토를 점령당하고, 서부 전선은 계속해서 고착상태에 처해있다.
 1917년 7월 3일, 그리스는 자국 영토에 들어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잔당을 처리하고 있던 불가리아군이 자국민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명목으로 동맹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후 그리스 전선은 당시의 모양 그대로 당분간 유지된다.
 1917년 11월 7일,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에는 독일과의 정전협상에 돌입한다. 실제 역사와 다르게 독일은 무조건 넓은 땅을 요구하지 않는다.
 1917년 11월 24일, 핀란드가 독립한다. 러시아에서는 적백내전이 막 시작하려고 하던 때인데다가 핀란드 내에서도 공산주의자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과 거의 동시에 핀란드 적백내전이 시작한다.
 1917년 11월 25일, 루마니아가 연합군 중 처음으로 항복한다. 루마니아에서는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의 군정이 시작된다.
 1917년 12월 8일, 러시아는 독일과의 완전한 휴전 조약을 맺고 정전 조약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1918년 2월 18일, 독일군은 러시아가 빨리 정전조약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공세를 시작했고, 3월 1일에는 키예프를 점령한다. 이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완전히 끝낸다. 실제 역사와 다르게 독일은 혼자서 전리품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다른 국가와도 어느 정도 나누었으며, 그리 많은 땅을 요구하지 않는다. 조약이 발효되자마자 점령에 필요한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 서부전선으로 옮긴다.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는 루마니아의 군정을 끝내고 루마니아와 소피아 조약을 맺는다. 불가리아는 그리스 방면으로 군대를 돌려 공세를 시작한다. 독일군의 일부는 핀란드 적백내전에서 핀란드 백군을 지원한다.
 1918년 4월 2일, 독일군은 파리를 향해서 대공세를 시작한다. 이 때 새롭게 쓰인 전술은 독일군이 종전 직전에 써서 빠른 진격 속도를 보였던 그 전술로, 충분히 러시아 방면에서의 병력이 도착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공세를 끝낼 수 있었으나 파리를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한다. 이탈리아에서는 토리노를 내줄 정도로 후퇴하게 되나 독일의 공세로 인해 프랑스가 군대를 빼자 다시 토리노를 수복하게 된다.
 1918년 5월 17일, 프랑스를 향해 이탈리아와 독일 양측이 공세를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군도 벨기에 방면에서 독일군과 같이 공세를 진행한다. 프랑스와 영국군은 페탱선을 구축해 파리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미국은 계속해서 고립주의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쟁에 참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1918년 7월 23일, 그리스를 향해 불가리아가 공세를 진행한다. 이 공세를 통해 8월 16일에는 아테네가 점령된다. 이후 9월 29일, 그리스는 항복한다.
 1918년 9월 2일, 페탱선이 최종적으로 붕괴되고 파리는 다음 날 점령된다. 이후 독일군은 빠른 속도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연합군은 패퇴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경 수준으로 이탈리아군은 겨우 진격할 수 있었다.
 1918년 10월 4일, 프랑스는 동맹국에 휴전을 요청했다. 일본은 이 시점에서 마카오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참전으로 영국군이 태평양 방면에서의 해군을 빼지 못했다는 이점이 동맹국 측에 발생했다.
 1918년 10월 30일, 프랑스는 툴루즈 임시정부에서 항복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다. 11월 1일에 포르투갈은 독일과 카사블랑카 조약을 통해 전쟁을 끝낸다.
 1918년 11월 8일, 리옹이 함락되기 직전에 프랑스는 항복을 선언한다. 이후 11월 11일에 더블린 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영국은 동맹국과 11월 15일에 정전협정을 맺는다. 영국 왕실은 캐나다로 망명간다.
 1919년 1월 4일, 룩셈부르크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된다. 7월 21일에는 프랑스 함대가 자침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19년 겨울 쯤에는 핀란드 내의 적백내전이 백군의 승리로 종료된다.


1920년 유럽, 각종 조약이 체결된 이후의 모습.



1920년 아프리카, 각종 조약이 체결된 이후의 모습.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우에는 붉은 부분이 오스트리아, 녹색 부분이 헝가리이다.)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전쟁에서 히틀러는 독가스를 마시고 죽는다. 이 때 히틀러가 쓴 일기는 <참호에서의 1000일>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괴링은 공군에 계속 복무할 수 있게 된다. 페탱은 프랑스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살릴 수 없었고, 이후 군대와 관련된 일을 모두 그만두고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쓰는 작가가 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일을 겪은 처칠은 군인 일을 포기하고 정치에 입문한다. 하버는 발트 연합 공국에서 농사를 연구하게 된다.
 이 전쟁 이후 조약을 통해 승전국은 모든 것을 얻고 패전국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 조약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식민지는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것이었지만, 승전국이 원한 부분의 식민지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 조약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피아 조약 (루마니아)
  • 루마니아는 불가리아에게 콘스탄차와 만갈리아 등을 반환하고 추가로 할양한다.
  • 루마니아는 배상금을 승전국에게 지불한다.
카사블랑카 조약 (포르투갈)
  •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를 전부 승전국에게 할양한다.
  •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일본에게 할양한다.
  • 포르투갈은 배상금을 승전국에게 지불한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러시아)
  • 러시아는 배상금을 승전국에게 지불한다.
  • 러시아는 핀란드 왕국을 독립시키고, 핀란드 왕국의 국왕은 프로이센 왕실에서 핀란드 국민의 추대를 받아 올린다.
  • 러시아는 발트 연합 공국을 독립시키고, 발트 연합 공국의 공작은 프로이센 왕실에서 발트 국민의 추대를 받아 올린다.
  •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독립시키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은 프로이센 왕실에서 리투아니아 국민의 추대를 받아 올린다.
  • 러시아는 폴란드 왕국을 독립시키고, 폴란드 왕국의 국왕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왕실에서 폴란드 국민의 추대를 받아 올린다.
  • 러시아은 우크라이나 왕국을 독립시키고, 우크라이나 왕국의 국왕은 오스트리아 왕실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의 추대를 받아 올린다.
  • 러시아는 캅카스의 일부를 오스만 제국에 할양한다.

아테네 조약 (그리스)

  • 그리스는 동쪽의 섬을 오스만 제국과 이탈리아에게 할양한다.
  • 그리스 북부의 일부는 불가리아에게 할양된다.
  • 크레타 섬은 오스만 제국에게 99년간 조차된다. (2018년까지)
  • 그리스는 이오니아 제도를 이탈리아에게 할양한다.
  • 그리스는 배상금을 승전국에게 지불한다.
베오그라드 조약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속국이 된다.
  • 마케도니아 지역 등은 불가리아에게 할양된다.
  • 두 국가는 배상금을 승전국에게 지불한다.

1차 베르사유 조약 (프랑스, 벨기에)

  • 프랑스는 알제리를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를 포기하고 승전국에게 할양한다.
  • 프랑스령 태평양 제도는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에게 나뉘어서 할양된다.
  • 두 국가는 배상금을 승전국에게 지불한다.
  • 벨기에 남부와 프랑스의 일부는 독일에게 할양된다.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중 캄보디아는 오스트리아에게, 나머지는 독일에게 할양된다.
  • 기타 프랑스의 부속도서는 승전국에게 분할되어 할양된다.
  • 벨기에의 식민지는 독일령이 된다.
브뤼셀 조약 (영국)
  • 영국은 남아프리카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를 포기하고 승전국에게 할양한다.
  • 인도는 미얀마와 인도로 나뉘어 독립한다. 미얀마는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된다.
  •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되고, 오만과 예멘은 오스만제국의 보호국이 된다.
  • 파푸아뉴기니 남부와 부속 도서는 독일에게 할양된다.
  • 태평양 섬 일부는 일본에게 할양된다.
  • 몰디브는 독일령이 된다.
  • 아일랜드 섬은 완전히 독립한다.
  • 키프로스 섬은 오스만 제국에 할양된다.
  • 몰타 섬은 이탈리아에게 할양된다.
  • 싱가포르는 독일에게 할양된다.
  • 영국은 배상금을 승전국에게 지불한다.


1925년 유럽

 이후 1921년 7월 23일,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는 혼란스러운 적군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영토 일부를 얻어낸다.
 1921년 8월 5일, 프랑스는 1차 베르사유 조약에서 실랑이가 있었던 일부 부분을 완전히 합의한 2차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1차 조약에서 무장 금지 지역과 프랑스의 분리에 대한 내용이 제대로 합의되지 않아 빨리 1차 조약을 완료하고, 프랑스를 다시 점령하겠다고 협박하여 2차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2차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차 베르사유 조약
  • 브르타뉴 공국은 독립하며, 공작은 프로이센 왕실에서 임명한다.
  • 독일/벨기에/이탈리아와의 국경에서는 프랑스는 무장할 수 없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라비아 반도 지역에서 큰 반란이 여러차례 발생하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이 상실한 영토에서는 여러 토후들이 각자의 국가를 세우며 싸우는 아라비아판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또한 오스만 제국이 얻었던 이집트 지역은 다시 독립하게 되고, 오스만 제국은 무너져 터키 공화국으로 바뀌게 된다. 비록 공화국으로 바뀌었지만 터키는 계속해서 독일의 동맹으로 남아있게 된다.
 1923년 8월 12일, 베를린에는 최대 규모의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이어 빈, 부다페스트, 로마 등지에도 좀 더 큰 규모로 혹은 새로 증권거래소가 세워진다.
 1927년 1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슬라브인들의 자치를 위해 오스트리아 연합제국으로 바뀔 준비를 한다. 하지만 카를 1세의 죽음으로 이 계획은 조금 늦춰지게 된다.
 1927년 8월 23일, 현실보다는 조금 늦게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카를 1세가 폐렴으로 죽는다. 이후 황제 자리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프란츠 요제프 2세의 이름으로 이어받는다. 어른이 되지 않은 황제를 위해 카를 1세의 부인이 잠시 섭정을 맡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전후 복구와 각종 감세 정책, 발달한 과학기술 덕에 전 세계는 호황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1929년 9월 20일, 영국 주가가 급락했고, 1929년 10월 24일, 베를린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주식의 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뮌헨의 거래소와 프랑크푸르트의 거래소는 빨리 거래를 중지시켰지만 이미 주식을 거래하던 사람 중 15명이 자살한 상태였다. 이어 1주일간 빈, 부다페스트, 로마, 파리, 소피아 등지의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했고, 이 영향으로 바다 건너의 고립주의를 유지하던 미국의 뉴욕 증권 거래소의 주가가 1929년 11월 4일 급락하면서 주가 급락사태가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 주가 급락사태는 대공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