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모음


*간략히 썼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할 수 있다*


학살이 주제다 보니 잔혹스럽고 혐호스러운 내용과 사진이 담겨있다*



7년 전쟁은 잠시 접어두고



1. 독일의 식민지

오토 폰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원래 식민지 획득하자는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식민지를 얻어봤자 잠재적 이익보다 그걸 유지하거나 방어하는데

더 큰 비용이 들어가고 식민지로 인한 분쟁으로 유럽 동맹에

큰 변화가 일어나 동맹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83~1884년

그는 이 생각을 뒤집고 베를린 회의에서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 식민 제국을 세우려는 생각을 품었다


왜 비스마르크가 저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다

추론해보자면 당시 빌헬름 1세가 고령의 나이가 되었고 곧 빌헬름 2세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 비스마르크의 지위를 박탈할 거 같으니

미리 빌헬름 2세의 지지를 받는 반식민주의자를 약화시키려는 것일 수 도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한스 울리히 벨러'라는 역사가의 생각으론

제국주의 정책은 외부 압력에 대한 대응이 아닌 내부의 정치 경제적 힘

기반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1880년대 독일 제국이 식민지를 건설한 이유는

힘에서 비롯된 게 아닌 불안정화된 산업화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해결책이었다


여기에 덧붙어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피했던 방법은 프랑스 왕따도 있었지만

막강한 힘을 키워 다른 국가가 넘볼 수 없게 만드는거였다

식민지를 획득하여 불안정한 산업화를 해결하고 막강한 힘을 얻으려고 식민지를 세웠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간에 독일 제국은 베를린 회의로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했고

남서아프리카, 토골랜드, 카메룬 등을 얻어가고 있었다


아프리카 출격 편에도 언급했지만

베를린 회의 이후로는 실효 지배 원칙에 따라 아프리카 영토를 주장할 수 있었다

(군대가 있거나, 철도를 배치하는...이런걸로는 인정이 안 된다)

그렇게 남서아프리카에서 잘 살고 있었던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자신들도 모르게 독일제국군에 의해 보호받는 신분이 되었고

나중에는 살던 고향에서 강제로 쫓겨나거나 토지와 가축을 강탈하거나

심지어 베를린 회의에서 노예제 폐지를 약속했는데도 노예로 부려 먹기도 했다



2. 높아저가는 긴장감

당연히 이들은 불만은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했고

1893년부터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독일 제국은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압도적인 수 차이 때문에 효과가 없게 된다

(1902년 기준으로 20,000명의 주민 중 독일은 2,595명에 불과했고

헤레로족은 80,000명이었다)

여기에 안 좋은 사건이 하나 더 터지게 된다


디트리히라는 독일 상인이 추장의 며느리를 겁탈하려고 했고

그 와중에 저항하자 디트리히는 총을 쏴 죽였다


디트리히는 캠프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어둠 속에

총을 쐈지만 불행하게도 그 총알이 며느리에게 맞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열대병까지 앓고 있어서 정신병으로 인한 사고로 판단

디트리히에게 무죄를 선고하게 된다

민심이 안 좋아지니깐 독일 남서아프리카의 총독을 역임한

테오도어 로이트바인까지 개입했고 이번에는 디트리히가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로 했지만 로이트바인을 반역자로 욕하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 외에도 다른 문제가 많았다


독일인은 아프리카인들을 개코원숭이라고 놀리기도 하였고

식민정부는 아프리카 주민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었고

반환 시기가 다가오자 부채를 없애준다는 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 중

돈이 될만한 모든 것을 싸그리 가져갔다


이러한 탓에 납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여성 원주민을 첩으로 삼는 일도 벌어졌다

결국 한 번에 큰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고

1904년 헨드릭 윗보이는 독일에 반항하기 위하여 여러 부족을 모우고

식민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 전쟁)


윗보이는 엄청 신중하게 행동했는데

무작정 반란하면 순식간에 반란이 끝나니 잠시 무기를 내려놓고

독일이 반란이 끝났다고 판단하게 하여 군대를 철수하게 한 뒤를 노렸다

그의 생각대로 독일군은 평화로워지자 반란이 끝났다고 판단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그 틈을 노려 사무엘 마하레로는 보급품을 포위하거나 독일군 140명을 사살했다

(무작정 사살하지 않았고 식민정부와 관련있고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는 건들지 않았다)

반란군은 신식 무기를 가진 독일군에 상대가 안되는걸 깨닫고

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여

초기에는 독일에 큰 타격을 입혔다


반란 소식을 들은 독일은 1만명의 군대와 장군을 보냈고


1904년 8월 11일

결국 기관총을 가진 독일 제군군에 의해 반란군은 패배를 당하게 된다

(워터버그 전투)

전반적인 우세는 독일 쪽으로 갔으나

반란군이 완전히 없어진것도 아니고 계속 항쟁을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1만명 군대와 함께 온 이 양반은 아주 대단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3. 집단학살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학살당했으며, 그중에는 독일인도 포함되었다


빌헬름 2세는 아시아인이 서구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믿는

황화론을 굳건히 믿고 있었으며 의화단을 진압하러 가려는 군인에게

아틸타의 훈족처럼 자비를 베풀지말고,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던

독일 장군 중 한 명이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이었고

이러한 경력 덕분에 남서아프리카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워터버그 전투를 지휘한 것도 이 사람이긴 한데

좀처럼 봉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자 1904년 10월 2일

아주 대단한 생각을 떠올리고 내뱉게 된다

"독일군의 위대한 장군인 트로타가 헤레로족에게 경고한다

헤레로족은 더 이상 독일의 신민이 아니다 너희는 부상당한 병사들의

귀와 다른 신체 부위를 잘라냈고, 죽이고, 훔쳤으며 이젠 너무 비겁해서 싸우고 싶지 않다

누구든지 족장 중 한 명을 내게 넘기는 자에게는 1,000마르크, 사무엘 마하레로는

5,000마르크가 주어질 것을 너희들에게 알린다


헤레로족은 이제 이 나라를 떠야한다

만약 거부한다면 대포로 강제로 옮길것이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헤레로족은 총이 있든 없든

소가 있든 없든 발견 되는 즉시 모두 처형할 것이다

여자도 아이도 살려두지 않겠다


이제 너희들을 몰아내고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이것이 내가 헤레로 족에게 하는 말이다"


즉,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노인이든 헤레로족이라면

닥치는 대로 쏘라고 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이 포고문은 점호 시간에 병사들에게 낭독 될것이며

대장을 잡은 부대에도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며 여성과 어린이를 향한

총격은 머리 위로 총을 쏘는 것으로 이해하여 [도망가도록] 강요할 것이라는

내용이 덧붙어질것이다


나는 이 선언이 더는 남성 포로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지만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잔학 행위로 변질되지 않을것이라고

절대적으로 가정한다 후자는 몇 번만 총 쏘면 도망칠것이다"

트로타는 포로로 잡힌 헤레로의 남자들은 처형했다

근데 여자와 아이들은 어찌보면 더 잔혹하다고 할 수 있는

사막으로 몰아내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게하였다

사막에서 나오면 총에 맞게 되고 그렇고 버티기엔 상횡이 좋지 않고.....

(트로타는 여성과 어린이에 대해 예외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총살을 하지 않고 몰아낸 이유는 독일군에 질병을 감염시킬것 같다는 이유로 몰아냈다

그리고 1904년 말

옆나라인 콩고도 들켰는데 이 소식이 알려졌고

독일의 이미지를 고려해 이제 처형이나 사막으로 몰아내지 말고

강제수용소로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된다



4. 강제수용소

사막으로 몰아낸 상황보다 더 최악인 수용소는 빠르게 퍼졌고

남아프리카의 신문 Cape Argus도 캠프의 상황을 묘사하는 기사를 실었다


"체포되어 처형되지 않은 여성들은 군대에서 일하게 됩니다

앙그라 페케나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힘든 일을 하는 것을 보았고

너무 굶주려서 피부와 뼈만 남게 되었습니다

.......

그들은 먹을 것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수송 기사가

버린 쓰레기 음식 조각을 주워 먹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걸리면 채찍질을 당합니다"

수용소를 최초로 방문한 민간인인 아우구스트 쿨만도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병 탓에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한 여성이

다른 포로들에게 기어가 물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광경을 본 간수는 그녀에게 총을 쐈습니다

두 발은 허벅지에.... 한 발은 팔뚝에....

그날 밤 그녀는 죽었습니다"

수용소의 음식은 극도로 부족했으며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쌀로 구성되었다

그 쌀도 익히지 않은 쌀이였으며 뭣보다 냄비가 없어 익힐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헤레로족은 쌀을 먹었으며 소화가 잘 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쌀조차 주지 않았고 죽은 말과 소를 줬다


수용소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깐 이질과 폐 질환이 흔했다

가혹한 음식 사정을 견디고 나면 매일 수용소 밖으로 끌려가

독일 경비병들의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노동에 시달려야 했었다

게다가 의료 지원이나 간호도 받지 못한 채 방되어야만 했다

총살, 교수형, 구타 및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대우는 흔한 일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끔직한 상태를 본 Cape Argus는 기사를 하나 더 쓰게 된다


"수백 명,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였고 노인 몇 명이 있습니다

.....

그들이 넘어지면 폭력을 담당하는 군인들이 일어날 때까지 때립니다

한번은 한 살 미만으로 보이는 아이를 등에 업고 무거운 곡물 자루를

머리에 얹고 있는 한 여자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

상병은 4분 이상 그녀를 구타했고 아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고 짐을 짊어졌지만 아기는 매우 세게 울었습니다"

케이프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나미비아에서 독일군 수송 기수로

일자리를 구한 탓에 케이프로 돌아온 일부 중은 자신의 본 이야기를

직접 풀기도 했으며 프레데릭 카루더스 코넬도 이 중 한 명이었다


"추위, 그곳의 밤은 종종 몹시 추웠고 배고픔, 갈증, 노출, 질병, 및 광기로 인해

매일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썰물 때 시신들을 수레에 실어

뒷 해변으로 운반하여 몇 인치의 모래에 묻었다가 밀물이 들어오면

상어의 먹이가 되는 시신들이 빠져나갔습니다"

수용자들은 각종 의학 실험에도 이용되었는데

살아있는 괴혈병을 앓고 있는 수감자들에게 비소와 아편을 투입하면 어떨까

같은 말 같지 않은 실험이 벌어졌으며


헤레로족의 두개골은 우생학 연구를 위해 독일로 보내지게 된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에

수용소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하루 평균 12.9명이 사망하는 수치가 나타나게 된다


이후 밝혀진 바로는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들의

사망 진단서를 인쇄하고 있을 정도였다

전쟁은 1908년이 되서야 끝났고

헤레로인들은 식민지 정착민들을 위한 노동자가 되었으며

어떠한 것을 소유할 수 없었고 신분을 증명하는 원판을 착용해야만 했다


헤레로족은 전쟁 전에는 80,000명었으나 15,000명으로 확 줄어들었고

나마족은 10,000명이나 학살 당하였다



5. 그 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1915년 남아프리카 연합에 점령되었고

1920년 국제연맹에 의해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빌헬름 2세가 학살을 명령했다는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1945년 2월, 연합국의 폭격으로 독일 제국의 문서가 불에 탔기 때이다


하지만 트로티가 사용했던 전술은 중국에서의 것과 매우 유사했고

결정적으로 트로타는 집단 학살이 발각되고도, 군법 재판을 받지 않았기에

빌헬름 2세가 어느 정도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이 전쟁을 통해 인체실험을 했던 인물 중에서는 오이겐 피셔가 있는데 그의 우생학적 연구는

나중에 히틀러와 맹겔레에 큰 연감을 주었고 뉘른베르크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피셔가 실험을 자랑스워했는지 수치스러워했는지

위의 찍은 사진만 봐도....)

여담으로 트로타가 여성과 아이들을 사막으로 몰아내려고 했을 떄

딱 하나의 탈출구가 있었는데 바로 영국의 보호령 배추아날랜드


영국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수천 명의 난민이라 난감했을텐데도

난민 모두를 받아들이고 학살로부터 보호해준다

초기 봉기를 주도했던 헨드릭 윗부이

현재 나미비아 달러 50/100/200 짜리 앞면에 인쇄되어있다


그리고 남은 건 독일은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를 저질렸기에

이 일에 대해서 사죄와 보상을 해야되는데......

독일은 2004년 전까지 헤레로족에 대한 사죄를 하지 않았다


따지고보면 그전에도 몇 번 사죄하긴 했지만

지배해서 미안하다이지 제노사이드를 일으켜서 미안하다는 2004년전까지 하지 않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말인데....)


그 2004년 사죄도 독일 정부에서 개인의 견해라며 선을 그었다

경제지원을 하긴 했지만 1990년 이후 5억 유로였던 지원이

2003년과 2004년에는 2천 3,000만 유로로 줄어들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를 한건 2016년이며 그 뒤로부터

우생학 실험을 위해 가져간 두개골을 돌려주거나 유물 등을 반환했다

나미비아 주민들은 2021년에 독일하고 합의한 결과가 맘에 들지 않아 시위를 벌이고 있다

뭐......독일하고 나미비아의 관계는 아직 시원치 않는걸로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