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과 대공위 시대의 서막


오토 1세가 로마 황제의 관을 쓴 962년 이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적 정부로서 존속해왔으나, 그 후에도 황제권과 교권의 싸움과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대부터 이어진 로마 지배를 위한 대외적 전쟁과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그 틀은 점차 흔들리고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215~1250)는 1220년까지 독일 지방에 머물러 독일 내부 질서를 재편하다가, 다시 떠나 조부 프리드리히 1세처럼 대외 정책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치세동안 단 8년간만 독일에 머물렀다는 것도 이를 방증하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또한 프리드리히는 제후들의 요구사항 중 대부분을 들어주었다. 제후들의 봉토는 완전히 세습화되었으며, 영지 안에서 독점적인 사법권을 가지게 되었고, 황제는 제후들의 영지에 대한 과세권을 그들의 동의 없이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심지어 독일의 도시들마저 제후들에게 넘겨주었다. 나중에 프리드리히 2세의 장남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었던 하인리히가 독일 왕위를 받고 나서 중앙집권적 정책으로 수정하려 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하인리히를 오히려 두 눈을 뽑아 감옥에 수감시켜 죽게 했다. 이처럼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로의 진출이라는 대외 정책의 성공을 위해 제후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황제권에 크나큰 제동으로 돌아오게 됐다. 프리드리히의 이탈리아 원정에 제후들은 무관심했고, 도리어 지원 요청을 끝없이 거절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 1216~1227)


 뿐만 아니라, 그는 교황과의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시 이노켄티우스 3세의 뒤를 이어 재위하던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온화한 성격의 교황이었는데, 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남긴 일부 교황령의 ‘환도’ 약조에 혹해 프리드리히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제관을 씌웠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고 그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부 이탈리아에서 관리들을 교체했는데, 이들은 모두 평판이 나쁜 시칠리아인들이었으며, 프리드리히의 치세가 끝나가는 시점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인내의 임계점을 넘을 수 밖에 없었다.

 불같은 성격의 후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는 그런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다. 교황권에 대한 침해를 용납하지 않고, 더욱이 십자군 참가를 하겠다는 약조를 스스로 어긴 얕은 신앙심의 프리드리히를 그는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말머리를 돌려 예루살렘 성지로 향했고, 이집트의 술탄과 협약을 맺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나자렛 등의 도시를 차지하게 되는 성과를 올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회복한 성과는 다른 십자군, 심지어 3차 십자군에 출정한 잉글랜드의 사자심왕이자 명장인 리처드 1세(Richard I)도 올리지 못한 성과였다.

 교황의 군대가 이탈리아에 있는 프리드리히의 영토로 침입하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속히 귀국했다. 교황은 결국 1230년, 그와 화평을 맺었다. 다음 해에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의 멜피(Melfi)에서 대회의를 열고, 왕국의 새로운 법전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을 멜피 헌장(The Constitutions of Melfi)이라 하며, 대략적인 내용은 1. 왕의 절대권 강조와 함께 봉건귀족과 도시민의 특권 축소 2. 모든 주요한 민형사 사건을 왕의 법정에 회부 3. 시칠리아를 11개 주로 분할, 각각 형사 문제에 대해선 검찰관(justicar), 민사 문제에 대해서는 지사(chamberlain)에 의해 통치가 있었으며, 검찰관과 지사 등의 지방관리는 중앙정부의 감독을 받았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는 라벤나 회의(Diet at Ravenna)를 소집하여 롬바르디 도시들에 대해서도 역시 비슷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필 것이라 선언했다.

 반면, 그는 독일의 각 제후에게 소유 영지 내에서의 실질적인 주권을 부여하는 《제후들을 위한 헌장(Constitution in Favor of the Princes)》을 선포하였는데, 이러한 상반된 두 정책은 프리드리히가 이탈리아 정책에 최우선 순위를 뒀으며, 독일은 관심 밖의 변방으로 우선순위에서 벗어났단 것을 의미했다.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 1243~1254)


 하지만 그럼에도 프리드리히는 무수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조부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했던 롬바르디 동맹(League of Lombardia)이 교황의 지원 아래 재결성되고, 1234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설득에 넘어가 장남 하인리히가 독일 왕위를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롬바르디 동맹과 손을 잡고 반기를 들었다. 1239년에는 다시 파문을 당하였으며, 이에 1241년 로마 자체를 직접 공격하려 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교황인 셀레스틴 4세는 선출된 지 불과 몇 주만에 세상을 떴으며, 그 다음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1243~1254)는 매우 강력한 교황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피신하여 알프스 너머 프랑스의 리옹으로 교황청을 옮긴 뒤 공의회를 소집해 프리드리히를 또 다시 파문했고, 폐위를 선포케 했다. 그는 정치적 위기 상태를 보다 우선시한 교황이었고,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비용을 대기 위해 모든 교회로부터 돈을 거두는데 있어 자신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헨리 3세(Henry III, 1216~1272)


성왕 루이 9세(St.Louis IX, 1226~1270)


 거기에 더해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유럽의 군주들에게 현 상황에 대한 개입을 촉구했다. 그러나, 영국의 헨리 3세와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Louis IX, 1214~1270)는 각각 개입의 이유 없음과 극단적인 주장에 대한 비찬동이 있었기에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전쟁의 성패는 롬바르디 동맹에게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여러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궁극적인 승리, 곧 전쟁에서의 대대적인 승전을 하지 못했다.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때문에 롬바르디 동맹군을 물리쳤음에도 요새화된 도시를 차례차례 함락시킬 수 없던 것이다.

콘라트 4세(Conrad IV, 1250~1254)


 이런 상황에서 1250년, 프리드리히 2세는 사망했고, 이 죽음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다. 아들 콘라트 4세(Conrad IV, 1250~1254)는 독일 왕으로 인정되었으나 실권 없는 명목상의 군주였다. 그나마 시칠리아 쪽에서만큼은 입지가 강력했지만, 재위 4년 만인 1254년에 사망하며, 제대로 된 왕권의 확립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게 정당한 후계도 없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황제위의 공백은 대공위 시대라 불리는 혼란기의 서막을 알렸다. 


※ 괄호 안 연도는 재위기간


참고문헌

브라이언 타이어니 외 저, 서양 중세사, 이연규 옮김, 집문당, 1986

기쿠치 요시오 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이경덕 옮김, 다른 세상 출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