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동지는 생각보다 영리했다. 쟝칭을 비롯한 4인방은 일망타진되어 국정농단에 대해 준엄한 법치의 심판을 받았고 모든 것이 점차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고, 우리 가족도 베이징으로 올라와 나는 사대부중에서 소선대(小先队)를 총괄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고, 아내는 중의대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큰 딸은 뒤늦게 하얼빈의 공업대학에 진학하여 공정사가 되었고, 이어서 아들은 북경전매대학, 막내 딸은 북경2외대로 진학했다. 다행히 작은 누나는 1979년, 동생도 1981년에 복권되어 재회할 수 있었다. 덩 동지가 화 동지의 뒤를 이은 후, 사회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미국과도 수교했고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 칭다오 항에 들어와 류화칭 원수와 미군 수뇌들이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1983년에는, 동생이 탄 민항기가 반국가 분자들에 납치되어 난챠오셴 한청으로 갔다 왔는데, 귀국 후에는, 난차오셴 당국이 예상과 달리 잘 대해 주었고, 그 곳 인민들이 의외로 잘 산다며 한동안 난차오셴 칭찬을 했다. 나 자신도, 난챠오셴 당국이 범죄자들을 제대로 벌하지 않고 대만의 쟝졔스 잔당들에 넘겼던 걸 제외하면 만족했다. 불과 30년 전, 항미원조 전쟁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고, 작은누나가 미국과 난차오셴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며 돌아다녔던 것을 상기해보니 흥미로웠다. 국운도 상승하여 경제는 상승 가도를 달렸고 영국으로 빼앗긴 홍콩도 반환이 확정되었다. 해협 너머 으르렁거리던 동포들과도 통일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 뤄청에서 열린 올림픽에 첫 출전한 우리 선수들은, 여자 배구가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루어 많은 감명도 받았다. 물론 긍정적인 변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사상 무장이 허술해져 있다. 요즘 공직 관료들과 해방군 전사들도 내가 젊었을 시절과 달리 본분을 잊고 뒷돈과 함께 외박할 어린 여자애들을 밝힌다. 예전 같으면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며 수줍게 가두선전을 할 소녀들은 만두 한 접시 값의 푼돈에 눈이 멀어 점점 늘어나는 자본가들과 외국인들에 순결을 팔고, 공무원들과 군관들 첩으로 들어갈 기회나 노린다. 덩 주석도 심각하게 여겼는지 엄타 운동을 벌였지만, 잡혀서 광장에서 머리에 총맞고 죽어나가는 건 힘없는 노백성들이고, 일벌백계해 마땅한 당 간부들과 공직 관료들은 공안국에 금일봉 내려주고 국장과 차 마시며 담소나 나누다가 유유히 빠져나온다. 그마저도 얼마 안 되어 흐지부지되고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혼란해 보인다. 그리고,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1989년 초여름, 기어이 어린 애들이 폭동을 획책했다. 그들이 광장을 점령하며, 오래간만에 소련 영수를 불러 화해하려던 덩 동지는 체면을 구겼다. 여지껏 인자하던 덩 동지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지, 계엄을 내렸다. 우리 집은 광장에서 제법 떨어져 있고, 대학가와는 더더욱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우리의 신변 보호를 위해 경비병이 왔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군이 투입되었다. 도시 곳곳은 탱크의 궤도 소리와 총격, 포격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로 덮였다. 우리 동네에도 총성이 울려 우리 집에서 머물던 경비대장과 함께 내다보니 군인들은 옆 동네 외국인 거주단지를 향해서도 총질 중이다. 계엄으로 모든 직장은 휴업령이 내려 있고 무섭기도 해서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다가, 곧 전차 굉음과 비명소리가 들리니 경비대장이 상황을 본다며 베란다로 기어가서는 슬쩍 내다본다. 몇 분 후, 얼굴이 사색이 된 경비대장이 말하길, 탱크 여러 대가 장 보고 오던 시민들과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덮쳐 깔아뭉개고, 군인들 한 무리가 옆 아파트에 난입하더니 아무리 많이 잡아도 고등중학 정도로 앳되 보이는 어린 애들이 남녀 할 것 없이 피범벅이 되어 연행되더라는 것이다. 참담한 일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해방군이 무고한 인민들을 이렇게 짓밟다니. 소학교 들어갈 나이도 안 되어 탱크에 짓밟힌 아이들은 무슨 죄고, 휴교령이 내려진 후 줄곧 겁에 질려 집에서 떨던 중학생 아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이래서야 옛날 국민당 반동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학생들의 폭동은 분명 잘못되었고, 사상 단속은 철저히 해야겠지만 이는 주모자 몇 명 라오가이 보내서 재교육 좀 하고 우리 기성세대들과 당과 공직의 지도부가 쇄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타일러도 충분할 뿐, 이렇게 과잉 대응하는 것은 그 문혁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나는 우리 중화민족의 명예를 위해서 경비대장의 보고가 과장이기를 바란다. 그러한 나날이 얼마간 이어지고 며칠 후, 곳곳에서 무언가 타는 냄새와 연기가 진동하더니, 모든 것이 '깨끗이 청소'되었다는 뉴스 보도가 들려온다. 계엄이 해제되고 철수하는 경비대를 배웅하며 아내와 아파트를 나서보니, 보도와 건물 벽 곳곳에 혈흔으로 얼룩이 져 있고 우리 부부는 경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며칠동안 공안과 청관들이 보도블럭을 갈아엎고 새로 페인트를 칠하더니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8월 즈음, 87년 이전 본과를 졸업하여 이미 외지로 나가 있던 자녀들이 방문했고, 서로가 무사함에 안도감을 느꼈다. 언론이 통제되었는지 세 자녀 모두 폭동이 일어나 해방군이 구국의 결단을 내려 '청소'했다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고, 우리 부부는 자녀들이 걱정할까, 보고 들은 모든 참상을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들 무사히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철 없던 동생네 외동아들은 폭도들과 어울려 군의 계도에도 응하지 않다가 끝내 그 날 새벽을 마지막으로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끔찍한 여름이 지나가고, 그 해 겨울, 탐오로 악명높던 동유럽 뤄마니야의 영수가 정치풍파 속에서 챠오셴으로 탈출하려다가, 분노한 인민 대중에 붙잡혀 처결되었다. 소련도 정치풍파가 이어지더니 어뤄쓰와 기타 열 몇 개의 나라로 분해되었다. 유고도 정치풍파를 거쳐 내란 중이라고 한다. 졔커쓰뤄바커는 정치풍파는 없었지만 둘로 나뉘었고, 헝가리와 불가리아 또한 정치풍파는 없었지만 끝내 공산당이 실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계에서는 천윈 동지를 위시한 보수 세력들이 개혁개방 유보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물론, 개혁개방으로 신시대가 열리고 있는 공로도 부정할 수 없지만, 지금은 내부 정리가 필요하다는 천윈 동지의 주장에도 동감한다.
복직하고 나니 사대부중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실종되어 있다. 그 중에는 모범학생으로 칭송이 자자하고 당위서기와 시장 앞에서 여러 차례 상도 탔던 쯔 양도 포함되어 있었다. 쯔 양의 친구였던 쳔 양은 어딘가 멍해 보인다. 얼마 후 둘의 담임인 쟈젼과 면담을 하고서 나는 경악했다. 쯔 양과 쳔 양은 휴교 기간 아파트를 수색하던 진압군에 연행되었고 이후... 그러나 지금은 서슬퍼런 검열 정국이다. 나도, 쟈젼도, 쳔 양도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사상 단속을 강화한다며, 모든 고등중학교와 대학교에는 학생 군사훈련이 부활했다. 나는 군 당국의 요청을 받고 어러 차례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군훈 기간에 사상교육을 하러 나섰지만, 교육 할 때, 마친 후, 계속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92년 즈음이던가. 덩 동지가 느닷없이 남방 시찰에 나섰다고 한다. 맨 처음, 당국에서는 은퇴한 평당원의 개인 여행이라며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광동의 신도시 션젼에서 시작한 덩 동지의 여행이 상하이에서 마쳐질 무렵, 분위기는 달라졌다. 차기 대권 주자 쟝쩌민을 포함한 고위직 여럿이 도열하여 덩 동지를 마중나왔고, 천윈 동지는 더 이상 옛날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며 백기를 들었다. 천윈 동지의 은퇴 소식을 들으며, 우리 부부는 문득 우리 세대도 이제 뒤로 물러날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90년대 이후의 썰은 금요일에는 연재될 수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