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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7월 17일 경진 2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 3년

이준이 군사를 나누어 3진으로 만들었는데, 

강순이 3천 명을 거느리고, 김교가 6백 28명을 거느리고, 박사형이 2백 명을 거느리고, 남이가 1백 명을 거느리고, 정준·우공이 총통군 6백 명을 거느리고 1진을 만들었으며, 

어유소가 6백 40명을 거느리고, 허종이 2천 2백 80명을 거느리고 김숭해가 1천 2백 명을 거느리고, 민효원이 6백 명을 거느리고, 정종·유흥무가 총통군 6백 명을 거느리고 1진을 만들었으며, 

선형·오자경·한계미가 각각 1천 명을 거느리고, 이종·민발이 총통군 6백 명을 거느리고 1진을 만들었다. 

또 이 거느린 군사를 가지고 3상으로 만들었는데, 

한계미를 중상으로 삼고, 선형을 좌상으로 삼고, 오자경을 우상으로 삼았다. 

또 맹패를 나누어 9장으로 만들었는데, 

정숭로에게 좌사대를 거느리게 하고, 서초에게 우사대를 거느리게 하고, 노윤필에게 전사대를 거느리게 하고, 홍윤청에게 후사대를 거느리게 하고, 손효윤에게 좌사자위를 거느리게 하고, 경정에게 우사자위를 거느리게 하고, 김효조에게 좌해청위를 거느리게 하고, 김효선에게 우해청위를 거느리게 하고, 경유공에게 맹호위를 거느리게 하고, 오자치에게 팽배를 거느리게 하고, 유자광에게 파적위를 거느리게 하였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8월 3일 병신 2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 3년

도총사 이준이 제장과 더불어 입공할 길을 다시 의논하니, 

두어소의 길은 빗물이 불었기 때문에 선형·오자경·최유림으로 하여금 각각 소관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하루를 머물게 하여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고사리포를 경유하여 들어가게 하고, 

과 강순·어유소는 거산 역로를 경유하여 들어가고, 또 여러 군사들로 하여금 투구 위에다 백지에 ‘검은 달’을 그려 붙여서 표로 삼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관군이 투구 위에 ‘관’자를 써서 이를 구별하였는데, 적이 이를 본땄기 때문에 고친 것이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8월 4일 정유 4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 3년

이날 닭이 울 때 진북 장군 강순이 선봉이 되고, 다음에 절도사 허종과 대장 어유소가, 다음에 도총사 이준이 행군하여 거산역동에 이르니, 

적병 약 5천여 명이 이미 먼저 마흘현에 웅거하여 남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고, 북쪽으로 태산에 이르는 15여 리에 걸쳐서, 기치를 많이 휘날리고 팽배를 줄지어 즐비하였다. 

강순이 평로 장군 박중선김교 등과 더불어 회의하고, 사자위의 사대와 맹패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웅거한 산 아래에 줄지어 진치고 적병이 와서 충돌할 것을 방비하게 하고, 거산평을 순시하여 진을 베푼 곳에 표를 세우고서 돌아와 거산평의 동쪽 냇가에 이르러서 어유소의 군사를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어유소의 군사가 이르니, 또 여러 위로 하여금 목채를 세우고 진을 설치하게 하고 편비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산 기슭으로 나아가, 적과 더불어 1백 보 쯤 거리에서 상대하였다. 장차 올라가 공격하려고 하는 것처럼 최적·김용달·지득련 등으로 하여금 적진으로 말을 달려가서 큰 소리로 더불어 말하여 화와 복을 개유하게 하였다. 

최적 등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적장 김극효 등이 이르기를, ‘귀성군이 만약 온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이시애를 잡아서 기 아래에 바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이 말하기를,

"적의 꾀를 추측하기 어려우나, 그러나 내가 가서 보고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알아보겠다."

하고, 드디어 말을 달려가서 지득련 등으로 하여금 큰 소리로 외쳐 말하게 하기를,

"귀성군이 이르렀으니, 너희들이 속히 와서 배알하라."

하였다. 김극효 등이 먼저 험한 곳을 점거하였음을 스스로 믿고 마음으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여 대답하기를,

"나는 가기가 어려우니, 귀성군이 군사를 버리고 오라."

하고, 말이 상당히 불손하였다. 혹은 꾸짖고 욕하는 자도 있으니, 적이 기를 휘두르면서 싸우려고 하였다. 

강순·박중선 등이 대로를 경유하고 허종은 대로의 남쪽 중봉을 경유하고 우공 등은 대로의 중봉을 경유하고, 어유소는 바닷가의 동쪽 고개를 경유하고 김교 등은 북쪽 산 아래를 경유하여 나란히 진군하였다. 

은 전각을 불어 독전하니,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응하여 개미와 같이 붙어서 위로 공격하였다. 적이 힘써 막고 포를 쏘고 돌을 굴려 화살이 비오듯이 내려왔다. 관군이 포를 쏘고 난사하면서 더불어 싸운 지가 한참 오래 되었다. 

신시에 우공의 군사가 돌격하여 산 고개로 쫓아 올라가서 적이 웅거한 봉우리를 빼앗으니, 적들이 물러가 다음 봉우리에 의거하였다. 김교이숙기 등이 추격하여 참획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이시애가 중봉에 웅거하여 정예 군사 2천여 기를 거느리고 팽배를 줄지어 세워 세겹으로 하니, 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이시애가 죽을 힘을 다하여 힘써 싸웠으므로 견고하여 격파할 수가 없었다. 

유시에 이르러 어유소가 동봉에서부터 방향을 바꾸어 싸우면서 진군하여 고개 위에 이르러 적의 좌견에 임하여 진에 돌격해서 한쪽 면을 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일시에 분격하고, 북을 둥둥 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드디어 대파하니, 적들이 낭패하여 이시애는 홀로 몸을 빼어 말에 올라 도망하였다. 병장을 버리고 숨어서 도주하니, 스스로 서로 밟고 밟히었고, 관군이 승리를 틈타 추격하여 여주을령에 이르렀다. 

참수가 2백여 급이었고, 사로잡은 것이 13인이었고, 궁시·개장·기치·안마를 버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해가 이미 어두워져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중지하였다. 

싸움이 처음에 벌어질 때 조석문·한계미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군루를 쌓아서 군사를 기다렸다.


양측이 화약 무기를 적극적으로 썼던 데다 이시애군의 병력도 5천여 명에 달했고 

특히 정예 기병 2천여 기로 견고하게 방어하며 분전했기 때문에 전투 양상이 치열해서 흥미로웠던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