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 > 태조신성대왕 > 태조 1년 > 6월 > 모반을 꾀한 이흔암을 처형하다

음력 918년 6월 미상

마군대장군 이흔암을 참수하여 저자에 내다 버렸다. 이흔암은 궁술과 기마술이 전문이었는데, 이득이 되는 일을 보면 재빨리 취하였다. 궁예를 섬겨 술책으로써 임용되었다. 궁예 말년에 이르러서는 웅주를 습격하여 빼앗은 후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남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이르니, 사졸들이 많이들 도망가 버려서 웅주는 다시 백제의 소유가 되었다. 수의형대령 염장이 이흔암과 이웃에 살고 있다가 그 음모를 알고는 상세히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흔암은 지키던 곳을 버리고 스스로 찾아옴으로써 변방의 영역을 상실하게 하였으니, 그 죄가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주군을 섬기면서 평소에 정분이 있었으므로 차마 목을 벨 수가 없다. 또한 그 반역의 움직임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으니, 그도 필시 할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염장이 밀령을 내려 그를 감시할 것을 청하자 왕이 나인을 보내어 염장의 집에 가서 장막 속에서 몰래 엿보게 하였다. 이흔암의 부인 환씨가 뒷간에 와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오줌을 눈 후에 길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우리 남편의 일이 만약 잘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겠구나.”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들어갔다. 나인이 보고를 아뢰자 마침내 이흔암을 옥에 가두니, 모두 자복하였다. 백관들에게 그의 죄를 논의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직접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평소에 흉악한 마음을 길러 스스로 죽을 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법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사사로운 감정으로 어지럽힐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흔암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참수하고 그 집안을 적몰하였으나, 그의 당여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웅주 일대를 지키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태조 왕건이 즉위하고 수도로 가서 새 왕을 해칠 음모를 꾸민 것


고려사 > 권127 > 열전 권제40 > 반역 > 환선길 > 환선길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다

환선길은 그 동생 환향식과 함께 태조를 갖추어 섬겨 임금으로 추대하는 공을 세웠다. 태조는 환선길을 마군장군에 제배하여 심복으로 삼은 다음 항상 정예군을 거느리고 숙위하게 하였다. 그 처가 일러 말하길, “당신은 재주와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사졸들이 복종하며 큰 공도 또한 세웠는데, 권력은 다른 사람에 있으니, 어찌 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환선길도 마음으로 그렇다고 여기고, 드디어 병사들을 몰래 집결해 두었다가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마군장군 복지겸이 이를 알고 은밀히 보고하였으나 태조는 증거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태조가 궁전에서 학사 몇 사람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있는데, 환선길이 부하 50여 인과 함께 무장하고는 동쪽 곁채에서 안뜰로 돌입하여 곧장 태조를 해치려 하였다. 태조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큰 소리로 질책하며 말하기를,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천명이 이미 정하여졌거늘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환선길이 태조의 말과 얼굴빛이 태연한 것을 보고 매복한 군사가 있다고 여겨 부하들과 함께 달아나니, 태조의 호위병들이 구정까지 추격하여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환향식이 뒤에 이르러 일이 실패했음을 알고 역시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추적하여 죽였다.


태조 왕건의 심복이자 정예군을 거느리고 그를 숙위하는 마군장군 환선길의 반역 시도


고려사 > 권127 > 열전 권제40 > 반역 > 환선길 > 환선길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다

순군리 임춘길이란 자는 청주 사람으로, 청주 사람 배총규, 계천 사람인 강길·아차, 매곡 사람인 경종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고 청주로 도망치려 하였다. 복지겸이 이 사실을 알리니, 태조가 그들을 체포해 국문케 하였다. 모두 자복하여 아울러 수감하였으나, 배총규만은 모반이 누설되었음을 알고 도망하였다. 이에 그 일당을 모두 처형하려 하니, 청주인 현율이 말하기를, “경종의 누이는 매곡성주 공직의 처입니다. 매곡성은 매우 견고하여 공격하여 함락시키기 어렵고 또한 적의 땅과 가까우니 만약 경종을 처형하면 공직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용서하여 회유하는 것만 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따르려고 하였다. 마군대장군 염상이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경종은 일찍이 마군 기달에게 말하기를, ‘누이의 어린 아들이 지금 서울에 있으니,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소. 하물며 시국이 어지러워 아직 서로 만날 기약도 없으니 마땅히 기회를 엿보아 함께 청주로 도망하여 돌아갈 것이요.’라고 하였으니 경종의 음모가 지금 과연 증명된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크게 깨닫고 곧바로 그들의 처형을 명하였다.


또다른 반란 모의


고려사 > 권92 > 열전 권제5 > 제신 > 왕순식 > 왕순식

순식은 명주 사람이다. 본주-명주의 장군으로서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자, 태조가 걱정하였다. 시랑 권열이 아뢰기를,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아우를 훈계하는 것은 천리입니다. 왕순식의 아버지 허월이 지금 승려가 되어 내원에 있습니다. 그를 보내어 가서 타이르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태조가 따랐다. 왕순식이 마침내 맏아들 수원을 보내어 귀순 의사를 밝히니, 왕씨 성을 내렸고 토지와 집도 하사하였다. 또 아들 왕장명에게 병사 600명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숙위하게 하였다. 훗날 자제들과 함께 무리들을 인솔하여 내조하자 왕씨 성을 내렸고, 대광을 하사하였다. 왕장명에게는 렴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원보에 임명하였다. 소장 관경에게도 왕씨 성을 하사하고, 대승에 임명하였다.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았던 명주 장군 순식


이미 왕건의 쿠데타가 성공한 상황에서 제2, 제3의 쿠데타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거기다가 궁예가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살았던 상황이었기에 만약 명주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면 명주 장군 순식의 비호로 고려-태봉의 대립 국면까지 만들어질 수도 있었던 때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