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자치구가 있는 민족은 5민족이 있다. 위구르, 티베트, 후이, 좡, 몽골.

그 중에서도 위구르의 근대사를 가볍게 알아보자.


위구르족

들어가기에 앞서, 신강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을 정리하겠다. '신강'이 땅 이름('새로 정복한 땅')이고 위구르가 민족명칭이다.


 청말, 섬감(섬서성, 감숙성)에 대규모 회족 반란이 터지고, 청조는 이를 오랫동안 진압하지 못한다. 이에 신강 서부에서 섬감반란에 동조하여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첫 번째 반란이 현지 총독부를 몰아내고 신강의 수도 우루무치를 점령한다. 동시에, 서쪽에 있는 코칸트 칸국은 그 아래에서 일어난 두 번째 반란에 주목하여, '야쿱 벡'이라는 사람을 그 두 번째 반란 수괴의 요청으로 보낸다. 근데 야쿱 벡이 반란지에 도착하자, 상황이 반전되어 필요 없다고 돌려보내려고 시도했으나, 야심 많은 야쿱 벡은 씹고 자기가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첫 번째 반란도 흡수하여 사실상 신강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때 코칸트가 대충 멸망해서 러시아가 일리(위 지도의 파란 곳)을 먹었다. 야쿱 벡과는 사이에 산맥이 있어 별 관계 없었다.

한편, 섬감 지역에서는 좌종당이라는 당시 청나라의 장군(반란 때려잡기 전문가)이 도착해서 섬감 반란을 때려잡고, 신강으로의 진출을 준비했다.

청조 내에서는 신강을 포기하자는 게 주류 의견이었으나, 좌종당은 신강을 때려잡자는 강경파. 서태후의 군자금을 잔뜩 받고 온갖 곳에서 돈을 빌려 돈을 바르고 다니기 시작한다.

이제서야 위기를 느낀 야쿱 벡은 인도제국을 통해 청나라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청나라는 이에 긍정적으로 화답해 회담이 이루어질 뻔 했으나 야쿱 벡이 보낸 메시지가 계속 중간에서 증발(좌종당이 했다는 설이 있다)해버려서 대화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마침내 좌종당이 신강으로 진출한다. 일단 섬감에서 신강으로 도망친 중국계 회족부터 잡고, 야쿱 벡의 세력권으로 들어간다. 당시 야쿱 벡은 후방에 있었고, 전방의 성에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를 무시(태평천국 느낌?)한다. 그렇게 그 성을 상실했다.

또, 다른 성에서 지원 요청이 있었는데 이 성에는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 이도 무시했다. 그 성이 상실되기 직전, 야쿱 벡은 화병으로 급사(지 혼자 빡돌아서 죽음)하고 결국 야쿱 벡의 세력은 사분오열해서 좌종당에게 무릎꿇는다.


이 상황을  탐탁치 않게 여긴 건 러시아. 최소 10년은 지나야 야쿱 벡의 반란이 진압될 것으로 보고 일리 지역을 러시아 땅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 중이었는데 예상 외로 빨리 진압되서 많이 당황했다. 청나라는 러시아에게 이를 항의했고, 첫 번째로 보낸 외교관이 쓰레기같은 조약을 가져오자, 찢어버리고 감옥에 넣어버린다. 이에 조약이 파토날 뻔했지만, 러시아와 청조 모두 위기(러시아는 외교적 찐따, 청은 그 자체로 썩음)여서 어찌저찌 회담은 이루어졌고, 청조에게 비교적 유리(돈 내고 땅 뜯기는 건 같지만 적어도 아편전쟁 꼴은 안 남)하게 체결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져 청나라가 붕괴하자 신강은 군벌의 손에 들어가나, 한족계 군벌이었다.


적백내전기 당시, 러시아 백군이 신강으로 들어왔으나, 군벌 수괴인 양쩡신이 백군 대장을 죽이고 그 잔당을 알타이 너머로 쫓아버렸다. 따라서 소련과 신강군벌의 관계는 좋았는데, 소련과 신강의 교역량이 소련과 중국의 교역량의 10배에 달할 정도였다.


이후 국민당의 북벌 당시 양쩡신이 살해되고, 그 뒤를 이은 진수런은 많이 무능했는데, 위구르 반란이 터지자 항복한 위구르족 민간인까지 학살하는 무능한 짓을 저질렀고, 이에 위구르족은 옆에 있는 회족 군벌인 마중잉을 끌어들였다. 마중잉은 진수런을 축출한다.


그 후 성스차이가 신강의 군벌 수괴가 되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동투르키스탄 1공화국을 세운다. 위구르 민족주의가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위구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제정되었고, 국명을 '위구르스탄'으로 바꿀 것을 고려한다.


하지만 마중잉이 성스차이의 친소 행보를 싫어했기에, 신강으로 쳐들어와서 한바탕 부수고 간다.

그 이후에도 성스차이는 친소 행보를 보여 당시 신강은 반독립 상태였고, 최종적으로는 '동투르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워 소련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성스차이는 신강에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를 도입해서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누명씌움)와 기독교도를 죽였다. 이후 성스차이는 이런 행보로 국민당의 미움을 사서, 난징으로 소환되고 성스차이 정권은 몰락한다.


여기서 멈출 소련이 아니다. 이후 카자흐, 키르기스, 위구르 공산주의자를 모아 동투르키스탄 2공화국을 선포한다. 소련 공군의 지원을 받아 신강에서 국민당을 몰아낼 것처럼 보였으나, 회족 군벌 마부팡 휘하의 회족군대가 이를 진압하러 오자 카자흐와 키르기스는 같은 회족을 죽이기 난감해서 약간의 휴전이 일어난다. 국민당 측에서 보낸 장즈중은 '중화 주의'를 부정하고, 현지 위구르를 존중했다. 국민당 측에서는 이를 '소련의 스파이'라고 여길 정도로 부정적으로 여겼지만, 위구르는 잠시동안이나마 압제에서 벗어나 숨 쉴 수 있었다.


이후 국공내전이 중공의 승리로 끝나자, 동투르키스탄 2공화국 측에서도 내분이 생긴다. 그 와중에 소련마저 중공을 선택하자 정부 주석이 중공과의 연대를 선언했고, 이에 반대한 부주석과 그 의견에 따르는 자들은 터키로 떠난다. 1949년, 협상을 위해 북경으로 날아가던 신강의 여러 민족 대표를 태운 비행기가 추락해버리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다. 이후 1955년, 동투르키스탄은 공식적으로 '신강 위구르 자치구'가 된다.


문혁 때는 피해를 덜 받았다. 인구밀도가 원래 낮기도 하고, 한족 인구도 적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심도시 우루무치에서는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회교도들의 모스크를 파괴하거나 용도전환하거나, 쿠란을 불태우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