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멍하니, 하늘에 떠 있는 검은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불길한 붉은 빛을 흘리는 최후의 검, 무()가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들려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는 --는 피부도, 머리카락도, 옷도 그 '색'을 이 검 하나에 바쳐 저것을 베어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세계를 망가뜨리고 이젠 그 잔해마저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저 거대한 어둠을 향해, 울분과 원망을 모아 필사의 참격을 날렸다.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즈모 최후의 생존자이자 부세조도 하지마리의 주인인 그녀가 모든 걸 걸고 날린 최후의 일격은, 다만 강가에 떨어진 한 방울 물감처럼 한없이 작아지다 검은 태양에게 소리없이 빨려들어가 사라졌다. '그것'은, 그녀에게 딱히 분노나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애초에 적의라는 것조차 없었을지도.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의 소름끼칠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며, 그녀의 손은 천천히 검을 놓았다.


첨벙-


끝없이 내리는 비가 강을 이루어버린 곳에 검이 가라앉고, 그녀는 다만 다가오는 거대한 어둠에 안겼다. 색을 잃은 그녀는 비단 외견 뿐만 아니라, 마음 역시 더 이상 모든 빛을 잃고 공허함만이 남아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사명감도, 연민도, 그리움도, 슬픔도, 분노도, 원망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이 안식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편안한 밤이 그녀를 감쌌다.


그래. 여기까지구나.


열심히 했어. 최선을 다 했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이제 쉬자.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나도...이만 자자. 막을 수 없는 흐름을 거스르려는 덧없는 노력을 멈추고, 편해지자.


어차피, 처음부터 아무것도 의미 없었으니까.


의미가, 없다고?


천천히 가라앉는 의식의 가장 깊은 곳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애써 무시하려 했다.


너를 보고 구원을 바라고, 너의 뒷모습을 보며 희망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의미가 없다고?


너와 함께 검을 쥐고 적에게 맞서고, 희생하고, 의지를 불태우던 동료들이 의미가 없다고?


그 모든 비극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외면하지 않고 운명에 도전한 네가, 의미가 없다고?


더 이상 사지에 감각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냄새를 맡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켠의 쓰라림이 점점 정신을 또렷하게 깨우고 있었다.


그냥 잊어버리면 편해질 수 있는데. 포기하면 안식을 찾을 수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그걸로 충분해? 모든 걸 포기하고, 모든 걸 잊고, 모든 걸 버려서. 모든 걸 잃은 걸 안식이라고 착각할 거야?


주마등처럼,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어째선지 이름도, 자세한 생김새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누군가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는, 이제 자신 뿐이겠지. 자신이 이 편안하기 그지없는 밤으로 걸어나가기만 하면. 그러면 모든 게 끝이다. 타카마 신국도, 이즈모 현세도. 12자루의 호세조도와 2자루의 부세조도,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무 조차도. 모든 것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 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나겠지.


...아니야.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이런 결말은 인정 못해. 인정 못해. 인정 못해. 절대. 절대. 절대절대절대절대절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색을 잃고 새하얗게 변해 버린 몸의 심장이,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이런 허무한 결말 따위를 위해서 우리가 달려온 게 아니라고. 우리를 믿고 기대한 이들은 이딴 끝을 바란 게 아니라고. 텅 비었던 마음에서 다시 한 번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모든 건 의미 없지 않아. ...내가, 살아있는 한.


그녀의 가슴에서, 붉은 색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창백해진 피부에 피처럼 붉은 색이 퍼져나감과 동시에, 꽃이 피었다. 검은 태양은, 당연히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녀의 몸 역시 여전히 대부분 이 거대한 허무에 침식되어 탈색된 채였다.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도,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는 자신이 해야 할 일만큼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곳에서, 과거를 품어야만 할 자. 떠도는 이들의 기억이 가라앉고, 안식을 찾는 이들을 품는 강. 그래, 그녀는 망각의 강(Acheron)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 어떤 소리도 울려퍼지지 않는, 끝없는 공허 속 고요한 외침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끝내 무엇도 바꾸지 못하고 소멸하더라도.


저 편안한 밤으로 조용히 가지 않겠노라고. 다른 이들처럼 떠나버리는 게 아닌, 떠난 이들을 가슴에 품고 죽어가는 이 세계의 빛에 분노하며 저항하겠다고. 그리 맹세하며 그녀는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허무 속에서 홀로 붉은 색으로 스스로를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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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한없는 공허는 사라진 채였다. 그녀도 언제 그것이 떠났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의 검과 눈을 떴을 뿐이다. 어째서인지 제 몸에 담긴 그것의 힘의 편린과 함께. 한때 --였던 소녀는,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케론의 삶은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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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가 열렸길래 투척해보는 아케론 프롤로그 스토리. 나름대로 공허에 저항하던 그 순간의 아케론을 한번 묘사해보고 싶었음. 부디 너무 노잼은 아니었으면 좋겠네. 붕스 창작은 처음인데 좀 찐빠를 냈을수도 있읆...내가 붕3을 안했기 때문에.


편안함 밤이나 죽어가는 빛은 딜런 토마스라는 사람의 유명한 시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을 인용함 거임. 멸망에 저항한 영웅이던 아케론한테 잘 어울릴거 같아서. 좋은 시니까 관심가면 인터넷에 쳐보셈.


하여튼 심심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아 참.


아케론 픽업 이틀도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