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특정 이념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20세기 초 베트남의 작은 마을)

나는 베트남의 꽝 나이라는 작은 농촌에서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쌀 농사를 지으시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농부셨고,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우리를 돌보셨다. 그렇게 가난하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던 어느날, 내가 5살 때 갑자기 파란 군복을 입고 우리랑 다르게 노란 머리를 한 코가 큰 아저씨들이 마을에 들어왔다. 그들은 갑자기 마을 주민들을 공터로 불러모아, 옆 집 응우옌 아저씨를 줄로 묶어서 끌고 오더니 아저씨의 머리를 발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응우옌 아저씨의 부인인 도이 아줌마가 울부짖으며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지만, 그 군인들은 도이 아줌마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우리 어머니가 그들 몰래 내 눈을 가려 더 이상은 못봤지만, 탕 하는 큰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지만 어머니는 내 눈을 계속 가린 체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의 일은 나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그 뒤로 응우옌 아저씨네는 다시 볼 수 없었고, 아버지는 그 분들이 이사갔다고 했지만 나중에야 그 프랑스 군들이 아저씨와 아줌마를 쏴 죽인 걸 알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그 파란 군복을 입은 놈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내가 7살이 된 1934년 아버지는 나를 마을에 있는 조그만 학교에 보내었다. 


그 학교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 베트남은 서양의 프랑스라는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우리 베트남인들을 베트남을 다시 되찾기 위해 온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학교에서 나는 그것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산수나 읽고 쓰기를 배웠고, 덕분에 한동안 우리 마을에서 얼마 없는 글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12살이 되었을 때 내가 5살 때 본 그 파란 옷의 군인들이 학교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학교 건물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잡히는 사람마다 총검과 몽둥이를 들고 두들겨 팼다. 나는 다행히 달리기가 빨라 도망쳐 나왔지만, 띠엔 중 선생님과 내 친구들 대부분이 어디론가 잡혀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던 아기 때의 내가 아니였다. 그 군인들은 프랑스 군이고, 우리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배우는 걸 방해하려고 우리 학교를 부순 거다. 프랑스 군들에게 복수하겠단 나의 마음가짐은 더더욱 강해졌다. 



(1940년 베트남을 침공한 일본군)


영원할 것 같았던 프랑스인들의 지배가 마침내 끝이 났다! 내가 14살 때 프랑스인들이 일본에 밀려 베트남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그동안 프랑스 군들에게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던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 만세를 불렀다. 듣기로는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함께 서양의 침략자들에게 대항하려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난 아직 14살이라 그들을 도울 수는 없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들에게 커다란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얼마 안가 산산조각났다. 몇 달 뒤 일본군들은 우리 마을에 들어가 반 럼 아저씨 집에 쳐들어가서 그 집의 쌀과 다른 음식들을 훔치면서 아저씨를 두들겨 팼다. 그들이 말하던 대동아 공영권의 실체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이 아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식량과 땅을 뺏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이후로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물론 베트남을 되찾고 프랑스인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오직 베트남만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베트남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마침 내 친구가 호 치민이라는 베트남 사람이 베트민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면서, 자기도 가입하려는데 같이 싸우자고 나에게 말해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

우리는 근처의 동굴로 가서 그곳에 있던 어떤 사람에게 베트민에 가입하러 왔다고 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모자를 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총을 닦고 있었다. 프랑스 군들 처럼 질서정연하게 군복을 입고 대포를 쏴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베트남인들과 베트남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는것 자체가 설랬다. 훈련은 많이 고단했지만, 베트남의 독립을 위한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던 어느날, 일본놈들이 미국에 밀려 항복했고 베트남에서 떠난다고 한다! 게다가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지금 하노이에는 외국의 군대가 없으니 우리 부대가 진입해서 하노이를 접수하라고 한다. 하노이로 가는 길은 멀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설랬다. 내가 드디어 베트남을 구한다. 프랑스와 일본놈들에게 복수를 했다. 하노이에 입성하자 모든 시민들이 나와 금성홍기를 흔들며 우릴 환영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내 나이 20살 때 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일본이 가니 프랑스 놈들이 다시 돌아와 베트남 남쪽에서 괴뢰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들은 베트남 북쪽에도 들어왔고, 매일매일이 프랑스와의 전투의 연속이었다. 옆의 동료들이 프랑스의 압도적인 화력에 죽어나갈 때마다 적개심은 더더욱 커졌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프랑스 군들에게 학살당하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는 총을 들고 그들과 싸울 수 나마 있다. 우리는 프랑스인들이 행군할 때를 노려 급습을 하거나 야간에 그들을 공격했고, 이 전술은 꽤나 효과가 좋았다. 그러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프랑스가 북쪽의 디엔비엔푸라는 계곡에 공수부대를 투하하고, 기지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곳을 냅둔다면 전세는 크게 불리해질 것이다. 디엔비엔푸의 기지를 탈환하기 위해, 우리 부대는 도로까지 깔아가면서 정글을 해치며 힘들게 행군했다.

마침내 디엔비엔푸 근처의 야산에 도착해서 그 기지를 보았을 때, 프랑스인들의 대포와 전투기는 우리와 비할 바가 못되게 강하다는 걸 알고 약간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여긴 베트남의 정글이다. 프랑스놈들이 잘 나봐야 평생 정글 근처에서 살아온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전투는 힘들었다. 때로는 프랑스인들의 포에 맞아 주변의 부대원들이 나 빼고 전멸하기도 했고, 지휘관의 실수로 무리한 돌격을 하다 또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2달이 지나고 우리는 비행장을 점령하고 그곳의 프랑스 놈들을 포로로 잡았다. 듣기로는 나중에 그들은 하루에 미숫가루 한 줌만을 먹어가며 수용소까지 행군했고, 그 과정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꼬시다.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후 축하하는 베트민군)

드디어 외세가 베트남에서 물러갔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지배를 완전히 포기했고, 우리나라는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제가 생겼다. 베트남 남쪽에서 자본주의 괴뢰정부가 들어서 베트남은 분단되어야 했다. 베트민은 해체하고 나중에 비엣콩으로 이름을 바꿔, 자본주의 세력과의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우리는 당연히 거기 합류했다. 나는 이제 30대 중반으로 결혼도 못 했지만, 조국을 완전히 되찾을 때 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쁜 소식이 또 들려왔다. 침략의 야욕에 찬 미국이 통킹 만에서 지들 전함이 포격 받은 걸 핑계로 하노이를 폭격했다고 한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내 부대는 나의 고향 꽝 나이 지방을 공격했다. 그곳에서는 프랑스나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초록색 줄무늬의 군복을 갖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군대가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우리는 저들이 10배가 넘는다는 자신감으로 그들을 공격했지만, 그들은 작은 기지에 틀어박혀 단단히 방어했고, 우리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다. 내게 베트민에 지원하자고 한 친구도 이 전투에서 죽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꼭 침략자들에게 맞서 베트남을 되찾을 것이다.

미국은 프랑스와는 비교도 안되게 강했다. 한 번 전투기가 쓸고 지나가면 많은 부대원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맞서 싸우고, 게릴라전을 하며 끈질기게 미군을 괴롭혔다. 결국 미국은 1973년에 자기들 나라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압력으로 철수했다. 우리가 이겼다. 그 세계 최강이라던 미국을 우리 베트남이 몰아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군대도 더 보이지 않았다. 미군도 없으니 이제 남은 건 오합지졸 남베트남 괴뢰들 뿐. 우리는 1달도 안되어 그들에게 사이공을 빼앗았다. 마침내 베트남이 외세의 간섭 없이 온전하게 통일된 것이다.


(1973년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월맹의 탱크)

조국을 되찾던 날, 나는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내 인생 40년 동안 거의 평생을 마음에 품었던 숙원이 드디어 풀린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니 그곳은 쑥대밭이 되고 우리 집도 좀 무너졌지만 어머니는 다행히 살아계셨다. 여동생도 무사하고, 남동생과 형은 하노이에서 당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손을 붙잡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응우옌 아저씨, 띠엔 중 선생님을 생각하며 또 울었다. 그 분들이 하늘에서 보고 계시다면 매우 기뻐하실거다. 그 뒤 우리 베트남군은 옆 나라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가 인민들을 학살한다는 말을 듣고 캄보디아의 인민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행군했다. 나는 아쉽게도 나이가 많아 같이 가지 못했다. 우리 군대는 프놈펜을 점령하고, 크메르 루주를 정글로 몰아냈다고 한다.

이후로 중국도 우리를 노리고 침략해왔지만, 우리는 또 다시 이겨냈다. 내가 82살이 되던 해, 당은 우리 나라를 개방해 인민들의 생활 개선과 경제 성장을 위해 더 노력하기로 했고 곧 우리 마을에도 전기가 깔리고 외국의 문물들이 들어왔다. 나는 발전되어가는 베트남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며 계속 농사를 지어왔다. 중간에 TV로 우리나라가 이웃한 나라들과 아세안이라는 동맹을 만들었다는 말도 들었다. 이제 몇 분 뒤면 2000년이 되어 새로운 100년이 시작된다. 나와 내 친구들과 모든 베트남인들이 힘들게 노력해 만든, 베트남인들의 진정한 베트남의 앞으로가 더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