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교고문이자 일본에 귀화한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1564-1620)


조선 통신사들이 머물던 숙소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방문코자 했으나 쓰시마 도주에 반발로 실패함



163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조선 통신사와 만남을 주선하려 했으나


히라도 상관이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하던 쓰시마 번의 특권을 나눠주고 싶지 않아 했기에 실패함


비변사에 전교하기를,


"호남(湖南)에 온 적의 배가 어떤 〈적의〉 배인지는 모르지만 1척도 잡지 못하였으니 나랏일을 알 만하다.


황 역관(黃譯官)을 보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피하기만 하려고 이러쿵저러쿵 논의만 하다가 시기를 놓쳐버렸다. 내가 아무리 날마다 하교하여 천만 번 말해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고 매번 ‘죽을 죄를 졌습니다.’라는 말로 책임을 때우려고만 하니 경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찌 이런 것이겠는가. 오늘의 나랏일이 비록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식이 부모의 병이 위독한 것을 보고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핑계대고 약을 쓰지 않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서쪽과 남쪽에서 들어오는 보고는 다 근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비변사에서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경들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후로는 나의 뜻을 잘 받들어 더 빨리 처리하여 나 혼자만 위에서 걱정하지 않도록 하라."

▲ 광해군일기[중초본] 179권, 광해 14년 7월 19일 계축 1번째기사 "호남에 나타난 외국 배를 잡지 못한 일로 비변사에게 전교하다"


한편, 1623년 4월 3일 네덜란드 공문서에 따르면 혼트(Hondt)호와 조선 군함간의 격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위에 광해군일기 1622년 7월 기사에 등장한 "호남에 나타난 외국 배"가 네덜란드 상선이라고 추정하고 있음


▲ 정두원의 시집, 호정집


이외에 명의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정두원(鄭斗源, 1581-?)이 인조에게


서양 선교사 로드리게스가 천문학과 역법에 능통한 인물이라고 소개하며 서양의 여러 문물을 전해주었고,


이에 인조는 정두원이 보낸 것들 중 대포에 크게 관심을 보이며 정두원의 자급(資級, 품계)을 높여주었다고 함




그러나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정권 안보와 세계관 유지를 위한 반청복명 의식과 함께, 새로운 상국인 청나라의 감시로 인해


당시 조선에서 서양과의 교류를 논하는 건 힘들었고, 조선 스스로도 대외관계를 선택할 운신의 폭이 좁았음


다만 시간이 흘러 대외정세가 안정되고 조선에 태도를 누그러뜨린 청의 대외 정책과 연행사를 통한 서학 접근성 확보는


19세기 전반부터 조선 지식인 계층 사이로 서양에 대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하는데, 그거는 나중에 시간나면 다뤄봄


참고문헌

- 김혜민, 19세기 전반 서양 異樣船의 출몰과 조선 조정의 대응, 진단학보 131,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