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보통 반란이 일어나도 관부를 설치하고 별개의 조정을 따로 만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있어도 후삼국처럼 별개의 국가를 건국할 때 별개의 조정을 만들었는데

이 삼별초의 난 같은 경우에는 관부를 설치하고 별개의 조정을 만들어서 정통 고려 정부를 주장했음


고려사 > 권130 > 열전 권제43 > 반역 > 배중손 > 개경 환도에 반해하여 배중손이 삼별초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다

적들은 강화도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선박과 군함을 모아 공사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싣고서 남쪽으로 내려가니, 구포에서 항파강까지 고물과 뱃머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무려 1,000여 척이었다.


이들의 세력은 무려 1000여 척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음





삼별초 고려 조정의 구성을 보면


고려국왕 왕온-승화후

고려국왕자 왕환-수사도

정사 총괄 승선 정문감-직학->삼별초 세력에게 투항을 거부하고 자결

좌승선 유존혁-대장군

우승선 이신손-상서좌승

직책 불명 배중손-장군

직책 불명 노영희-야별초 지유

직책 불명 이보-수사공

직책 불명 안방열-판태사국사로 주모자가 됨

직책 불명 지계방-상장군

직책 불명 강위보-대장군

직책 불명의 중임 김지숙-장군

직책 불명 송숙-대장군

직책 불명 임굉-소경

직책 불명 김통정

직책 불명 이순공

직책 불명 조시적

등이었고


그 외에 이들에 합류하려한 반란 세력으로


밀성인 반란 세력

공국병마사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경기

일선현령 조천

등에


관노 반란 세력

숭겸

공덕

등이 있었음





삼별초 고려 조정이 일본에 보낸 국서로 이들의 입장을 볼 수 있는데


-위취자, 즉 몽골인들은 멀리 내다보는 생각을 하지 않음

-몽골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

-강화로 천도한 지 40여 년이 되어 진도로 천도하였음

-몽골이 고려를 부리고 있음

-우리 본조, 즉 고려가 삼한을 통합했으며, 사직을 안녕케 하면서 하늘의 때를 기다리고 있음

-흉악한 상소가 도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달라 하였음


또한 삼별초 고려 조정은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풍랑으로 표류된 자들을 호송하겠음

-김해부의 병사 20여 명을 먼저 일본국으로 보내겠음

-수만의 말 탄 군사를 요청함

-예물을 드리겠음

-귀조, 즉 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문하길 바람


이라고 하며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했음





이 삼별초 고려 조정에 대한 고려와 원나라의 입장을 보면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 > 원사 > 『원사』권208 열전95 > 임연이 사망하고 그 무리 배중손 등이 반란을 일으키다

음력 1270년 4월 미상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임연은 이미 사망하였고, 아들 임유무가 영공의 지위를 세습하였습니다... 임연의 당여 배중손 등이 다시 남은 무리를 모아서 왕식-고려국왕 원종의 서족인 승화를 왕으로 삼고 진도로 숨어들어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원고려기사 > 세조황제 > 1270년 > 왕식이 몽골에 승화공의 반란을 알리다

음력 1270년 6월 1일

지원 7년 6월 1일, 왕식-고려국왕 원종이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앞서 천조로부터 도망쳐 온 한 익군이 고려의 두 익군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대개 왕식의 일족인 승화공이 삼별초 군대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 권27 > 세가 권제27 > 원종 12년 > 5월 > 진도토벌군이 적을 대파하자 김통정이 잔당을 이끌고 탐라로 들어가다

음력 1271년 5월 15일 정축,
양력 1271년 6월 23일

정축 김방경과 흔도, 홍차구, 왕희, 왕옹 등이 3군을 거느리고 진도를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고, 가짜왕 승화후 왕온을 죽였다. 적장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탐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고려사 > 권27 > 세가 권제27 > 원종 12년 > 3월 > 몽고에 일본과의 관계 등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알리다

음력 1271년 3월 미상

이 달에 전중감 곽여필을 몽고에 파견하였는데, 진정표의 대략적인 내용에서 이르기를,
“...지금 역적이 날로 기승을 부려 경상도 김주와 밀성까지 쳐들어왔는데, 거기에 더하여 남해·창선·거제·합포·진도 등지를 약탈하고 심지어 연해의 부락까지 모조리 약탈하였기 때문에 백성에게서 거두어 수요량에 대기가 어렵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부는 모두 육로로 수송하지 못하고 반드시 수운으로 해야 하는데, 지금 역적이 진도에 웅거하고 있고 여기는 바로 수로 교통의 목에 해당하여 왕래하는 배가 지나갈 수가 없으니 군량과 소 먹이, 농사의 종자를 아무리 거둔다고 해도 수송할 길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 권27 > 세가 권제27 > 원종 12년 > 4월 > 몽고 황제가 진도 인근지역의 병력으로 토벌을 일찍 끝내라고 지시하다

음력 1271년 4월 24일 정사,
양력 1271년 6월 3일

중서성에서 문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진도의 적당이 관리와 백성을 노략질하고 30여 개의 섬을 함락하여 그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거짓으로 어디로 간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투항하기를 꺼리는 것은 분명하니, 군대를 합하고 속히 공격하여 큰 해를 방지해야 합니다.

만일 더위와 장마철이 닥치면 함락시키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현재 진도 부근에 있는 병선 260척 외에 고려에서 병선 140척을 더 동원하고 다시 군대를 증강하여 힘을 합해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제반 군량과 군수 물자는 관리들에게 맡겨 힘껏 공급하도록 하고 조금도 착오 없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승화후 왕온은 가짜 왕, 삼별초 세력은 역적, 적당 등 당연하다시피 반란 세력으로 여겼음

다만 고려 측 기록에서는 왕온이 승화후로 나오고 삼별초의 핍박을 받아 왕이 되었다고 하여 억지로 받았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원나라 측 기록에서는 왕온이 승화공으로 나오고, 고려국왕 원종이 사람을 보내어 원나라에 승화공이 삼별초 군대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하는 등의 차이가 있긴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