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이후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해 내부 문제를 통제하고, 준가르 등 외부 위협요소까지 제거하자


청은 조선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렸고, 동시에 연행사 파견을 통해 서학에 대한 접근성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지식 체계인 서학은 조선 지식인들의 견문을 넓혀주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일부는 중화 세계관에 의구심을 품기까지 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 에서


지금 중국이라는 것이 대지 가운데의 한 조각 땅에 불과하나 거기에다 하늘 전체에 있는 별을 가지고 배치하고 또 그 가운데에 있는 한 나라나 한 지방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가령 한 동이의 물에도 비치지 않는 별이 없는 것을 보아 이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지구의 전체 지도를 가지고 보는 것만 못하다. 북극이 중앙이라면 동양은 용(龍)이며 서양은 호(虎)다. 이렇게 배치하여 놓으면 중국은 조(鳥)요 땅 밑은 무(武)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 거주하는 데마다 해가 뜨는 곳을 동쪽, 해가 지는 곳을 서쪽이라 할 터이니 사방의 위치가 고정되지 못할 듯하다.

라 언설하기도 했으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의산문답」에서 '중화와 오랑캐는 하나다'(華夷一也)를 주장하는 등


지식인 개개인의 세계관 인식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에 전해진 서학서들은 대체로 명말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저술되었는데


이들은 서학의 우수성과 함께 그 성과가 천주교의 산물임을 강조해 상대를 감화시키는 선교 전략을 내세웠다.


때문에 서학서에 소개된 내용과 천주교 교리의 경계가 불투명했고,


이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반응을 두고 공서파(功西派)와 신서파(信西派)로 나뉘어졌다.


그럼에도 양측 모두 서학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안정복(安鼎福, 1721-1791)의 『순암선생문집』에 나온 다음의 내용은 그러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利氏(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와서 수십 종의 책을 지었는데, 천문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펴서 운행을 계산하여 역법(曆法)을 만든 우수함은 일찍이 중국에 없던 바이다. … 그러나 필경에는 자신의 교(敎)도 환망(幻妄)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내 생각으로는, 서국(西國)의 풍속이 급속히 변하면서 …부득이 천주경(天主經)의 가르침이 있게 되었던 것이니, 처음에는 중국의 『시서(詩書)』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설을 보태어서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며, 그 이후의 허다한 영이(靈異)의 자취는 저들이 이른바 마귀나 광인(誑人)의 소치에 불과한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안정복이 천주교를 중국의 학문이 서양의 풍속으로 변형된 사례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인식 체계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중국기원설'은 초기 이론 체계가 빈약했던 동도서기론자들 사이에서 서구 기술 수용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역시 나가사키의 번영을 주목하면서도


이를 서양과의 통교가 아닌, 강남과의 통상에 있다고 지적했고,


몇몇 지식인들 역시 강남과 통상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로 강남은 청의 對서양 교섭창구였다. 다만 지식인들이 서양을 교섭대상으로 지목하지 못한 것은


모든 교역을 청이 주재하고 있다고 여겼으며, 나아가 청과 서양의 교류를 조공책봉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서양은 중국에서 연원한 문물을 뛰어나게 발전시킨 낯선 타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 내에서 학문으로 연구되던 서학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앙이 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중국과 일본 역시 서양과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던 천주교 문제에 있어 포교를 엄금하는 것으로 대응했는데


서양과의 일체 관계도 없을 뿐더러, 서학 수용의 절실함도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에게 있어


천주교 문제는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1785년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을 기점으로


조선 내에서 서양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일소되었다.



가령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이 쓴 백과사전격의 유서,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는 마테오 리치를


충수류(蟲獸類, 벌레와 짐승)로 분류해 '스스로 암놈도 되고 수놈도 되는 짐승의 소생'으로 소개되었으며


1791년 진산 사건을 계기로 규장각에 소장된 서학서들이 모두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중국·일본에 비해 훨씬 늦은 시기에 천주교와 갈등하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불운하게도 조선이 서양을 향해 완강하게 등을 돌리던 이 때가 바로 서세동점의 서막이 열리고 있는 시기였다.



참고문헌

- 김혜민, 19세기 전반 서양 異樣船의 출몰과 조선 조정의 대응, 진단학보 131,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