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만두스물입니다. 탈사챈-탈남라 했다가 1달도 안 되서 또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전자신문바가 생겼대요? 돈 많이 버는 사람에겐 축하를, 유입이 줄어 아쉬운 분에겐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우절 랜덤채팅이 신기합니다.)

역덕 분들에게 역사 자료나 소개 하려고 합니다. 그저 '띠끌'만한 흥미라도 일으키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탈퇴한) 만두스물 대신 비가입자 '볼로네제'라는 명칭을 쓰겠습니다.

 

백제부흥운동은 꺼무위키에도 있는 문서죠. 신채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백제 부흥입니다..

 

단재 신채호



(구글 이미지 '신채호' 검색 중 가져옴)

 

워낙 유명한 사람이고 아마 여기 기웃대는 분들이 들어봤을 확률 99%라고 생각이 드네요.

저서로 조선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 영웅들의 일대기가 있죠. (이순신, 을지문덕, 연개소문, 그리고 이태리건국삼걸전 중국판 번역)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로 '아와 비아의 투쟁' '조선사일천년래대사건(묘청의 난)' 중고생들이 암기하는 분이죠. 또 김원봉에게 의열단선언 썼다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조선 상고사, 그 중에서도 망국 백제의 부흥운동에 관한 내용을 가져다가 발췌해 쓰겠습니다. 

한자는 생략합니다. 그리고 오타 생기면 생기는 것이지 뭐. 꼬우면... 아시죠? 구매하거나 대출해서 읽으세요. 

- 조선상고사, 옮긴이 박기봉, 펴낸 곳 비봉출판사, 초판 5쇄 2007년 4월 10일 책을 가지고 쓰겠습니다. -

 

 

제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 5장 백제 의병의 봉기

-부여복신의 약사-

1. 의자왕이 포로가 된 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솝울(한자: 소부리)]이 이미 적병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붙잡히자, 고관과 귀인들은 거의 임자, 충상 등 나라를 팔아먹은 자의 도당이었으므로, 모두 다 그들이 지키던 성읍을 들어 적국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성충의 잔당으로 몰려서 관직에서 쫓겨났던 구신들과 초야의 의사들은 망국의 화를 구하기 위하여 각처에서 봉기 하였다.

 이같이 열렬한 [다물]운동의 의사들은, 신라의 사가들이 이를 잔적이라고 배척하여 그 사적을 삭제해버리고 그 성명을 매몰시켜 버렸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냐.

 

 이에 신라본기, 김유신전, <해상잡록>, <당서>, <일본서기> 등 각 책을 참조하여 보면, 당시 백제의 의병이 일어나던 지방은 대략 세 곳이니, (갑)은 백제 남부의 동북(동북: 지금의 전라도 동북 -원주)의 금산 내지 진안 등지이며, (을)은 백제 백제 서부의 서반(서반: 지금의 충청도 서반 -원주)의 대흥, 흥주 내지 임천 등지이며, (병)은 백제 중부(붕주: 지금의 충청남도 끝 -원주)의 연기 등지이니, 이제 3파의 전말을 간략히 서술하여 백제 말년의 혈전사의 한 단면을 보이고자 한다.

 

2. 패망한 중-남 양부 의병과 굳게 지킨 서부 의병

 

 서부 의병장 부여복신은 무왕의 조카로서, 일찍이 고구려와 당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계의 인재로 이름이 났었다. 후에 서부은솔(*16관등의 하나로서 제3품)이 되어 임존성을 견고하게 수리하며, 성 안의 창고에 양곡과 사료를 비축하는 외에 통주(통주: 통대나무 기둥-옮긴이)를 세워 그 속에 싸라기를 감추어 놓아 후일에 있을지도 모를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간신 임자의 참소를 당하여 그 직책에서 쫓겨났는데, 군사들과 인민들이 다 울고 눈물을 흘리며 차마 보내지 못하였다.

 

 그 후 당나라 군사들이 [솝울]과 상경 [곰나루]를 함락시켜 왕이 붙들리자,(*사비성과 웅진성을 뜻함) 성 안의 군사들이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현직 은솔을 쫓아내고 복신을 추대하여 은솔을 삼고 버티고 지켰는데, 구 좌평 자진(자진: <당서>에는 도침이라 하였음-원주) 주류성(주류성: 김유신전의 두솔성이니, 지금의 연기의 원수산이 아닌가 한다.-원주)을, 구 좌평 정무는 두시이(두시이: 지금의 무주 남쪽이니, 신라의 이산현-원주)를 습격하여 차지하고 군사를 합쳐 [곰나루]를 다물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복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힘을 합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복신이 말하였다.

 

 "이제 적의 대병이 우리의 두 도성과 각 요해처를 빼앗아 차지하고 우리의 군수물자와 무기를 몰수하였는데, 우리가 초야에서 흩어진 병졸들과 양민들을 불러 모아 죽창과 몽둥이로 저 활과 창검을 가진 자들을 쳐들어가려 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패배할 일이다. 우리 의병이 패하여 망하면 백제의 운명은 그만이다. 이제 당이 10여 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오는데, 그들의 양식은, (1) 신라로부터의 공급과, (2) 우리 국민에게서 약탈한 것에 의존할 뿐이다. 그러나 신라는 해마다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가 텅텅 비어 장기간 공급할 수 없을 것이며, 민간의 약탈로는 수많은 군사들의 식량을 충분히 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우리 백성들의 반감을 쌓아서 의병의 수를 늘릴 뿐이다.

 당나라 사람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불과 며칠 안에 반드시 1, 2만의 수비병만 남겨두고 그 대병은 돌아갈 것이니, 우리가 이제 다만 험준한 요해지의 성읍을 굳게 지키고 있다가 그때를 틈타 저들의 수비병을 격파하고, 조상 전래의 왕업을 되찾을 터이니, 어찌 요행한 승리를 바라겠는가."

 

고 하였으나, 정무 등이 듣지 않고 [곰나루]성 동남의 진현성을 쳐서 붙잡혀 있는 의자왕 이하 대신들과 장사들을 빼앗으려 하다가 패하여 정무는 두시성으로, 자진은 주류성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버티고 있으면서 지켰다.

 

 그러나 얼마 후 당이 [곰나루]를 웅진도독부라 칭하여 당의 장수 유인원은 당나라 병사 1만으로, 신라 왕자 인태는 신라 병사 7천으로 공동 방수케 하고, 기타 각 중요한 성읍에다 모두 양국의 군사 약간씩을 배치하고, 각지의 의병들은 신라 태종에게 그 토평 책임을 맡기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9월 3이레 돌아갔다.

 이에 자진과 복신이 병사를 합하여 [곰나루]성을 치려고 할 때, 복신이 말하기를 "우리의 군사가 패한 뒤이므로, 한 차례의 대첩이 없으면 인심을 진작시킬 수 없다. 그러나 [곰나루]성은 지세가 험준하여 쳐서 빼앗기가 몹시 어려우니, 차라리 정예병을 뽑아 신라병의 귀로를 공격하여 물리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진이 또 듣지 않고, 곧 많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성의 동남에 있는 진현성과 왕흥사 고개 마루의 성채를 깨뜨려 부수어 군수물자와 무기를 다수 빼앗고 [곰나루]성의 사방에 4, 5개의 보루를 세워 신라의 군량 운반 길을 차단하니, 일시에 의병의 성세가 크게 떨쳐 남부 20여 성이 다 이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신라 태종이 태자 법민, 각간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여례성을 치자 진무가 출전하였다가 싸움에 패하여 죽고, 진현성의 의병도 신라병의 습격을 받아 1천5백 명의 전사자가 나오고, 왕흥사 고개 마루의 성채를 지키던 의병도 7백 명이 전사하였다.

 신라병이 이에 임존성을 치자, 복신의 방어가 주도면밀하여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군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므로 11월 1일에 회군하였다.

 

3. 싸울 때마다 대승한 부여복신

 

  다음해 2월에 부여복신이 강서의 흩어진 사졸들을 모집하여 강을 건너가서 진현성을 회복하였더니, 당의 장수(웅진도독 유인원-원주)가 정예병 1천 명을 보내어 싸우러 달려왔다. 이들을 복신이 중간에서 저들의 불의(*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판, 의외)를 틈타 습격하여 그 1천명 중에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유인원이 자꾸 사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자, 신라 태종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으로,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으로, 무훌, 옥천 등을 남천주대감으로,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 구원하러 보냈다.

 3월 5일에 그 선봉대가 두량윤성(두량윤성: 지금의 정산-원주)에 이르러 진지를 시찰할 때, 복신이 저들의 대오가 정돈되어 있지 못함을 보고 갑자기 나가서 급히 공격하여 이들을 전멸시키고, 그 군사 무기를 탈취하여 목봉을 대신하고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후에 신라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여 공격한 지 36일에 사상자만 많이 나고 성을 빼앗지 못하여 돌아갔다.

 이에 복신이 사방의 의병들을 지휘하여 좌우로 충격하여 다수의 장종들을 베어 죽이고 군수물자와 무기들을 전부 탈취하고 계속 진격하였다. 가소천(가소천: 지금의 OO강-원주, *정말 책에 OO로 나옴)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구원병으로 보낸 김흠순의 군사와 싸워서 크게 이기니, 흠순 등은 단기로 도주하여 신라병이 다시는 출전하지 못하였다.

 

 복신이 이에 돌아가선 왕의 아들 풍을 맞이해 와서 왕을 삼고, [곰나루]성을 포위하여 신라로부터의 양식 운반 길을 끊으니, 복신의 위명이 이에 천하에 진동하였다. 그러자 백제 각 성읍이 다 호응하여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들을 베어죽이고 복신을 따랐다. 고구려의 남생은 구원병을 보내어 북한산성(북한산성: 다음 장 참조-원주)을 쳐서 멀리서 복신을 성원하였으며, 일본은 화살 10만여 개를 보내서 군용을 도와주었다.

 


(구글 '부여복신' 이미지 검색)

 

제6장 고구려의 당병 격퇴, 백제 의병의 전성

 

1.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내정 -> (*백제 중심)

(* 당과 고구려사이엔 50년대 중반부터 계속 소규모 국지전이 벌어집니다. 나아가 제2차 고당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서력 657년에 죽었다는 입장입니다.)

...

 백제가 망한 사실은 이미 앞에서 간단히 설명하였거니와, 백제가 망할 때에 남생이 백제에 구원병을 보내지 못한 것은 매우 큰 실책이다. 그리고 백제가 망한 뒤에도 당나라 군사들이 이미 돌아가고 의병이 봉기하는 때에, 고구려가 수만 명의 병마를 보내어 [곰나루], [솝울(소부리)] 등지로 곧바로 나가서 복신, 자진 등과 연합하여 혈전을 벌였더라면 백제는 다시 중흥할 수 있었을 것이며, 백제가 중흥하면 충분히 신라를 견제하여 당나라 병사들에 대한 군량 공급을 불가능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신채호 선생 의견에 감히 한마디 보태겠습니다. 고구려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수나라 때부터 시작해서 국력이 소진되었고, 계속 당이 국지전을 벌여왔기 때문에 구원군을 편성할 여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긴 아쉬운 대목입니다만...)

 

 그리고 신라의 군량 공급이 없으면, 비록 고구려에 연개소문이나 양만춘 같은 영웅들이 없을지라도, 당나라 병사들이 평양까지 쳐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며, 설령 침입해 들어가더라도 수 양제의 장졸들처럼 패배하여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먼저 백제가 망하는 것을 구해야만 하였는데, 이제 역사책으로 보건대, 신-당 양국의 국사들이 미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뒤에 소수의 군사들을 보내어 칠중성(지금의 적성-원주)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는 퇴각해 돌아갔다. 그리고 부여복신이 기병하여 백제 전국을 거의 회복한 뒤에도 겨우 수천 명의 지원군을 보내어 신라인들(남여 합하여 겨우 2천 7백여명-원주)이 지키고 있는 외따로 떨어진 성인 북한산성을 쳤으나 빼앗지 못하고 패하여 물러났다.

 그 외에는 백제를 지원하여 구해 준 거동이 없었으니, 남생은 후일에 매국의 죄를 짓기 전에 이미 나라를 잘못되게 한 죄도 적지 않다. 이 같은 용렬한 자식 남생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죽은 연개소문도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

 

2. 평양의 당병과 웅진 신라병의 대패 -> (*백제 중심)

...

 이때 신라의 태종(태종: 김춘추)이 죽어서 상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왕, 곧 중종 문무왕이 김유신, 김인문, 김량도 등 9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전국의 군사들을 총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큰 수레 20량을 만들어 쌀 4천 섬, 벼 2만 2천 섬을 실어 평양의 당나라 군사에게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때 백제의 의병들이 태산(태산: 금산인가?-원주)에 의지하여 복신과 호응하였다.

 

 이때 당의 웅진도독 유인궤가 급사를 보내어 중종에게 보고하였다.

 "만일 태산의 백제 병사들을 그대로 두어 세력이 공고해지면 군량운반의 길이 끊어져 진에 남아 있는 1만 7천 명의 양국 군사들이 다 아사하여 웅진이 다시 백제의 것이 되고 백제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 백제가 회복되면 고구려를 도모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니, 먼저 태산성을 쳐 달라."

 

 문무왕이 이에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9월 19일에 태산성 아래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권하면서, 항복하면 부귀를 보장해 주겠다고 설득하였다. 그러자 의병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성은 비록 적으나 장졸들이 다 의기에 차 있고 용감하여, 싸우다 죽은 백제의 귀신이 될지언정 항복하여 사는 신라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항전하여 8일 만에 성안에 있던 병사 수천 명이 다 전사하고 드디어 성이 함락되었다.

 신라 군사들이 나아가 우술성(우술성: 지금의 회덕-원주)을 포위하니, 우술성은 복신이 신라군의 군량 운반을 끊기 위하여 장수를 보내어 지켰던 곳이다. 서로 대치한 지 수십일 만에 성 안에 있던 달솔(달솔: <자치통감>의 주에서는 <달수>로 읽는다고 하였다.-옮긴이) 조복과 은솔 파가가 내응하여 성중의 의병 수천 명이 다 전사하고 성도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웅진으로 양곡을 운반할 길이 뚫렸으나, 평양의 당나라 군사들(*...... 다들 죽고, 개판나고, 김유신은 군량운반을 합니다. ... 결국 당나라는 철수하고, 신라군은 철수하던 길에...고구려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겨우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때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하던 신라 병사들은 돌아오는 길에 대설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또 백제 병사들의 포위 공격을 당하여 살아서 돌아간 자는 1백 명 중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부여복신이 다시 [곰나루]성에 이르러, 성의 부근 사면에 목책을 세워 신라와 당나라 병사의 내외 교통을 차단하니, 백제 전국이 다 호응하여 신라와 당 양국에서 임명한 새 관리들을 죽이고 백제 관리를 내어 모두 다 부여복신의 지휘 하에 속하게 되니, 이때에는 백제의 [다물]사업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만하였다.

 

제 7장 부여복신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란

 


(구글 검색: [곰나루] 웅진성 - > 조선시대 공주 공산성)

 

1. 적과 내통하다 붙잡혀서 참수당한 자진(*도침)

 

 부여복신이 처음으로 기병할 때 어떤 사람이 복신에게 말하기를, "타인의 통제를 받으면 큰일에 실패하기 쉬울 테니, 공은 무왕의 조카이자 성망이 내외에 미치는 터이니, 자립하여 왕이 되어 전국의 병마를 지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으나, 복신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이는 인민에게 사사로움을 보이는 것이니 의가 아니다." 하고는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복신은 또, 자진이 의병을 최초로 의병을 최초로 불러 모은 공이 있고 또 일찍이 좌평의 관직을 지낸 대신이라고 하여 그에게 영군대장군의 자리를 양보하고, 그 자신은 상잠장군이 되어 강서의 군사만을 전적으로 관할하였다.

 

 후에 복신이 신라와 당 양국의 군사를 여러 차례 대파하여 [곰나루] 성을 포위 공격하자 당의 장수 유인궤가 감히 나와서 싸우지 못하였고 또 소정방 등이 평양에서 패하여 달아나니, 당나라 사람들이 이에 크게 낭패하여, 당 고종이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지시하기를 "웅진 고성을 버티고 지키기 곤란하니, 곧 전군을 해로를 통하여 철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유인궤 등이 이에 도망쳐 달아나려고 하였다. 복신이 이를 탐지하고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당병의 귀로를 요격하여 인궤를 사로잡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자진은 본래부터 늘 복신의 재능과 성망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시샘해 오고 있었는데, 이 일을 듣고 나서는 복신이 큰 공을 이루게 될까봐 더욱 두려워서, 드디어 유인궤에게 복신의 계책을 밀고하였다.

 그리고 또 인궤에게 "당의 황제가 만일 백제를 한 나라로 남아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백제는 길이 당의 은혜에 감격하여 당을 받을어 섬길 것이다. 그렇게 해주겠다면 복신 등을 잡아서 바치겠다."고 하였다. 이에 인궤가 도망쳐 돌아갈 생각을 중지하고, 신임하는 사자를 자주 자진에게 보내어 왕래하게 하였다.

 복신의 부장 사수원이 그 밀모의 증적을 잡아서 복신에게 보고하니, 복신이 크게 화를 내고, 이에 연회를 연다는 핑계로 여러 장수들을 부러 모아 그 자리에서 자진을 잡아 그 죄를 선포하고, 풍왕에게 고한 후 참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자진에게 비록 죄가 있으나, 그는 대신이므로 극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의 형을 감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복신은 나라를 배반한 자를 살려둘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자진의 목을 베었다.

 

2. 피살당한 부여복신

 

 풍왕이 복신에 의해 옹립된바 되어 늘 병권이 여러 장수들의 손에 있음을 의심하고 싫어하더니, 복신이 자진을 처형함으로써 전국의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가자, 왕의 좌우 사람들이 왕에게 복신을 참소하였다. "복신이 권력을 전횡하여 멋대로 대장을 살육하니, 그 안중에 어찌 대왕인들 있겠습니까. 대왕이 만일 복신을 죽이지 않으면 복신이 장차 대왕울 죽일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은밀히 풍왕과 밀모하여 복신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해 6월에 복신이 마침 병이 있어 굴실에서 치료하고 있는 것을 기회로 왕이 문병을 간다고 거짓 구실을 만들고는 좌우의 가깝고 신임하는 자들을 거느리고 돌입하여 복신을 잡아서 결박하였다. 그런 다음 왕명으로 좌평 이하 각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복신의 손바닥을 뚫어서 가죽으로 꿰고 그의 죄를 논의하였는데, 복신이 죽으면 적병을 막아낼 이가 없을 줄 풍왕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때문에 마음속으로 당혹하여 "복신의 죄가 과연 죽을죄이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달솔(*16관등 중 2품) 득집이 "이같이 악한 반역자는 죽여도 죄가 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복신이 득집을 향하여 침을 뱉으며 말했다.

  "이 개같은 바보 노예놈아......"

 그리고는 마침내 희광이(사형 집행인, 회자수-원주)의 칼에 목을 바치니, 백제 인민들이 복신의 죽음을 듣고 모두 눈물을 뿌렸다.

 

 <구당서>에서는 한자 원문이 우르르르 (-> 용삭 2년(기원 662년) 7월, 인궤, 인원 등은 진에 남아 있던 군사들을 웅진 동쪽에서 대파하고, 지라성과 윤성, 대산, 사정 등의 성책을 빼앗았다. 이때 복신은 이미 병권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백제왕 부여풍과 점차 서로 시기하고 딴 마음을 품게 되었다. 복신은 병을 핑계대고 굴실에 누워 있으면서 부여풍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려서 그를 습격해 죽일 음모를 하였다. 부여풍은 이를 미리 알고 자기의 친하고 신임하는 자들을 데리고 가서 급습하여 복신을 죽였다.)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서는 한자 원문이 우르르르 (->천지 2년(기원 663년) 6월,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할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고 그의 손바닥을 가죽으로 꿰어서 결박하였다. 그러나 이때 스스로 결단을 내리기 어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 달솔 득집이 아뢰기를, 이 악한 반역자를 놓아주서는 안 되며...... 그 머리를 잘라 식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가을 8월 ...... 갑오에 신라가 ...... 곧바로 쳐들어와서 먼저 주유를 취하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두 책에서는 그 연대와 사실이 서로 다르다.

 복신이 죽은 연도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일본서기>와 합치할 뿐더러, 그 사실로 말하더라도, 복신이 이미 군권을 장악하였으므로, 병권이 없는 풍왕을 죽이려면 곧바로 습격해서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굴실에 누워서 풍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려서 죽이려고 하였겠는가. 이것이 <당서>의 첫 번째 의심스러운 점이다.

 신라나 당이 복신에게 여러 차례 패하여 1만 7천의 소수의 군사로 위험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아무런 형세의 변동도 없는데 갑자기 출전하여 지라성, 곧 주류성(지금의 연기-원주)과 윤성(지금의 정산-원주), 대산(지금의 한산-원주), 사정(지금의 온양-원주) 등 각지를 평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당서>의 두 번째 의심스러운 점이다.

 의병이 여러 차례 승리하여 백제 전토가 거의 회복되었으므로 풍왕이 복신을 죽여 그 군권을 확장하려고 하였던 것일 테니, 어찌 각처의 성책이 거의 함락된 뒤에야 장차 망할 권리를 차지하려고 복신을 해쳤겠는가. 이것이 <당서>의 세 번째 의심스러운 점이다.

 그러므로 <당서>를 버리고 <일본서기>를 따르는 동시에, <해상잡록>의 전설을 취하여 백제 최후 위윈의 사적의 빠지고 없는 부분을 보완하는 바이다.

 


(구글 검색 이미지)

 

3. 복신 사후 풍왕의 망함

 

 유인궤가 [곰나루]성에 포위되었으나 신라와 당이 다 복신을 두려워하여 나아가 공격하지 못하였고 있었는데, 이때 복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 고종이 장군 손인사로 하여금 2만 7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 백제 왕자 륭, 곧 의자왕의 아들로서 당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자를 백제왕이라 칭하면서 바다 길을 따라 덕물포에 상륙시키고는 비밀히 사자를 보내어 선포하였다.

 

 "백제왕 풍은 잔인하고 시기심과 의심이 많아서 자기를 옹립하고 또 큰 공이 있는 부여복신까지 죽였으니, 하물며 다른 장수들이랴.

 당은 본래 백제의 토지를 취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가 고구려와 한 편이 되는 것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쳤던 것이다.

 이제 륭은 백제 선왕이 사랑하던 아들로서 능히 대세를 알고 또 황제(당의 황제를 가리킨 것이다.-원주)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으로써 옹호하여 귀국케 하는 바이니, 백제의 총명한 장사들은 짐의 말을 믿고 륭을 왕으로 떠받을어 섬긴다면 전재의 노고 없이 고국을 회복하고 부귀를 편안히 누릴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만일 대군에게 완강히 항거하다가는 짐도 공 등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공 등이 잔인한 풍을 인군으로 떠받들다가 패배하면 큰 나라 군사에게 주륙을 당할 것이고, 승리하면 풍의 시기와 의심을 받아 복신과 같이 참사를 당할 것이니, 이 어찌 지자로서 택할 일이겠는가."

 

 고 하며 풍왕의 여러 장수들을 꼬이니, 남부달솔 흑치상지와 진현성주 사타상여가 바야흐로 풍이 복신을 죽인 것을 원망하다가, 드디어 그 관내의 2백여 성을 가지고 륭에게 투항하였다. 그리고 흑치상지는 서부달솔 지수신에게 글을 보내어, 풍왕이 잔인하여 백제를 중흥할 영명한 임금이 못 됨을 논하고, 그리고는 지수신에게 같이 항복하자가 권하자, 지수신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우리가 상좌평(복신-원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시키려다가 중도에 불행히도 간신 때문에 일이 잘못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우리가 지극히 통탄해 하는 바가 아니겠소마는, 그러나 상좌평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래 당나라 도적을 물리치려고 한 것이거늘, 상좌평의 죽음이 원통하다고 해서 그것을 복수하기 위하여 당에 투항한다면, 이는 상좌평만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곧 백제를 배반하는 것이 되니, 상좌평의 영혼이 있다면 그 마음의 지극한 아픔이 손바닥을 꿰거나 독살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심할 것이오. 나는 공이 번연히 깨달아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오."

라고 하였다.

 

 그러나 흑치상지가 답장을 하지 않고 8월에 신라와 당나라 양국 군사의 선도가 되어 부하 5만 명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하니, 이에 백제는 양국으로 갈라졌다. 지수신이 관할하는 서부는 풍왕에게 속하여 [서백제]가 되고, 흑치상지가 관할하는 남부는 륭에게 속하여 [남백제]가 되었다. 서백제는 당을 적대하여 싸우고, 남백제는 당의 노예가 되어 그 지시를 받아 서백제를 쳤다.

 아, 백제 중흥의 대업을 이같이 창피하게 만든 자는 곧 부여풍, 곧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니, 풍은 곧 중흥의 백제를 멸망시킨 제1의 죄인이다.

 풍이 비록 죄인이기는 하나, 풍이 악하다는 이유로 백제를 배반하여 당의 노예가 되기에 이르렀던 흑치상지는 곧 백제를 멸망시킨 제2의 죄인이다. 이전 역사서에서는 오직 <당서>의 포폄을 따라 흑치상지를 극히 찬미하였으니, 이 어찌 바보 자식들의 붓이 아니냐.

 

 풍이 이미 복신을 죽이고는 적국을 막을 만한 방략이 없으므로 곧 사자를 보내어 고구려와 왜의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바야흐로 당의 침입을 우려하여 군사를 보내지 못하였고, 왜는 병선 4백 척을 보내어 원조하였다.

 왜병은 백마강 중에, 서백제의 군사들은 강 언덕에 진열하여 남백제, 신라, 당 삼국의 군사들과 대전할 때, 신라의 병선이 강의 상류로부터 내려와서 왜선을 직충하여 불태우고 침몰시키니 왜병들은 패몰하여 강물 속에 빠져 죽었고, 강 언덕 위에 있던 서백제의 병사들은 남백제와 당병의 협공에 패하였다. 이에 삼국의 군사들이 집결하여 주류성을 치니, 풍은 드디어 도주하고 장사들은 전사하였다.


(구글 검색: 백강-백마강 전투가 나온 KBS 사극 대왕의 꿈)

 

(애석하게도 저자의 원고는 미완인 채로 여기서 끝났다. 감옥에서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글도 보완하고 나머지 부분도 완성하고 싶다고 하였던 단재 신채호의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한 채, 조선의 최고 천재 사학자는 1936년 2월 21일 여순형무소에서 57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었다. 이로써 단지 단재의 저술 한 권만 미완인 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대사 자체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지금까지 올바로 정립되지 못하고 불구인 채로 남아 있게 되었으니, 우리 민족을 위하여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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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입니다. 확실히-굉장히-똑똑한-성균관 박사님이셨지만, 신채호 선생도 (살아계셨다면) 자다가 이불킥을 할,,, 흑역사를 남겼지요. 꺼무위키에 '삼조선'을 검색해보시죠.

옛날 처음, 책을 손에 쥐었을 때, 삼조선이 단군-기자-위만 조선인 줄 알았습니다. 신조선과 불조선과 말조선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