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검색-익세보)

 

자료 소개 / 중국 신문 [익세보]에 실린 3.1운동 관련 보도

 

이 글은 2018년 3월 통권 711호 기독교사상 - 특집 - 신문, 재판, 소설 속의 3.1운동

에서 가져왔습니다. 베껴쓰기+요약입니다. 한자는 생략하겠습니다. 문제시 삭제해도 OK.

 

3/27에서 홀수는 그대로 타자를 쳤고ㅡ 짝수는 내키는대로 타자를 침

3/28은 그냥 내가 내키는대로...

(기독교 사상에서는 3월 27일과 3월 28일 익세보를 실었습니다.)

 

* '기독교 사상'이라는 점, 그것도 옛날 중국 신문을 대충 소개한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길 바람

그리고 길어요. 3.1절을 맞아 궁금하고 심심한 분들이 있다면 읽을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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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중국 신문 익세보...(천주교 천진교구 부주교인 뇌명원이 창간한 일간지로 3.1운동의 실상을 전달)...

이 자료에 등장하는 김선두는 평양 서문밖교회 목사...(중략)... 강규찬은 평양 산정현교회(장로교) 담임목사로...(중략)... 

김태국 교수(연변대)가 번역한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간행한 [중국신문한국독립운동기사집 3권](2015), 76-85쪽에 실려있다.

- 편집자 주<*기독교사상 편집자>

 

 

1919년 3월 27일 제3판

 

꺽일 줄 모르고 타오르는 고려의 독립운동

 

 <01> 서울. 15일 각 상점은 여전히 휴업상태이다. 우편물 전달도 지극히 어렵다. 이렇게 보면 상인들은 독립운동에 열중할 뿐 이익은 전혀 따지지 않는다. 이런 한국 민족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

 

 <02 요약: 조선팔도 15개의 다양한 지명이 나옴. 일본군이 총검으로 시위대를 탄압함. 300여 명이 사망하고 600여명이 중상을 입었고, 500명이 체포되었다함.>

 

 <03> 만주, 간도 등 지역의 한인 약 5,000-6000명이 집회를 가지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시위대는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환호하였다. 일본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지만 시위대를 해산시키지 못했다. 14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했다.

 

 <04 요약: 15일 오후 1시에 서울 종로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운동 연설에 열변을 토함. 대부분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잔인한 심문을 받는다함>

 

 <05>  구성, 안악, 수안, 청진, 북청, 철원, 진주 등 각 군에서 800-900명 혹은 2,000-3,000명이 모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탄압하였다. 밤중에도 엄중 경계중이라 한다. 한국인 사망자가 100여 명이고 중상자가 300여 명이다. 체포된 자들은 잔인한 심문을 당했다.

 

 <06 요약: 압제를 당해도 독립운동 열기는 치열하게 타오름, 일본인의 횡포함과 잔인함 언급>

 

 <07> 17일 한국에서 온 편지. 15일 가평군에서 약 300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환호하였다.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해산시켰다.

 

 <08 요약: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독립 선포함. 이동휘를 파견하여 미주의 이승만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청원하겠다는 계획. 동경에서 인쇄한 독립 격문을 밀반입>

 

 <09> 서울. 지방법원 검사 몇 명은 지방법원 서기 몇 명과 경찰총감부 순사 등 70명이 2대로 나뉘어 출동하였다. 1대는 미국 세브란스 병원과 가택을 수색하였다. 다른 1대는 정동에 있는 미국인 관장하는 교회와 가택을 수색하였다. 이곳은 이번 한인의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가 있어 수색에 나섰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폭행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세상의 공정한 평가가 있을 것이다.

 

 <10 요약: 남부지역의 민중과 학생이 독립운동 전개, 일본은 보병 제80연대를 주둔시켜 탄압. 경찰, 헌병 뿐만 아니라 보병을 파견하여 시위대를 진압한 일을 비판>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한 5대 강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자국의 평화도 유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세계의 평화를 주도할 수 있겠는가.

 

 <11> 평양. 경찰서는 매일 출동하여 민중을 살해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한인이 700여 명에 달한다. 평양경찰서에 갇힌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평안도에서 갇힌 사람은 30,000명을 넘어설 것이다.

 

 <12 요약: 강화회의 계기로 맨주먹으로 총칼에 맞서며 독립 애원, 그러나 살육을 당함. 그럼에도 독립운동은 더욱 격렬히 전개. 일본의 아둔함이 따를 수 없음.> 

 

 <13> 경성. 17일 600여 명이 모여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환호하였다. 일본 경찰과 군인이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둘렀다. 10여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당했다.

 

 <14 요약: 명천군(*함북) 화대에서 16일 독립운동 전개. 군경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정확한 숫자가 확인되지 않음>

 

 <15> 의주, 가평, 신천 각 군에서 16일 오후 400-500명 혹은 1,000-2,000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환호하였다. 일본 경찰과 군인이 강경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해산되지 않았다.

 

 <16 요약: 18일 서울에서 온 편지, 여러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는데, 일본 측 대촌 서기장은 장사 시작을 권유하나 상인들은 대답하기를 이번에 검거된 사람들이 석방된 후에야 장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대답. 서기장은 당국에 보고했지만 승인 없음. 회의는 아무 결과 없이 끝남>

 

 <17> 길주. 15일 약 2,500여명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일본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둘렀지만 해산시키지 못했다.

 

 <18 요약: 마산에서는 '이태왕이 일본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내용으로 연설이 있음. 사람들은 땅을 치며 통탄. 경찰과 헌병이 해산시키려 하나 소용이 없었음.>

 

 <19> 17일 봉천 일본 총영사관의 전보. 최근에 간도에서 한인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500-600명이 무기를 지니고 두만강 연안에 집결하여 있다.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파견하여 그들의 공격을 막으려고 한다.

 

 <20 요약: 흥원과 대전에서 수백 명씩 모여 활동 전개. 경찰과 헌병이 시위대를 공격하지만 해산시키지 못함>

 

 <21> 친구 한 사람이 편지를 보내왔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태왕의 장례식을 거행할 당시 한국의 국민, 신사, 학생, 부녀 등이 하나같이 일어나 집회를 가졌다. 한국 독립단의 대회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사회를 맡은 목사 김선두가 대중을 향해 경고하기를, "만약 여러분이 열심히 선한 일만 하면 누가 감히 여러분을 해코지 하겠습니까. 정의를 위하여 수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복된 것입니다. 남들의 위압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무질서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면, 누군가 여러분에게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 물어오면, 준비된 마음으로 온화한 태도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로인해 비방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하여도 기독교인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정의로 말미암아 수난을 당한다고 하면, 정녕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여 수난을 당한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진리만 이야기할 뿐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양심에 따라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함이 나를 위하여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나는 평생 하나의 걱정밖에 없습니다. 나의 피붙이인 형제자매가 망국민이 된 것을 통탄할 뿐입니다."

 

* 3월 27일 끝. 3월 28일은 베껴쓰기보다는 대강을 요약하겠으나 내용을 많이 넣겠음.

이어서

 

 


(구글 검색-좌: 김선두, 우: 강규찬)

 

1919년 3월 28일 제3판

 

꺽일 줄 모르고 타오르는 고려의 독립운동

 

<01>: 정일선 장로의 독립선언서 낭독. 시위대 만세를 외침. 이어 강규찬 목사의 연설.

 

<02-04>: 강규찬 목사의 연설: 약육강식, 강권만이 난무하는 시대, 하나님의 은총으로 전쟁이 끝나고 정의와 인도가 뿌리를 내릴 기회가 생김.

강화회의가 개최되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할 수 있게 되었고, 폭력을 비로소 제지할 수 있게 되었음. 연설 계속. 동방의 문화민족인 우리가 압제를 10년 째 받고 있음. 1919년 3월 1일은 한국이 독립을 선포한 날이고, 2000만 동포과 자자손손은 이 날을 노래와 춤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에 보답할까 고민해야함.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여 자자손손의 생존을 도모하는 길이 있음. 구차하게 한순간의 삶을 도모하지 않길 바람. 자유를 찾다가 희생되는 것이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백 배 낫다고 함.

 

-동포 여러분, 모두 힘을 합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관철시켜 하루 빨리 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죽음도 마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05-06>: 만세 삼창 소리. 감격과 울분. 박수 소리가 퍼져나감. 학생들이 뛰쳐나와 집집마다 선언서 배포, 상점들이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은 경찰 기관 앞에 가서 만세를 환호함. 독립연설이 계속 됨. 그날 밤에도 군악을 울리면서 시위를 단행했는데, 행동은 질서가 있었음. 일본은 '음흉한' 궤계로 수비병과 소방대를 파견하여 시위대를 공격함. 사상자 발생. 그러나 독립운동 열기는 식을 줄을 모름

 

 <07>: 시위대 수령과 회원들이 당일에 다수 체포. 이튿날 일요일. 군대가 파견되어 예배당 봉쇄. 거리에서 몰려다니는 한인들을 보면 군인들이 채찍을 휘두르고 폭언을 퍼부음. 몸수색하여 성경이 나오면 찢어버림. 3일째, 군대를 파견하여 숭실학교와 운동장 주변을 차지. 총검을 휘두르며 집회 시위자들을 공격함. 시위대는 해산되지 않았고, 계속하여 만세삼창을 부름. 학생이나 여성, 소학생들도 공격당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 대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댐.

 

 <08>: 일본군의 교통로 차단 및 통행 금지. 녹아도 출신 소방대는 군복을 입고 쇠갈고리를 들고 수많은 한인들을 살해함. 일본 민족이 가진  흉악하고 교활한 기질을 비난하고 소방대의 잔인함을 비난함. 사상자와 검거자는 파악이 되지 않음. 한편, 한인들을 보며 '민족자유'에 매진한다고 칭찬함. 기록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함.

- 기자의 후손들은 기필코 나라를 되찾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와우, 기자조선)

 

 <09-11: 조선 여학생의 호소>

 

 [자림보]의 보도에 따르면, 여학생이 윌슨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 관련 인산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북경 주재원이 받았다 함. 영문 번역 편지를 다시 중국어로 옮겨 보면 아래와 같음.

 

 10: 정의와 인권 신장에 앞장서고 있는 파리평화회의 참석자 여러분! 하느님 앞에서 한국의 섬약한 여자들은 여러분들께 간곡한 부탁을 드립니다. 아녀자로 불행하게 당한 수치와 모욕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한테 원조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향해 통탄할 뿐이었습니다. 지금 각지의 인민들이 모두 자유를 요구한다 들었습니다.(*민족자결주의)...(길어서 중략)...

 

 독립을 호소함. 10년 세월동안 공리가 신장되지 않고, 인도가 없다고 호소했음. 그러나, 도리어 구타, 체포, 투옥, 총검, 가옥 파괴, 예배 금지, 검문을 당하고 있음. 기독교인으로 판명되면 곤봉과 주먹질을 당하고 사람이 피살됨. 오직 자유와 공리를 요구했을 뿐이라고 주장. 참석자들에게 한국의 독립 승인을 부탁함.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 받아서 우리들의 고통을 애통하게 여겨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함. 

 

 11: 나이가 어림+유치+틀린 내용이 있음. 그러나 권력이 없고, 억울함 호소할 곳조차 없음.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여러분도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사 기도를 올릴 뿐임.

 

- 그리고 우리들이 끝까지 일본의 협박에 저항하지 못하고 핍박에 못 이겨 '한일합병'을 청구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된 것은 절대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일본의 간교한 계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님이여, 우리들은 당신을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독립선언을 귀담아 들어 세계 각국에 알려주십사 간곡하게 기도드립니다. 1919년 3월 10일 한국 여학생 삼가 올립니다.

 


 

대한민국 할아버지는 자애로운 윌슨 대통령이고, 아버지는 위대한 갓 해리 트루먼 대통령님이라는것이 역사학계의 정설.

 

 <12-25> 서울 선교사의 대규모 회의

 

 12: 북경 로이터사 27일 소식. 한국 내무부 부장 우좌미승부(조선총독부 내무장관) 씨가 3월 9일 선교사를 불러 회의를 소집함.

 참여 선교사로는 스미스(Herron Smith), 샤록스(A.M. Sharrocks), 의사 밀러(Miller), 의사 하디(Hardie), 의사 노블(Noble), 의사 게일(Gale), 의사 애비슨(Avison), 의사 번하이슬(Bernheisel) 씨 등이 참석.

 

 13: 우좌미승부의 발언

- 여러 선교사들이 이번 행동에 대하여 미리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동하였다는 소문은 선교사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이를 반박할 것이라 하였다. 그는 이번 변란의 원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정부의 행정에 대하여 한인들 사이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들이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큰 공감을 받았다. 어느 한인이 윌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문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윌슨 대통령이 답하기를 한국의 상황이 안정적이고 무사하면 평화회의에서 토론할 사안이 못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또 묻기를 만약 한국 내부가 안정되지 못하고 한인들이 혁명을 발동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니 윌슨 대통령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되면 한국 사건에 대하여 평화회의에서 접수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우좌미승부 씨는 외부에 나돌고 있는 여러 가지 소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14: 우좌미승부의 발언

-봉양에서 한국의 독립이 이미 승인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인들은 이것을 그대로 믿었다. 이것이 변란의 원인이 되었다. 천도교는 하나의 정치 조직이다. 정부는 종래로 종교단체로 보지 않고 엄격한 감시를 하였다. 기독교 선교사 가운데 일부가 그들의 기만에 넘어가서 이번 운동에 참가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무력적인 폭동에 가담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천도교 신자들은 이러한 훈령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당한 억울함이다.

 

 15: 선교사 의견

-샤록스 의사: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 교인이 화합하여 예비 회의를 개최했었다. 기독교인들은 독일식이 아닌 영국식 통치 방법을 주장했다카고, 

천도교인들은 완전 독립을 주장했다카더라. 최종 결의하기를 폭력만 사용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자들도 운동에 가담하겠다고 들었다.

 

 16: 선교사 의견

-게일 의사: 한인들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한일 관계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한인들은 일본 경찰을 너무 무서워하고 있다. 민족이 다른 이상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17: 선교사 의견

-노블 의사: 만약 정부 행정 방침이 한인들에게 희망을 준다면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인들이 모든 희망을 잃었다. 유일한 출로는 일본인과 분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18: 우좌미승부

-일본 유학생이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부는 지금 방법을 강구하여 정책을 개선하려고 있다. 한인을 멸시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19: 선교사 의견

-밀러 의사: 한인들은 납세의 의무만 있을 뿐 발언권이 없는 것이 부당하다.

 

 20: 선교사 의견

-하디 의사: 한인들은 기회를 보아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려고 한다. 이번 운동은 교회와 정부에서 한인들에게 실시한 교육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자각심의 발로이다.

 

 21: 선교사 의견

-애비슨 의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각자 발전한다. 서로 돕는 관계이니 힘이 점차 커진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도 이와 비슷해야 한다. 나는 한인들에게 청원서 한 부를 작성하여 정부에 올리라고 권한 적이 있다. 한인들은 나의 말에 따라 청원 조건을 적어 나한테 주었다. 한인들이 바라는 것은 한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한국어를 보존하고 모든 서적을 일본어로 읽지 말고 초보적인 자치를 실시하는 것이다.

 

 22: 선교사 의견

-번하이슬 선교사: 희망 X, 언론의 자유 X, 체포O, 투옥 O,

봉양 어느 학교 문학회는 정부에 의하여 해산함. 매년 개최하던 변론회도 금지. 참석자 전원 투옥O, 다시는 학교 다니지 못 하게 되었음.

강연에는 위법적인 내용 X -> 그러나 현장 투입 경찰이 사건을 부풀려 상부에 보고했음 -> 이런 사건에 대한 진실된 고소는 전혀 접수가 불가능함.

이러한 사건들이 학생들의 기개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하다. 반대로 정부를 반대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23: 선교사 의견

-번하이슬 선교사: 종교계의 제한 -> 불평불만 많음.

최근 아침 성경 독서회에서 교회 사정을 비탄하고 중흥을 기도함 -> 정탐이 경찰에 고발 -> 행정권력 회복이나 국정독립 회복을 기도한 혐의로 기소됨

모두 석방되었으나 한 사람만 구금된 지 몇 주일 만에 법정 심문에 넘겨졌다. 사경반에 참석하는 자가 1,000여 명에 달한다.

 

 24: 선교사 의견

-번하이슬 선교사: 모두가 이 사람처럼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후에 각 지역에 내려가서 수만 명에게 이번 사건에 대하여 알릴 것이다. 모두 불평을 품고 정부에 반대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부흥을 기도하지 않았어도 체포되었다. 한인들은 정부가 토지를 약탈한 일을 두고 강렬한 악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한인들은 수백 년 동안 황실의 토지를 경작하여 왔다. 그런데 수차에 걸쳐 박탈당하고 정부는 이를 새로 이주한 일본인들에게 경작하도록 하였다. 수많은 한인들이 악감정을 가지게 되고, 정부를 원망하게 되었다. 땅을 잃은 한인들은 북으로(*만주로 생각됨) 이주길에 올랐다.

 

 25: 회의 종료

회의가 끝나면서 우좌미승부 씨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여러 선교사들이 만약 어떤 제안이 있으면 수시로 제출하여 달라고 하였다. 자신은 수시로 수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회의 참석자들이 한인들이 바라는 바를 정부에 제기하여도 정부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물었다. 우좌미승부 씨는 환영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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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슨 선교사: 제중원->세브란스)

 

들어본 사람이 이승만, 이동휘, 윌슨, 애비슨 4명밖에 없네.

헉헉. 베껴쓰기지만, 힘드네. 글자포인트는 16으로 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