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흥운동


고려사 > 권121 > 열전 권제34 > 충의 > 정의 > 정의가 서북면 최광수·필현보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다

음력 1217년 6월 미상

당시 최유공은 수탈하는 것을 즐겨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떠나 있었는데, 이 가운데 사졸 최광수는 출전을 수긍하지 않고 독기를 세워 군사를 불러 모은 후 되돌아서 서경으로 향하였다. 최유공은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김성은 술에 취해 고꾸라져 인사불성이었다. 최광수가 마침내 서경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흥복병마사 금오위 섭상장군이라 자칭하고 막료들을 임명하여 배치한 후 정예군을 모았다. 또 북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렸으며 큰일을 일으키기에 앞서 신사마다 기도를 올렸다. 정의는 평소 최광수와 같은 마을에 살아 서로 잘 알고 지냈으나 그 행동을 분하게 여겨 교위 김억·백유·필현보·신죽 등 10여 인을 거느리고 도끼를 소매 속에 감춘 채 최광수의 처소에 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그를 찍어 죽였다. 또한 그 당여 8인을 죽이고 나머지는 불문에 붙이니 서경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정의에게 단계를 뛰어넘어 섭중랑장으로 임명하여 내시에 소속시키고 의관과 안마를 내려 주었다. 김억과 백유에게는 별장 벼슬을 더하였으며 그 나머지에게도 상과 벼슬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정의는 거듭 승진하여 장군과 시랑을 거쳐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고구려흥복병마사 금오위 섭상장군 최광수



백제부흥운동


고려사 > 권99 > 열전 권제12 > 제신 > 최유청 > 최린

고종 때 나주부사가 되어 나갔는데 당시 원율 사람인 이연년이 스스로 백적도원수라 일컫고서 많은 사람들을 산림에 불러 모아 여러 주군을 공격하여 노략질하니 최린이 지휘사 김경손과 함께 그들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우부승선으로 뛰어올랐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참지정사가 되었다.


고려사 > 권103 > 열전 권제16 > 제신 > 김경손 > 김경손이 초적 이연년의 반란을 토벌하다

음력 1237년 미상

김경손은 고종 24년에 전라도지휘사가 되었다. 당시 초적 이연년 형제가 원율·담양 등 여러 군 무뢰배를 불러 모아 해양 등 주현을 치며 내려오다 김경손이 나주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나주성을 포위하였다. 적도들이 매우 많았는데 김경손이 성문에 올라가 그들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적이 비록 많지만 모두가 짚신을 신은 촌민일 뿐이다.”라고 하며 즉시 별초로 삼을 만한 자를 뽑으니 30여 인이 되었다. 부로를 모아 눈물을 흘리고 또 일러 말하기를, “이 고을은 어향이니 다른 고을처럼 적에게 항복할 수 없다.”라고 하니 부로가 모두 땅에 엎드려 울었다. 김경손이 출전을 독려했으나 좌우에서 말하기를, “금일의 사세가 군사는 적고 적은 많으니 청컨대 주군의 군사를 기다렸다가 오면 싸우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김경손이 노하여 그들을 질책하고는 가두에서 금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손수 잔을 두 번 올리면서 말하기를, “싸움에서 이기고 헌작을 마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개를 펼치고 나아가려 하니 좌우에서 진언하기를, “이같이 하면 적이 알아볼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자 김경손이 다시 그들을 꾸짖어 물러나게 하였다. 결국 문을 열고 나갔는데, 현문이 아직 내려지지 않자 수문하는 자를 불러 참하려 하니 곧바로 현문을 내렸다. 

이연년이 그 무리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지휘사는 바로 귀주에서 공을 세운 대장으로 인망이 매우 두텁다. 내가 마땅히 생포하여 도통으로 삼으려 하니 활을 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을까 우려하여 모두 궁시를 사용하지 않고 단병으로 싸웠다. 관병과 교전이 시작되자 이연년은 용맹을 믿고 곧바로 앞으로 나가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으려 하였다. 김경손이 칼을 빼들고 독전하니 별초가 모두 죽기로 싸워 이연년을 베고는 승세를 타고 쫓으니 적도가 크게 무너져 일방이 다시 안정될 수 있었다.


백적도원수 이연년



신라부흥운동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4 > 신종정효대왕 > 신종 5년 > 11월 > 반란을 모의한 경주인 배원우를 처형하다

음력 1202년 11월 미상

경주 사람들이 반란을 모의하고, 은밀히 낭장동정 배원우를 전 장군 석성주의 유배지인 고부군에 보내어 설득하기를, “고려의 왕업이 거의 다하였으니,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공을 주군으로 모시고 사평도를 경계로 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석성주가 기쁜 척하며 배원우를 집에 머물게 하고, 몰래 군수 유정에게 나아가 이를 알렸다. 유정이 배원우를 체포하여 안찰사에게 보내고 보고하였다. 그를 죽였다.


고려사 > 권100 > 열전 권제13 > 제신 > 정언진 > 정언진

음력 1202년 12월 미상

경상도안찰사 지자심이 아뢰기를, “경주의 적도들이 항복을 요청하였으니 반드시 군사를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충헌이 노하여 대장군 김척후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로, 형부시랑 전원균을 부사로, 대장군 최광의를 좌도사로, 병부시랑 이이를 부사로, 섭대장군 강순의를 우도사로, 지합문사 이유성을 부사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것을 서둘렀다. 적들이 이 말을 듣고 운문산과 울진·초전의 적들을 모아 3군으로 나누고는 스스로 정국병마라 부르면서, 주·군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김척후의 군대가 쇠약하여 싸우지 않자, 적들의 세력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4 > 신종정효대왕 > 신종 6년 > 4월 > 정언진이 계책을 내어 경주의 적괴 이비를 사로잡다

음력 1203년 4월 미상

여름 4월. 경주 적도의 도령인 이비 부자가 몰래 성황사에서 기도를 하였다. 박수무당이 그를 속여 말하기를, “도령께서 병사를 일으키시면 장차 신라를 부흥시키실 것이니, 저희 무리가 기뻐한 지 오래입니다. 오늘 다행히 뵙게 되니, 청하건대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집으로 초청하여 도착하였는데, 이비 부자가 술을 마시고 취하자 이들을 잡아 병마사 정언진에게 바쳤으니, 사실은 정언진의 술책이었다.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14 > 신종정효대왕 > 신종 7년 > 6월 > 경주와 안동의 읍격을 조정하다

음력 1204년 6월 미상

동경유수를 강등하여 지경주사로 삼고, 안동도호를 승격하여 대도호부로 삼고, 경주 관내의 주부군현·향·부곡은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또 경상도를 상진안동도로 고쳤다. 어떤 사람이 최충헌에게 말하기를, “동경은 옛날의 국도로, 실로 남방의 거진이니 강등하여 지관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최충헌이 말하기를, “동경 사람들이 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말을 지어내어 주군에 전하여 격문을 붙이고 반역을 모의하며 난을 선동하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안동은 도적들이 합동으로 공격하던 날에 한마음으로 방어하여 충의를 온전히 하였으니 권면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동경 사람들이 반란을 모의하고 전 장군 석성주를 주군으로 추대하고 신라를 부흥시켜 사평도를 경계로 하려 한 계획과 뒤이은 신라부흥운동


모두 13세기 초반에 일어났긴 했음. 최광수와 이연년은 각각 고구려 왕족, 백제 왕족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각자 병마사 섭상장군, 도원수를 칭했지만 석성주는 신라 왕들을 배출했던 석씨 집안이라서 주군으로 모시려 했던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