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1909년, 프랑스 제 3공화국 마르세유)


 나는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 산 곳은 마르세유가 아니라 마르세유로부터 북서쪽으로 꽤 떨어진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마르세유에서 일이 있어서 가족 전체가 잠시 마르세유로 가 있던 사이 내가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보불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태어나셨는데, 할아버지는 보불전쟁에서 전사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나는 위로 누나와 형이 한 명씩 있는 막내였다. 우리 집은 이 지역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다고 한다. 주로 포도 농사를 지어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우리 집에서 만든 포도주는 굉장히 고품질이라고 쳐주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품질로 쳐줬다. 그렇다고 다른 농사를 짓지 않는것은 아니여서 우리 집이 먹을 음식의 대부분은 농장에서 직접 키웠다. 아버지는 형이 집안의 농장일을 계속해서 이어나갈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누나처럼 그저 하고싶은 일을 하라고만 한 기억이 난다.



(1914년, 프랑스 제 3공화국 마르세유)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유럽 전체에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태어날 때의 사고로 왼팔을 잘 쓰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지 않고 대신 군대가 먹을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받아서 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느 정도 글자를 읽고 단어를 알게 되자 가족들이 다 같이 신문을 읽을 때 불러서 같이 읽게 했다. 그때 본 신문에는 파리에 포탄이 자주 떨어져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고, 우리나라가 위험에 처했다거나 승리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청년들이 아니라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청년들은 대도시로 나가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형도 나와 나이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서 그저 학교를 다닐 뿐이었다.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신문이 나오고 마르세유에 볼일이 생겨 갈 때 아버지는 마르세유에 가고싶어하는 형과 나를 데려갔다. 마르세유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돌아온다고 했고, 나는 우리나라를 승리로 이끈 군인들이 당당하고 멋진 모습일 것이라 상상하며 그들을 맞이하러 갔다. 하지만 군인들 대부분은 초췌했고, 많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할아버지가 전쟁 때문에 군대에 간 이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전쟁은 최대한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셨다.



(1925년, 프랑스 제 3공화국 리옹)


 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자 누나와 형처럼 상급 학교에 진학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리옹에 있는 좀 더 큰 학교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신문을 읽기도 하고 이곳 저곳에서 본 소식을 정리하는 것도 좋아했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관련한 과목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가끔씩 마르세유에 가는 것을 빼고서는 대도시에서 무언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리옹에서의 삶은 새로웠지만 곧 적응할 수 있었다. 나는 좋은 성적, 특히 프랑스어와 관한 과목에서는 정말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할 수 있었고, 집으로 돌아와 좀 더 많이 배우기 위해 파리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으면서 내가 엄청 신나했다며 언론과 관련된 전공이 괜찮을 것 같다고 조언했고, 나는 그 조언을 따랐다.

 파리는 정말 다르게 보였다. 내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파리로 올라오고 얼마 동안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신기한 물건들이 상점에 있었고, 사람들도 활기차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우울해보이기 시작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에 깔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끔씩 시위를 하면서 경제를 살리라고 이야기도 했다. 사람들은 생기를 잃었고, 대학을 졸업한 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잠시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다행히 농사를 짓던 부모님과 형에게는 큰 영향이 없었고, 의학을 공부하던 누나도 큰 문제가 없었다. 잠시 쉰 뒤 파리로 돌아온 나는 몇 달 뒤 신문사 기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36년, 프랑스 제 3공화국 파리)


 나는 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독일에서 취재를 하기도 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보여준 독일의 모습은 무엇인가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거기서 듣게 된 선전장관의 연설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자신을 따르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곳에서 인터뷰한 사람 중에서는 공군 조종사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정말 그 연설에 매료되어있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독일이 머지 않아 가장 강력한 국가 반열에 들기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나는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러 스페인에 갔다가 정말이지 예쁜 스페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취재를 하면서 그 여자에게 인터뷰도 했고, 여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기사를 신문사로 보낸 후 바로 조금 긴 휴가를 내고 내전이 벌어지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지역에 사는 그 여자의 마음을 사기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내 노력은 대학생 시절과 달리 헛되지 않았고, 전쟁이 또 벌어지기 전에 나는 결혼할 수 있었다.



(1940년, 나치독일 점령 하의 파리)


 1939년은 나에게 있어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해이다. 그 해에 첫째 아들이 태어났으며, 독일이 체코를 합병한 일을 취재하기 위해 독일로 가기도 했으며, 폴란드를 침공한 일이 벌어지자 영국의 상황을 취재하러 영국에 가기도 했다. 나는 정말 이 때의 프랑스와 영국에게 실망했다. 폴란드가 침공당해서 전쟁을 선포해놓고 이 전쟁을 끝내려하지도 않은 채 단지 시간만 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시간을 질질 끈 것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루게 된다.

 나는 바로 다음해에 프랑스가 항복했다는 기사를 쓰게 되었고,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에 대해 나쁜 기사를 쓰던 내가 다니던 신문사는 문을 닫아 나는 일자리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키지는 않지만 아내와 아들을 위해, 그리고 곧 태어날 딸을 위해 독일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는 신문사에서 일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신문사에서는 나를 폴란드로 파견시켜 점령지에서는 굉장히 인도주의적인 통치가 벌어지고 있다는 선전기사를 쓰게 했다. 내가 가서 사진기를 들자 독일군은 사진기를 뺏으려 했지만 독일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는 신문사라는 표식을 보여주자 철저히 연출된 사진을 찍게 했다. 나는 이런 기자 일을 더 할 수 없었고, 1942년에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올바른 기자일을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다시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4년, 해방된 파리)


 비시 프랑스가 어느정도 유지되고 있다가 갑자기 독일이 비시 프랑스 지역까지 점령해버리고 나서는 좀 더 분위기가 삼엄해졌다. 주둔하던 독일군과 친하다면 같이 바베큐 파티도 할 수 있었던 때와 달라졌다는 말이다. 나는 프랑스 해방을 위해서 일하는 지하 단체를 알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서 기자였던 경력을 살려 알리는 글이나 소식지를 몰래 써주는 일을 맡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 생활비를 어느정도 대 주었기 때문에,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소식지를 써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일하고 밤에 소식지를 쓰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나서 파리 해방이 얼마 남지 않자 나는 다른 시민들처럼 총을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파리에 있던 누나는 의료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싸우기 시작한지 15일만에 파리는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고, 나는 다시 돌아온 원래 신문사에 재취직할 수 있었다. 부모님과 형은 무사했고, 우리 집의 농장도 무사했다. 그 후 다음 해에는 나는 종전협상이 이루어지는 곳을 취재하기도 했다.



(1950년, 프랑스 제 4공화국 파리)


 이제 딸과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시간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취재기자일은 최대한 적게 받으려 노력했다. 나는 기자들이 가져온 기사거리를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전쟁으로 부서진 도시들을 재건하면서 프랑스는 좀 더 발전한 나라가 될 수 있었고, 집에는 새롭고 신기한 물건들이 계속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1950년대에 일어난 동유럽의 굵직한 사건들은 취재를 위해 잠시 가보기도 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베일에 싸여져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가 아니면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련의 발표와 달리 체코와 헝가리에서 소련군이 사람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모습도 보았다. 헝가리에서 인터뷰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원하지도 않았음에도 공산 정부가 세워졌고, 우리는 민주 정부를 요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총알 뿐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상황을 더 잘 알리기 위해 열심히 기사를 썼고, 내 마음 속에서는 전쟁을 거부하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1960년, 프랑스 제 5공화국?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 알제)


 나는 딸과 아들이 어느정도 크자 이제 파견 기자를 다시 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주어진 업무는 알제리로 가서 취재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취재한 기사거리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첫째로, 프랑스가 알제리 사막에서 핵실험에 성공했고, 이로써 프랑스는 핵보유국이며 제대로 된 강대국 반열에 정착했다는 기사였다. 둘째로, 나는 계속해서 알제리가 프랑스의 영토이고 마르세유에서 파리만큼이나 알제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본토 취급을 하며 알제리인도 프랑스인과 거의 동일하게 대우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였다는 것이다.

 내가 편집하던 기사 중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을 막기 위해 베트남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는 직접 보지 않아서 큰 충격이 없었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일어난 일이 공식적인 발표대로 이것이 알제리의 반란군 진압이 아니라  알제리가 독립을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알제리로 와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는 나이를 좀 먹었음에도 굉장히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썼다. 나는 프랑스에 알제리인들이 학살당했고,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심각하게 좋지 않아 남겨진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알제리 혼혈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정부는 그들을 위해서 어떠한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죽게 내버려뒀다. 알제리에서 프랑스군이 철수하기 시작할 때쯤 나는 취재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딸은 나처럼 언론 관련으로 전공을 선택했고, 아들은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비틀즈처럼 음악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결정한 것을 존중했다. 나는 알제리를 취재하고 나서는 꽤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기사 편집부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딸은 졸업 후에 기자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를 여행했다.



(1968년, 프랑스 제 5공화국 파리)


 베트남 전쟁에 또 참전하겠다는 프랑스 정부에 반대하여 여러가지 이유가 겹친 나머지 프랑스 전체에서 커다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전쟁들을 보고 취재하면서 전쟁만큼은 막아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시위에 참가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하려 노력했다. 시위대가 행진을 하다 보니 취재를 온 딸과 만나기도 했고, 이 분위기와 상황에 맞춰 노래를 지어 부르는 아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유리할 때만 구호로 쓰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글도 알렸다. 자유, 평등, 박애가 진정으로 중요하다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고, 많은 나라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기자인 딸이 전해주었다.

 딸은 같은 기자 출신의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고, 아들은 음악을 계속 하다가 그냥 음반 관련 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아들에게 결혼은 언제 할것이냐고 물어봤지만 아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 나는 그것이 아들의 자유이니깐 딱히 간섭을 더 하지 않기로 했다.



(1980년, 프랑스 제 5공화국 파리)


 나는 이제 손자와 손녀를 보면서 남은 날을 즐기고 있다. 딸이 나이를 좀 먹었음에도 해외의 여러 사건들을 취재하러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손자와 손녀를 보는 일은 내가 할 일이 되었다. 딸이 이번에 취재를 가는 곳은 동아시아의 어디에 있는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냉전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철의 장막이 완전히 걷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장막이 머지 않아 걷힐것이라 예상한다. 그리고 이 장막이 걷히게 된다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서로가 원수를 지게 되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상황은 다신 일어나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행인 것은 프랑스는 더 이상 독립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일 식민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취재한 전쟁들로 봐서는 이미 충분히 전쟁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 만큼 많이 일어나고 많이 죽었음에도 더 전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국가를 다스릴 만큼의 권력을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손자와 손녀는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지만 이것을 직접 볼 필요는 없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사상은 끝까지 남아있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