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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고성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정세권 선생이 태어나셨습니다. 계속 고성에서 사시다가 1919년 경성으로 이주하셨고 1920년(일부에서는 1919년이라는 설도 있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하셨습니다.  때마침 한일병합 이후의 경성에는 근대식 건물과 거리가 만들어지고, 총독부는 근대적 도시 계획을 기획하며 경성을 디자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인구가 과밀해져 경성은 도시 문제, 주거 문제에 휩싸였습니다. 개발되자 일본인이 하나 둘 들어와 도시를 점유하여,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과 조선인이 다수인 청계천 북쪽으로 양분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청계천 남쪽 지역이 급증한 일본인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총독부는 정부 기관을 국공유지에 먼저 입지시킨 뒤 일본인을 진출시키는 방식으로 청계천 북쪽으로의 일본 세력 확장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때 정세권 선생은 우리의 영역을 지키고자 민간 주택 건설 사업에 뛰어드셨고 기존 귀족이 소유하였던 넓은 토지나 택지를 쪼개 여러 채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하였으며,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밀려나면서 고유의 주거지역과 주거방식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러한 한옥 집단지구에 공급된 한옥은 전통한옥의 구조를 ㅁ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하는 등 근대적인 편리함과 생활양식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한옥)이었습니다. 현재의 익선동과 북촌한옥마을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하였고 그 외에도 창신동, 봉익동, 계동, 재동 등도 개발하셨습니다. 정세권 선생은 식민지 치하에서 자수성가한 사업자로써 한국인을 위한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족자본가로서 민족운동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던 춘원 이광수에게 가회동의 집을 빌려주고 주택을 지어주었으며 일제에 맞서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형성된 언론인 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와의 동지적 관계는 정세권의 일생과 사업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초기 민족운동 명망가들의 관념적인 계몽운동 차원에서 정세권의 참여로 실물 경제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정세권은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며 조선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담당하였습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 활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였고 재정적으로 조선어학회를 지원하셨습니다. 물산장려운동은 정세권의 참여를 분기로 흥망성쇠가 갈렸고,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참여한 조선어학회 운동은 해방 후 최초의 한국어사전인 한글학회 큰 사전 간행이라는 성과를 남겼습니다. 위에 열거된 활동으로 인해 고문받고 뚝섬의 토지 35,000평을 강탈하는 등의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무릅쓰신 것이었습니다. 독립 이후 일가가 행당동에 거주하였으며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0년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1.4후퇴에도 가족만 부산과 제주도로 피란하였을 뿐 그 자신은 왕십리에 머물렀습니다. 1950년대 말 경상남도 고성군으로 혼자 낙향하셨으며, 1965년 9월 14일 사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