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8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 10년

적이 성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중관이 원손을 업고 나가 피했으며, 성에 있던 조사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 대군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얼마 뒤에 대병이 성을 포위하였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10일 신유 7번째기사 1645년 청 순치 2년

영주·금주의 전쟁 때에는 세자가 청나라로부터 종군하라는 협박을 받았는데, 세자가 때마침 사소한 질병이 있으므로 시종하는 신하가 주선하여 봉림 대군으로 대신하였다. 재차 종군할 때에는 세자가 대군 혼자서 수고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다른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굳이 자신이 갈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 군문에서 그만두게 하여 중지하였다.


효종실록 1권, 효종 대왕 행장

청나라 사람들이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 세자와 함께 동행하려고 하자 왕이 아문에 극력 말하여 자신이 대신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도 간절하고 측은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동하여 중지하였다. 그 뒤에도 번번이 자신이 가기를 청하였는데 소현 세자와 함께 간 경우도 두 번이나 되었다.


효종실록 1권, 효종 대왕 묘지문

서쪽으로 몽고의 경계에 갔고, 남쪽으로 산해관에 갔으며, 또 더 남쪽으로 금주위의 송산보에 이르러서는 제장들이 패배하여 항복하는 것을 보았다. 또 동쪽으로 철령위·개원위에 갔고, 또 동북쪽으로 여해부에 이르러서는 한 길이 넘는 두꺼운 얼음을 깨어 그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26세에 청나라에 있은 지 8년 만에 비로소 동쪽으로 돌아왔으나 몇 달이 못 되어 도로 연산에 들어가서 경읍이 잿더미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27세이던 을유년 연산에서 귀국했는데 전후 20여 년 동안 하늘이 옥성시키기 위해 겪게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소현세자도 봉림대군과 함께 명청전쟁에서 2번 종군했고 봉림대군은 좀 많이 참전한 듯


근데 첫번째 기록은 강화도 방어전에서 청군이 상륙하고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용사들을 모집하여 직접 출격하기까지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