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24일 임진 7번째기사 1627년 명 천계 7년

상이 비국·양사 장관을 인견하여 이르기를,

"분조가 어느 곳에 가서 수레를 머무르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먼저 전주로 가서 양도를 수습해야 합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안주와 평양 두 성이 싸워보지도 않고 무너졌고 임진의 요해지를 이제 또 포기하려 하니 백성들이 ‘화친이 나라를 그르친다.’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세자는 강도로 들어가고 대가가 남쪽으로 거둥한다면 충신과 의사가 누가 왕을 위해 적과 싸우지 않겠습니까. 신은 본도의 호소의 분부를 받았으므로 이제 내려가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의기소침하지 마시고 삼군의 사기를 고무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사에 힘을 다하여 생사를 같이할 그런 사람이 본도에 있는가?"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우선 물러나 있으라. 세자가 장차 출발할 것이다."

하였다. 제신이 얼른 밖으로 나오자 분조의 요속과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어리니 잘 돌보아 인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명준이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에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야 백성이 이에 견고한 뜻이 있는 것인데 이서가 정예 부대를 모조리 이끌고 물러나 남한 산성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의도에서입니까. 이서 자신의 피난을 위한 계책으로서는 잘한 것인지 몰라도 국가를 위해 방어하는 방도로서는 잘못한 것입니다. 이서는 국가의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이제 이와 같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단지 분조의 일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날 세자가 출발하여 떠났는데, 정원과 시신들이 문 밖에 나가 전송하며 눈물을 머금고 흐느꼈으며 도로에서 쳐다보는 이들도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10일 신유 7번째기사 1645년 청 순치 2년

정묘 호란 때에는 거가가 강도로 행행하려 하면서 먼저 세자에게 분조를 두어 남쪽 지방을 진무하도록 명하고, 대신 이원익·신흠에게 세자를 보필하도록 하였다. 세자는 전주에 내려가 주둔하면서 무군사를 개설한 지 한 달 남짓 되어 전쟁이 끝나자, 군대를 파하고 강도로 들어가 부왕을 만나 뵙고서 부왕을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학식과 도량이 영명하고 의연하였다. 어린 나이로 군사들을 안무할 적에 이미 스스로 영지를 내려 지휘하되, 일체 대조의 명계를 준행해서 자신에게 진공되는 물품을 절감하고, 시종들을 엄격히 경계하여 오로지 폐단을 줄여 백성들을 여유 있게 해주기를 힘썼으며, 주현에 거듭 명령을 내려 농사철을 놓치지 말고 제때에 농사짓도록 하였다.

세자는 또 길을 가다가 진창길에 깔아놓은 볏짚을 보고 명령하기를 ‘군사를 일으킬 때에 이것으로 말을 먹일 것이니, 절대로 헤프게 쓰지 말라.’ 하였다. 또 주방에는 쇠고기를 금하고, 수락도 진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농우를 잡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시종하는 신하가 세자께 가교를 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중도에서 다시 청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오늘 내일이 바로 대가가 도성을 떠나시는 날인데, 어찌 감히 가교를 타고 앉았을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호남·호서 지방의 수신들이 세 고을의 군사 수천 명을 나누어 보내서 세자의 호위에 대비하자, 세자가 이르기를 ‘나는 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군사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속히 도성으로 들여 보내서 구원해야 한다.’ 하였다. 전주에 진영을 설치하고 머무를 때에 서쪽의 경보가 또 위급함을 알려오자, 대신이 영해로 옮겨갈 것을 의논하였으나, 세자는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호남 지방이 소요가 일 뻔하다가 다시 진정되었다. 그리하여 세자가 그곳을 철수하여 돌아오던 날에 호남 지방 백성들의 부로와 남녀들이 연도에 나와 송축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세자를 칭도하고 있다.


솔직히 병자호란 때도 이렇게 되었으면 많이 달라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