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왕국군)

나는 1921년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크로아티아(이때는 유고슬라비아왕국 소속이었다)의 스플리트 근처에 있는 아르자노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10년에 19살 때 군인으로 임관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그곳에서 한 쪽 팔을 잃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나랑 형을 낳으셨다. 어머니는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로, 본인 말로는 자기가 이 마을에서 한창 때 가장 예뻤다고 하시지만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다. 하여튼 아버지는 그 후 전역해 지금은 작은 빵집을 차렸으며, 가끔 어머니와 삼촌이 가서 돕곤 하신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은 평탄하게 지나갔고, 나는 학교를 다니며 주변의 애들이랑 친하게 지냈다. 심심할 때는 가끔 스플리트로 놀러나가 항구에서 부모님 몰래 술도 사먹곤 했다.

어느날부턴가 내 고향 근처에 파시즘이라는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친구인 밀로비치도 파시즘을 지지하는 단체에 가입했다. 그는 나한테도 같이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자는 권유를 했지만, 정치에 딱히 관심이 없던 나는 그냥 거절했다. 신문을 보니 나치라는 세력이 장악한 독일이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는 것 같다. 독일은 어느새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하고, 폴란드까지 침공해서 소련과 나눠먹었다. 이때까지만해도 나는 이런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진 않았다. 어쨋건 우리나라가 침략당한건 아니니까.

(2차대전 당시 암스테르담)

1940년 20살이 된 나는, 스플리트의 한 신문사에 기자로써 취직했다. 서유럽에서 벌어지는 독일과 다른 나라의 전쟁에 사람들이 관심이 많은 모양인지, 우리 편집장은 나한테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그곳의 상황을 취제하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외국까지 출장가야 되는게 X같긴 하지만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냐 라는 생각으로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현지 협력자의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는데, 길 밖에서 어떤 사람이 "독일은 네덜란드에서 물러가라!" 라고 외쳤다. 몇 초도 안되서, 회색 옷을 입은 군인들이 그를 체포하려는지 그쪽으로 뛰어갔다. 갑자기, 그 군인들은 사격자세를 취하고 그 남자에게 총을 탕 탕 이렇게 두 발을 쐈고 그 남자는 머리와 어깻죽지에서 피를 뿌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본 나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는데, 건너편 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본 그들은 가지고있던 경기관총으로 그 사람을 쏴 죽이고 그 집으로 뛰어들어가 사격으로 그 집 가족들을 싹쓸이해 죽였다. 그 중 한 명이 집 밖으로 뛰어나오지만, 얼마 못가 군인들에게 잡히고, 그 사람은 개머리판으로 온 몸에 매질을 당하다가 결국 머리가 터져 죽었다. 

급하게 커튼을 닫고 얼굴이 창백해진 체 떨고 있는데, 아랫층에서 협력자가 올라오더니 "저 녀석들 또 저러는군, 이곳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 너무 놀라지는 마시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내 충격은 정점을 찍었다. 여기의 독일 군인들이 저딴 짓거리를 흔하게 벌인다고? 저 놈들이 내 고향까지 손을 뻗치려 한다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은 충격에 제대로 취제를 할 수 없었다. 아니, 이미 특종을 건졌으니 취제를 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 간신히 충격에서 회복하고 군인들 몰래 취제를 나섰는데, 거리에서는 독일인들이 한다는 '인종청소'에 관한 소문들을 들었다. 독일인들은 유태인과 슬라브 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종자들' 로 규정하고, 점령지에 있는 그 민족들을 싹 다 살해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스플리트로 간신히 돌아와서 암스테르담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대한 기사를 썼다. 사람들은 내 기사를 읽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반신반의였다. 특히 평소에 파시즘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거기에 동조하기까지 했다. 

1년 후, 독일은 우리 유고슬라비아까지 마수를 뻗쳤다. 군대는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모조리 전멸하거나 항복하고, 며칠 만에 수도인 베오그라드까지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스플리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은 그들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워, 그들이 암스테르담에서 했던 방식대로 우리를 통치했다. 매일 총소리가 났고, 먹을 식량과 물은 점점 부족해져갔다. 나도 거의 집에만 갇혀 언제 수용소로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파르티잔이라는 조직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듣기로는 그들은 이 근처 지방에서 독일과 나치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그들과 싸움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나는 스플리트를 야밤에 탈출해, 파르티잔들이 본거지를 두고 있다는 인근 야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가입했다.
독일은 계속 우리를 토벌하려고 했지만, 그럴 때면 우리는 주변의 민가나 풀숲 같은데 숨어 추격을 피하곤 했다. 가끔은 독일군 몰래 스플리트 시내에 있는 파시스트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만난 주민들의 말로는 스플리트에서도 매일 몇십명씩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고 한다. 특히 우스타샤라는 크로아티아인 파시스트들이 독일 놈들보다 훨씬 심하게 학살한다고 한다. 그런 걸 들을 때마다 근처의 내 고향 아르자노의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국기)

드디어 독일이 항복했다! 내가 사는 곳 스플리트도 해방됐고, 파르티잔의 지도자인 티토가 무능한 왕족들을 몰아내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새웠다. 나 역시 파르티잔의 동료들과 헤어져 간만에 아르자노에 돌아왔고, 우리 집이 파괴되어있는걸 보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우스타샤들에게 끌려갔다고 하고, 형은 그동안 주변의 야산에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많이 슬펐지만 한 편으로는 오랜만에 내 고향에 돌아와 한참 울었다. 오랜만에 직장에 출근하니 전쟁 전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들 몇 명이 없어졌다. 나랑 어느 여기자 한 명, 편집장님 밖에 출근한 사람이 없었다. 나도 파르티잔으로써 싸웠지만, 무슨 이유든 앞으로 전쟁 따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유고슬라비아는 티토 장군님의 훌륭한 통치 아래 점점 전쟁의 상흔을 회복해갔다. 주변 나라들이 거의 소련의 영향으로 사실상 위성 국가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유고슬라비아만 좋은 외교로 독립국이 되고, 유고슬라비아 내의 민족들을 통합한다던 소문도 들려왔다. 사실 안 그래도 우리 마을만 해도 세르비아계인 나와 크로아티아계인 밀라치, 보스니아계인 두반이 어릴 때 부터 놀던 친구사이라 안 그래도 잘 지낼 것 같긴 하다.
나는 그때 나와 같이 살아남은 동료 여기자와 결혼해 잘 살고 있다. 우리 마을은 점점 더 발전되가기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고, 마을과 스플리트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인 작은 자갈길도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76년 쯤에는 손주도 보았다. 어머니는 78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마을 주민 모두가 함께 슬퍼해주었다.

펑온하던 일상은 1980년 티토 장군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슬슬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 대통령이 된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들한테 권력을 몰아주기 시작했고, 다른 민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나는 세르비아계지만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인 동네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안주거리로 신나게 밀로셰비치를 씹어댔다. 물가 또한 나날이 오르면서, 1주전 500디나르였던 쌀 1포대가 오늘 550 디나르로 올랐다. 아들은 직장을 잃고 막노동을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간다고 한다.
1990년이 되자 혼란은 더 심해져,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폴란드 같은 나라들이 자유화되면서 우리나라도 민족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크로아티아인은 크로아티아인끼리, 보스니아인은 보스니아인끼리 살자는 말이 나왔다. 크로아티아계가 많은 우리 마을에서도 크로아티아를 독립시켜달라는 내용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해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이 득세한 이후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당에서 크로아티아 지방에 군대를 파견했다.

(유고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의 T-34전차)

얼마 안 되어, 스플리트에 세르비아계로 구성된 민병대가 들어오고 그들이 크로아티아계를 학살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소문으로 인해 나는 크로아티아계였던 밀라치네 가족들과 서먹해졌고, 우리 마을에도 언제 민병대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신문에는 크로아티아 독립군이 연패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세르비아계지만, 그들이 왠지 불쌍했다.
며칠 안되어 우리 마을에도 세르비아 민병대가 들어왔다. 그들은 집집마다 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그곳에 크로아티아계나 보스니아계가 살고 있다면 그들을 끌어내어 한 군데 모아 총살한 다음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기자 시절에 암스테르담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떠오른 나는 그저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떨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가 우리집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크로아티아계인 밀라치의 손자 라키티치다. 그는 살려달라며 내게 애원했고, 나는 문을 열어주고 그를 우리 집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겼다.

몇 분 뒤에 이번엔 차분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보니, 나와 같은 세르비아 계인 타디치의 손자 밀로박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는 민병대의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
"할아버지, 혹시 라키티치네 새끼들 못 봤어요?"
"못봤지. 근데 저번 달만 해도 잘 놀던 친구를 왜 새끼라고 부르나?"
"그 놈은 크로아티아계에요. 그런 놈들은 이 나라에서 사라져야 해요! 잠깐 수색 좀 할게요"

그는 나를 밀치고 집 안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장롱 쪽으로 간다. 내 심장이 아주 빨리 뛰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계를 숨겨주다 들킨 사람들의 운명을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장롱 문을 열자, 내가 라키티치 위에 덮어 놓은 옷가지가 보인다. 저걸 밀로박이 들추면, 나랑 라키티치 둘 다 끝장이다.

다행히 밀로박은 다시 장롱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내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혹시 크로아티아계 애들 보면 우리한테 말해주세요."
"알겠으니까 내 집에서 얼른 나가게."

밀로박은 우리 집에서 나갔다. 라키티치도 장롱에서 나왔지만, 지금 나가면 민병대에 잡힐게 확실해 당분간 우리집에서 살기로 했다. 민병대가 우리 마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 이후로도, 가끔 폭격이 떨어졌다. 비행기 소리가 쐐애액 하고 들리면 잠시 후 쿵 소리와 함께 어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때 마다 라키티치와 나는 엎드려 벌벌 떨었다.

(현재 발칸 반도 어느 마을의 다리)

끝도 없을 것만 같던 전쟁은 5년 후 끝났다. 결국 크로아티아는 독립했고, 나는 간만에 집 밖으로 나와 마을을 둘러봤다, 우리 마을의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던 다리는 폭격에 끊어졌다. 라키티치네 가족들이 살던 집 문도 무수한 총알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을 주민 상당수가 다른 곳으로 피난 갔는데, 그들의 집은 십중팔구 약탈된 흔적이 있거나 아니면 폭격에 집이 무너진 경우도 있었다. 아름답던 우리 마을이 이렇게 무너진 것에 나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로 오랜만에 큰 슬픔을 느꼈다. 전쟁을 하면, 결국 가장 큰 손해를 입는건 우리같은 평범한 민간인들인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 마을은 어느 정도 복구가 진행되 지금은 스플리트로 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숙소나 기착지로 많이 사용되는 중이다. 우리 가족은 외국인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내 집에 차렸다. 라키티치도 동업자로써 함께했다. 전쟁의 상흔이 가장 크게 남아있는 끊어진 마을의 다리는 보존되어,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상당히 장사가 잘 되어,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심지어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코리아라는 나라와 재펜이라는 곳에서도 손님이 가끔 찾아온다. 그들은 나에게 가끔 전쟁 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곤 했고, 나는 친절히 답해주며, 자네들의 나라에서도 전쟁이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준다. 특히 요즘 부쩍 코리아 손님들이 많아진 것 같다. 내가 물어보니까 자기네들 TV에 크로아티아가 관광지로 나왔데나... . 요즘은 아직 복구가 되지 않은 어릴 때의 친구, 두반네 집을 복구하며 새로 못질과 페인트 칠을 하는 중이다. 가끔 끊어진 다리를 보러가는 외국인들이 내게 인사하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답해주곤 한다.

No war! No war!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