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인의 시각으로 본 20세기 시리즈를 보고 만든 것입니다.
*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나는 쟝싱궈(蔣興國),1931년 쟝쑤성의 푸커우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내가 5살이 된 직후, 국민혁명군 군관이던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뀌어 충칭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사오고 1년쯤 후였나, 어느 날 할아버지도 충칭에 와서 함께 살게 되었지만 할아버지의 안색은 어두웠고, 며칠 후 부모님은 오히려 오열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비장한 목소리로 할머니와 고모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하셨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고모는 나의 고향 푸커우에서 강 건너면 바로 있는 대도시에서 여학교를 다녔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런 고모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강 건너의 그 대도시에 살았는데, 르번궤이쯔(日本鬼子)들이 그 대도시로 밀고 들어간 후, 그 도시는 지옥도가 펼쳐졌고, 그 뒤로 할머니와 고모의 소식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할아버지는 궤이쯔들이 들어오기 직전 아버지 친구분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보러 충칭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충칭 대공습>
붉은 색 동그라미를 그린 비행기가 날아와 검은 돌을 던지더니 곳곳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겁에 질려 집으로 뛰어 돌아가는데, 작은누나가 내 손을 잡고, 어느 굴 속으로 뛰어들어갔고, 가족들 또한 그 곳에 와 있었다. 한참 후 나와보니 곳곳에는 검게 그을린 사람들이 누워 있었고, 우리가 살던 집은 불에 타 있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른 굴은 무너지거나 연기가 들어와서 많이들 죽어나갔다는 소문도 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불벼락과 굴 속으로의 피난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동네는 진정되었다. 큰 누나가 연합대학이라는 곳에 진학하고 얼마 후,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 본 푸커우는 폐허였고 할머니와 고모의 소식이 끊긴 강 건너 동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제는 전쟁도 끝나고, 마음껏 놀고 학교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기대는 얼마 안 가서 깨졌지만...
푸커우로 돌아오고 1년쯤 후, 아버지는 빨갱이들을 소탕하러 북쪽으로 올라간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소탕이 파죽지세로 순조롭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빨갱이들이 밀고 내려오기 시작한다는 소문과 함께, 아버지의 소식은 끊기고 말았다. 베이핑이 함락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얼마 후, 가족들은 상하이로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빨갱이들이 고향 푸커우까지 내려와 수도 함락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경찰관으로 갓 임관해 있던 매형은 사직서를 냈다는 말과 함께 큰누나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홍콩으로 건너갔고,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신문 보도는, 한참 전부터 대통령 각하의 아들이라는 분이 상하이에 내려와서 경제 개혁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지만 곳곳에 파산하는 사람들과 중국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혼란은 더해져 갔다. 우리 가족도, 이미 가세가 기울어져 있었고, 다시 도시의 외곽 어느 마을로 밀려가서 그 곳 촌장님의 배려로 허름한 집이라도 얻고, 물을 배달하며 살게 되었다.


<1949년, 공산당 홍군에 장악된 상하이>
얼마 후에는, 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는, 연일 반우파 투쟁이라며 부잣집 도련님들과 국민당 반동분자들을 타도한다고 했지만 우리 일가는 상하이에 내려올 무렵, 이미 몰락한 상태로 가족사에 대해서는 숨겨왔고, 또, 작은 누나가 신중국 건국 후 부녀련에서 일한 덕분에 무사히 넘어 갈 수 있었다. 나중에 듣게 된 사실인데, 작은누나는 상하이 살던 시절 공장에 다니면서 그 곳의 지하 조직에 몸을 담았는데, 알고 보니 공산당 조직이었고, 덕분에 신중국 건국 후 발탁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듬해 여름, 차오셴 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작은 누나는 강연회로 더욱 바빠졌고, 연일 트럭을 타고 다니며 확성기로 "미제가 차오셴반도를 발판으로 우리 인민공화국을 치려 하고 단동 시는 이미 미제 비행기의 세균전에 피폭되고 있으니 차오셴을 도와 미국에 항거해야 한다" 는 연설을 했다. 이제 신중국이 세워지고 우리 집안도 겨우 안정되는 중인데 미제의 침략전쟁...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고 난 지체없이 인근 창닝의 해방군에 자원하여 차오셴에 보내 줄 것을 청했다. 그런데, 그 곳의 부대장 동지와 우리 촌장님이 "우리 촌에는 청년 인구가 부족하다. 전방에서 직접 맞서 싸우지 않아도 후방에서 우리 마을의 건설을 지원하는 것 또한 인민공화국을 위한 혁명 활동이다" 라며 만류해서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듬해,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는 해방군복 차림으로 나타났고, 촌장님은 물론, 평소 목에 힘을 주고 다니며 촌장님과 작은 누나를 수시로 갈구던 당위서기도 쩔쩔매며 굽신굽신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요심전역 시점에 전향하여, 하이난까지 해방시키고, 그 공으로 이미 해방군 정치국원이 되어 있다고 한다. 얼마 후, 당 간부들과 촌장님의 환송을 받으며 우리는 그 이름도 베이징으로 바뀌어 있는 신중국의 새 수도, 옛날의 베이핑으로 향했다. 나는 그 곳에서 인민대학에 진학하여 정치사상을 전공했다. 신중국은 순조롭게 회복하며 동아병부 멸칭을 벗어나는 중이었고, 나는 1957년 홍챠오 촌에 살던 시절 옆마을에 물 배달을 나가며 정을 통했던 옆 동네 간호사 누나를 베이징으로 불러 결혼해서 1남 2녀를 두었고, 우리 집안도 예전의 가세를 회복했다. 동생이 소련 유학을 준비하다 중소결렬로 무산되고, 중소 국경분쟁 당시 흑룡강성에 혁명전사들 독려하러 나가있던 아버지가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흉탄에 명을 달리하시고 어머니도 얼마 후 시름시름 앓다 아버지를 따라간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대약진 운동이 농촌에서는 실패했고, 어느 시골마을은 굶주림으로 전멸했다는 풍문도 돌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인민일보는 연일 주석 동지의 교시대로 英帝를 추월하고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콧대를 납작케 하며 대만 섬도 해방시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자화자찬 중이었고, 베이징의 당 연회에서는 소련과 유고 등의 요리도 뷔페식으로 양껏 먹을 수 있었으니. 나 자신도 1965년 즈음 우한 시의 당교에 주임 교수로 발령받았다.


<문화대혁명>
그러다가 1967년, 기어이 새로운 풍파가 닥쳐 오고 말았다. 작년부터 베이징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하고, 직전 발령지인 제남에 두고 온 가족들도 소식이 끊겨 노심초사하던 중, 여기 우한에서도 인근 학교 중고등학생들이 녹색 인민복 차림으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나도 곧 그들에게 끌려나와 두들겨 맞고 며칠간 창고에 갇혀 굶어 지냈다. 얼마 후 비투회를 끌려 나가니 당교 동료들과 여러 공직에 종사하던 지인들이 먼저 자아비판 중이다. 뒷차례인 나는, 다행히도 앞차례 동료들과 지인들의 비판 장면을 보며 대강 분위기를 파악했고, 고분고분하게 반동 학술 권위자로서 반성한다고 자아비판했다. 솔직히 비굴하지만 살아남아 가족과 재회하려면 어쩔 수 없다. 맨 처음에는 쟝졔스 아들놈과 내 이름이 비슷하다며 공격하던 학생들도 내가 순순히 인정하고 자아 비판하자 다소 누그러지는 눈치다. 머리카락 좀 깎이고 종이모자 뒤집어쓰고 죄명판으로 몸통을 둘러싼 채 가두 행진에 좀 끌려다니고 쟝홍거(蒋红革)로 개명당하고 나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귀가하며 보니 업무상 많이 다니던 빈관은 곳곳이 파괴되어 있는 듯 하다. 들어보건대, 베이징 중앙에서 파견된 간부들과 군 간부들도 갇혀서 곤욕 좀 치른 모양이다. 말세다. 얼마나 힘들게 건설된 신중국인데, 하지만 주석 동지의 교시를 받들기 위해 일어난 애들이라니 깊은 뜻이 있겠거니 싶다. 곧, 하방 명령이 내려와서 이창으로 이동했다. 1970년 쯤 되어 분위기가 진정되어, 비로소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고, 이창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제남에 남아 있는 동안 인민병원에 근무하던 아내는 사내 정치에서 밀려 인근 타이안 시의 한직으로 밀렸는데, 얼마 후 문화혁명이 터진 후에도 그 덕분으로 크게 털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들 다소 수척해져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다행이다. 작은 누나와 동생은 여전히 소식을 알 수 없었고, 동료인 춘 주임은 비투회 후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장강대교에서 몸을 던졌는데, 그나마 살아서 함께 있는 게 어디냐. 나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아내는 진료소에서 부주임에 올라있던 1976년. 주더 원수와 저우 총리가 서거하고 가을 쯤에는 주석 동지도 서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새 후계자 화 동지는 난생 처음 듣는 인물이다. 이제 인민공화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이 미친 상황이 곧 끝날 거라는 기대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