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통념과 달리 일본군은 1차대전 때부터 이미 전차에 관심을 상당히 가졌습니다. 안 그랬으면 1920년대에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전차인 89식 중전차를 개발했을 리가 없죠.



참호전에서 '탱크' 라는 놈이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 육군은 그 탱크라는 놈을 영국에서 구입해 일본에서 한번 굴려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참호전에 기술사관을 보내 탱크의 운용양상을 확인하고,


아직 영일동맹이 지속되고 있던 점을 이용하여 영국과 긴밀히 접촉하여 수입을 시도합니다. 이 때 영국에서 활약한 사람이 미즈타니 키치조(水谷吉藏) 대위였는데, 나중에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가 되기도 합니다.



당시 일본이 원한 전차는 최신형의 Mk V 탱크였지만, 아직 전쟁이 지속중이라 영국이 쓰기로 정해진 물량 보내주기도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이전 형식인 Mk IV 암컷형(주포 없이 기관총만 있는 차량, 수컷은 주포 장착 차량)을 들여오기로 합니다.


Mk IV는 무려 3명이 달라붙어 방향전환을 해야했던 반면 Mk V는 조종수 한명이서 방향전환이 가능하고, 기관총의 숫자가 증가한 게 차이였습니다.


일본에서 주행하는 Mk IV


그리하여 1918년 10월 18일, 일본 최초의 전차가 되는 Mk IV 전차가 운용 교습 교관으로 온 영국군 사관 5명과 함께 고베 항에 입항합니다.


일본, 아니 아시아 최초로 '탱크' 라는 놈이 소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이 전차를 '4호형 중전차(重戰車)'로 소개했습니다.



이후 이 전차는 일본 화물선에 환적되어 요코하마로 이동, 최종적으로는 도쿄 인근의 요요기 훈련장에서 다이쇼 덴노와 고관들 앞에서 주행시험을 보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행을 맡은 영국군 5명은 훈장까지 받았는데, 그만큼 일본이 전차에 건 기대가 컸다는 방증이었죠.


그해 12월엔 육군사관학교 산하에 '자동차대 연구반' 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전차 설계 연구가 시작됩니다.



이후 이 전차는 1925년에 육군보병학교 산하 '전차대'의 훈련용 전차로 사용된 것을 마지막으로 퇴역합니다.


Mk 전차 같은 '육상전함' 형 전차는 FT-17로 대표되는 포탑을 갖춘 본격적인 전차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퇴물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다른 나라들에서도 다 퇴역해버렸으니요.



퇴역 후에는 이렇게 야스쿠니 신사 유슈칸에 '제1호 기념전차' 라는 명목으로 전시됩니다.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엔 제로센, 치하 전차 등 여러 일본군 병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도 이 연장선상인 셈입니다.


하지만 1944년까지만 전시가 확인된 후 행방불명되어 버렸는데, 폭격으로 소실되었다는 설과 미군에게 발견되어 애버딘 시험장으로 끌려갔다는 설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전시된 마크 전차는 사실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고 하네요.




일본군의 FT-17


Mk 전차 이후에도 일본은 영국에서 Mk.A 휘펫 중형전차, 프랑스로부터 FT-17 경전차를 도입했는데, 이들은 각각 3량, 13량 정도로 복수 도입되어 실질적인 일본군 전차부대의 시작이 됩니다.


특히 FT-17은 '갑식 전차'로 명명되어 최초의 일본군 제식에 등록된 정식 병기가 되었으며, 개량형인 NC27도 1929년에 도입되어 '을식 전차' 가 됩니다.



1925년에는 교도대 형식으로 최초의 전차대대가 편성되었는데, FT-17 5대와 휘펫 3대로 구성되었습니다.


휘펫 전차 2대는 이에 앞서 1920년의 시베리아 출병 때 동원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애초에 워낙 적게 도입된 차량이라 실전까지 치뤘는지는 의구심이 있긴 합니다.



본격적으로 인정된 일본군의 첫 전차부대 실전은 1932년의 만주사변 때 FT, NC 전차소대가 투입된 것입니다. 물론 중국은 이 전차부대를 막을 전력이 전혀 없었고, 거의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하얼빈 부근까지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후 89식 중전차와 NC-27로 구성된 전차대대가 상하이 사변에 동원되기도 하는 등, 당시 일본군은 전차 운용 실전사례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적어도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 유수의 기갑 선진국이었던 것입니다. 1929년에 개발한 첫 자체양산 전차, 89식 중전차의 성능도 당시로서는 만족하고서도 남았고요.



다만 적인 중국군이 전차가 매우 적었던지라 전차전 경험을 쌓을 수가 없는 게 흠이었고, 그래서 전차 자체가 보병지원용으로만 주로 활용했습니다. 대전차전의 필요성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걸 실제로 반영시키기엔 시간이 걸렸습니다. (치하 改의 주포인 47mm 주포가 개발된 게 1941년이었으니요)


이들이 적 전차의 쓴맛을 본 것은 1939년의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 BT전차에 된통 당하고 난 후였죠.




블로그 출처: 무수천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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