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록

자유군단이 무엇인가부터 정리하자면 자유군단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이후 전역자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준군사 단체임

독일 내부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을 잡는데 앞장섰고 대폴란드 지역에서 폴란드계의 봉기를 여러차례 진압하는 등 베르사유 조약으로 치안 유지 및 국토 확보도 어려웠던 독일 정부의 합법적인 군사 조직이였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이 독일 패잔병(?)  무리가 어쩌다가 라트비아에 오게 되었는고 하니...

발트의 상황

위 지도가 독일이 전쟁말 파우스트슐라그(펀치) 작전과 후속 작전으로 점령한 최대 판도이다

즉 그냥 와있었다

거기다가 엄밀히 말해 서부전선에서 패하고 항복한거니 라트비아 등 발트 쪽의 독일군은 애초에 패한 적도 없었다

이중 에스토니아의 경우 몰려오는 볼셰비키를 막기 위해 독일군과 손잡으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에스토니아군과 북유럽 자원병들로 적군을 막아내며 독립을 사수했고 리투아니아는 애초에 소비에트는 먼나라 이야기였으므로 처리했지만

문제는 라트비아였다

대부분의 당시 독립국가들은 이전 지배국 아래에서 싸우던 부대가 독립국 군대의 기초가 되었지만 라트비아인 부대에는 조금의(?)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라트비아 소총 연대였다

그러니까 바로 그 라트비아인 부대가 독립 라트비아를 공산화 시키기 위해 쳐들어 오고 있었다

당연히 라트비아는 어쩔 수 없이 독일군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물론 원칙상 독일군은 모두 독일로 추방되어야 하지만 휴전 협정문에 '협상국이 내륙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바람직한 즉시'라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트비아의 독일군은 묵인해주었다

하지만 여기도 문제가 있었는데

독일군 장병 대다수는 사기가 박살난 상황이어서 집으로 가버렸다...

자유군단의 등장

이 대혼돈 속에 구세주(?)가 등장한다

요제프 비쇼프라는 독일군 소령이었다

그는 철의 여단이라는 자유군단을 창설한 다음 발트에 땅을 주겠다며 본격적으로 병사를 독일에서 모집했다

그런다음 그는 이들을 잔존 독일 패잔병과 합쳐 철의 사단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발트 독일인들을 중심으로 알프네드 프레처 소령 아래에 발트 향토방위군이 건설되었다(알프레드 프레처 소령은 독일계 스코틀랜드인이다)

이때 라트비아 군은 정신없이 발려서 리예파야 항 근처만 남은 상황

이에 자유군단 등 독일계 군대를 중심으로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 반격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리가를 탈환하는데까지 성공했고 라트비아의 위기는 끝나는가 했는데....

독일인의 라트비아

발트 향토방위군에서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빌미로 자유군단(앞으로는 발트 향토방위군을 구분하지 않겠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라트비아를 장악해 버린다!

혼비백산한 라트비아 정부는 증기선 위로 도망가 버리고 자유군단은 협상국에게 자신들이 떠나면 볼셰비키에게 라트비아가 점령 될것이라고 협박해 승인을 얻어냈다

그렇게 독일인의,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을 위한 라트비아가 성립되는 듯 하였으나....

에스토니아와의 갈등

애초에 이 기형적인 국가가 라트비아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리가 있나

당시 라트비아는 삼국지가 펼쳐지고 있었으니....

보라색-에스토니아군(+노란색-잔존 라트비아군)

분홍색-적군

주황색-자유군단

협상국은 이 중에서 동부의 적군을 공격하라고 요구했지만 자유군단과 그 수장인 골츠 장군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어차피 동부의 적군은 빈사상태로 공세 역량이 없는 상황이니 북부의 에스토니아군을 공격해서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끊고 라트비아를 완전히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골츠 장군은 지도상의 Cesis(체시스)를 점령하라고 명령한다

체시스 전투와 자유군단의 몰락

6월 5일, 자유군단의 공격으로 체시스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적군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선공을 날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에스토니아군은 하루만에 체시스를 내주었다

이렇게 되자 에스토니아군도 이판사판으로 체시스 탈환을 위한 공세를 개시하였고 자유군단과 에스토니아군 간의 충돌이 본격화 되었다

상황이 이리돌아가자 난처해진 것은 협상국이였다

힘을 합쳐서 적군을 막으라고 했더니 서로 싸우고 있었으니....

협상국은 6월 10일 휴전 협상을 열어 문제를 봉합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 건은 자유군단이 철저하게 계획한 사건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휴전 협정이 채결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유군단은 6월 19일, 휴전을 깨고 

(지도상의 오렌지색이 림바지이다)

림바지에 선제공격을 가하며 전투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준비를 마친 에스토니아군은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버텼고 6월 21일, 자유군단의 대규모 공세도 장갑열차까지 동원해 무력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친 자유군단을 상대로 6월 23일 역습을 개시, 체시스를 탈환하고 리가를 향해 전속력으로 진군하였다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자유군단은 한 번 패배하자마자 급속도로 붕괴하였다

7월 3일, 에스토니아군은 리가 외곽에 도착하였고 사태 중재를 위해 도착한 영국군이 스트라스덴호프 휴전문을 발표하였다

대강 자유군단을 당장 리가에서 협상국의 감독 아래에 퇴각 시키고 이후 되는대로 빨리 라트비아를 뜨라는 사실상의 명령이였다

골츠 장군이 리가를 넘기고 독일로 떠나며 공식적으로 자유군단은 해체되었고 협상국의 인도 아래 독일로 떠나나 했는데....

발트 독일인 최후의 발악, 서러시아 해방군

자유군단원들은 집이 독일이니 대부분 독일로 돌아갔지만 발트 향토방위군의 발트 독일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에 이들은 자유군단의 잔당과 함께 파벨 베르몬트 휘하의 서러시아 해방군에 대거 가입해 최후의 발악을 벌였다

베르몬트는 명목상 상관인 유데니치 장군이 어떻게든 에스토니아를 구슬리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노리고 있는 것에 아랑곳 않고 이들과 함께 1919년 11월 리가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두번은 안 당한다고 라트비아군은 만반의 대비를 해두었고 결국 발트 독일인들의 발악은 격퇴되었다

그리고 그걸로 발트 독일인들의 운명을 결정되었다

이후 사실상 간첩 취급 받고 탄압당한 발트 독일인들은 독일로 이주하거나 그냥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야했다

그리고 라트비아는 드디어 미친 독일인들의 음모로 부터 자유로운 독립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Dievs, svētī Latviju!

(신이시여 라트비아를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