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챈러스 채널

어떤 분이 모아보라기에 모아봤습니다. 제가 꼰대라서 에디팅 실력이 부족합니다.

 

-----------------------------------------------------------------------------------------------

 

1. 나 국민학교 1학년 때는 겨울에 교실문을 교무주임세끼가 열어줬는데, 한 놈씩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남자애들은 불알을 만져야 된다고 했었다. 생각해 보니 여자애들한테는 아무짓도 안 한 것 같다. 늙은 걸레 게이 세끼.

 

2. 초등학교 때 플라나리아 실험을 해야 한다고 학교에서 플라나리아를 잡아오라 했다. 아이들은 전부 거머리를 잡아왔다. 1급수에 사는 플라나리아 세끼를 공해만땅 서울에서 어디서 구하냐. 씨발.

 

3. 초등학교 1학년때 받아쓰기 못 보면 앞에 나가서 매로 존나 맞았다. 1학년 때는 맞은 기억 밖에 없다. 씨발.

 

4. 3학년 때는 남자 선생이 담임이었다. 반에 가끔 출근하는 정신빠진 학생 세끼가 있었는데 하루는 출근했더니 선생이 그 아이 머리카락을 세게 당기며 말 안듣는다고 벌 주었다. 존나 이상한 선생

 

5. 5학년 때 처녀 선생이 갓 부임해서 우리 반을 담당했는데 점심시간 끝나고 매일 맞았다. 이름도 졸라 시골틱하게 "순득"이었다. 난간 하나 안 닦았다고 전체기합을 주는데 책상위에 무릎대고 올라가서 엉덩이는 들고 L자로 앉아서 30cm자로 손등을 맞았다. 새디스트 아니면 나치독일 같았다.

 

6. 중2학년 때 담임선생은 대걸레 자루로 아이들을 패면서 웃었다. 우리는 처음에 새디스트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7.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복도에서 장난쳤다는 이유로 악명높은 "개새끼"선생한테 걸렸다. 남의 교실에 끌려가서 친구들 보는 앞에서 약 1시간동안 대걸레로 2명이 맞았다. 한 놈은 맞다가 실신했는지 눈이 돌아갔는데, 몇 대 더 맞으니 다시 정신이 나서 또 맞았다. 굴라그가 따로 없었다. 맞던 한 세끼는 "선생님 살려주세요"하고 애원했지만 선생은 계속 "씹새끼야 맞을 짓을 하지 말아야지"하면서 계속 팼다.

 

8. 내가 아직도 이런 장면 하나하나 생각나는게 PTSD가 따로 없다. 40대 이상의 남녀들은 이런 정신병 PTSD를 앓고 있을 것이다. 살면서들 미친짓들 하지 말자. 폭력은 전염되는 거다.

 

9. 합법적으로 아이들을 팰 수 없으니 늙은 선생들은 스트레스 쌓일 거다. 다 병걸려 뒈져라 . 게새끼들.

 

10. 초등학교 때 아는 분이 교감선생으로 부임해 왔다. 키도 크고 말씀도 잘하신 분이었다. 하루는 운동회를 했는데 교감선생님이 노래 부를 차례가 되었다. 이 사람 갑자기 일본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씨발놈.

 

11. 학교 앞 건물 중앙 현관은 아무나 다니지 못했다. 항상 여기에 학교 트로피를 전시하고 있었고 여기가 제일 깨끗했다. 친구동생이 여기 서 장난치다가 무서운 선생한테 걸렸다. 이 선생은 누구의 동생인지 찾아내고 친구를 알아내서 담임에게 통보했다. 친구는 동생때문에 교무실앞 복도에서 벌서게 되었다.

 

12. 국민학교 3학년 까지 나무 바닥 교실을 액체 왁스나 고체 왁스를 뿌리고 걸레질을 했다. 손님이라도 오면 구역을 나눠서 바닥을 걸레질 했다. 아직도 학교 가방을 열면 나던 왁스와 때가 섞인 걸레 냄새를 잊을 수 없다.

 

13. 국민학교 1학년 때 겨울에 조개탄 난로를 땠다. 아침에 일찍오는 사람이 통을 들고 수위실 가서 나무와 조개탄을 받아왔다. 선생은 며칠을 두고 본 후 한 두 놈만 지정해서 그 걸 시켰다. 학교 마칠 때 선생은 그 친구의 살신성인을 우리 앞에서 찬양했다. 2학년에 그는 반장이 되었다.

 

14. 중학교 3학년 졸업 때 학교가 이사를 갔는데 동XX에서 종XXX까지 학교 자체가 이사를 했다. 우리는 종로바닥을 우리 책상과 의자를 들고 이사해야 했다. 지금은 그렇게 하라면 쪽팔려서 못했을 것이다. 학교를 위해서 해야 되는 줄 알고 그냥 했다.

 

15. 초등학교 5학년 때 특활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뭘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공작반을 들어갔다. 전년도 특활시간엔 선생이 뭘 준비해 와서 항상 친구들과 같이 만들고 즐거웠는데, 이번 선생은 시간이 하기 싫은지 매일 아이들 의견을 물어보고 "그래 다음시간은 니네들이 좋아하는 조립식(플라모델)"하고 끝내곤 하였다. 당시 우리집은 가난해서 500원짜리 가리안시리즈나 모터 안달린 헌팅타이거 탱크 조립식을 사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을 알고 있었고 매주 그럴 수는 없었다. 특활시간만 되면 돈 없는 친구들과 앉아서 종이오리던 생각이 난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전후좌우진 두개의 모터와 기어박스가 달린 아카데미제 4500원짜리 "샤만 탱크"를 사주셨다. 이날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돈없던 친구들 3명과 즐겁게 조립한 것이 생각난다. 그런 어머니께서는 3년전에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다.

 

16.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는 가을 운동회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고싸움등을 하느라고 개최 전 매일 오후 1~2시간 동안 예행연습을 했다. 하루는 선생이 출타중이어서 아이들은 오늘은 안하는구나 집에 빨리 갈 수 있겠네 했지만, 교감선생이 아이들을 인솔하여 운동장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날은 3시간을 했다. 가을 운동회에는 XX시 장학사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연습을 해야한다는 말을 했다. 북괴나 남한이나 똑같은 씨발놈들.

 

17. 고등학교 1학년때 신XX라는 선생이 담임이었는데 아이들을 벌 줄때 특별한 방법으로 벌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번 걸려서 벌을 받는데 교단에 머리를 뒤에서 잡고 찢는 벌이었다. 반에 1년 꼴은 아이가 2명 있었는데 한 명은 어리숙한 날라리여서 매일 선생에게 당했다. 전 반의 아이들은 한 번씩 다 당했을 것이다. 두개골 함몰 안 된 것이 다행이다.

 

18. 다니던 국민학교에 "백엽상"이 있었다. 이게 있던 곳은 남향에 항상 해가 들어오는 꽃밭이었는데, 이 주변에 큰 돌을 줍고 작은 돌을 관리하는 것이 3~4학년 때 일과였다. 개같이 DMZ노동당사 같은 학교 건물 중에서도 이곳만은 번쩍 번쩍 빛이 났고, 장학사 세끼들이 오면 꼭 여기와 실외수영장을 데려갔다. 전체 반 기합을 받아도 이 주변에서는 금기시 되었었다. 현재 여기 가보면 백엽상은 남아있는데 잔해상태였다가 철거되었고 실외수영장은 없어졌다. 이제 서야 "씨발 학생이 중요한지 백엽상이 중요한지"이러지만 당시에는 백엽상이 학생보다 중요한 것인 줄 알았다.

 

19. 국민학교 다닐때 학급임원인 적이 있었는데, 학교도 안나오고 "육성회비"도 안 내는 친구가 있었다. 선생이 반장세끼랑 그 집 가보라 해서 간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와 둘이 살고 할머니는 일나가서 없는 상태. 이 친구 어디있나 찾아봤더니 근처에 질 안 좋은 타 학교 세끼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뭐라 할 수 없어서 그냥 학교로 와서 선생에게 이야기 했다. 몇 일 후 자퇴인가 퇴학당했다.

 

20. 국민학교 다닐 당시에는 "급식비"와 "육성회비"를 안 내면 미친듯이 혈안이 된 선생들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못 내는 가난한 집들도 많았고, 다행히 내 담임들은 저거 가지고 뭐라 한 사람은 없었다. 타 반의 경우 못 내서 선생에게 매달 맞는 아이들도 있었다. 맞는 이유는 저걸 내는 시험지 갱지 같은 통지서를 엄마아빠에게 안 갖다 주었다는 죄로. 사실 씨발 안 갖다 줬겠냐. 암튼 씨발 스러웠다.\

 

21. 학교에 급식실이 있었다. 바닥이 돌바닥이었고 고용된 영양사 1명과 아줌마들이 식사를 마련했었다. 식사가 마련되면 복도부터 그 졸라 무거운 국통과 빵단지, 밥통, 식판을 끌고 반까지 오는 것은 우리 담당이었다. 제일 헬이었던게 국통과 식판 들고 오는 당번. 항상 이 두 당번은 제비뽑기로 했다. 재수 없으면 한 주에도 몇 번씩 국통 식판을 들고 날라야 했다. 우습게도 돌아가면서 하질 않았다. 왜냐하면 항상 가벼운 것을 드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체구가 작은데도 식판이 담긴 달구지를 자주 밀었다. 식판이 멜라민 수지로 된 것이라 졸라게 무거웠다. 얘들 다 먹은 후에는 정리해서 지정된 장소에 갖다 주는 것도 학생들이 했다. 그 때는 시켜서 사이보그처럼 했던 거 같다.

 

22. 초등학교 5학년때 나치식으로 L자로 세워놓고 패던 그 처녀 선생이 방과 후에 꼭 나한테 은행갔다 오는 심부름을 시켰다. 농협/제일은행/국민은행 뺑뺑이를 돌다보면 항상 시간이 4시정도 되었던 거 같다. 통장을 3개씩 들고 다 해서 갖다주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안했다. 그 때 업무가 생각해 보니 무통장 입금 업무였던거 같다. 젊은 초임 선생이 무슨 무통장입금을 그렇게 분산해서 했을까. 간첩인가?

 

23. 고등학교 다닐 때는 매일 맞았던것 같다. 아침조회시간에 줄 쪼금 잘못써서 교련선생에게 머리 맞고 히프 맞고, 교실로 들어가다 친구랑 말했다고 귀싸대기 맞고, 문제 못 풀었다고 테이프 빠따로 엉덩이 맞고, 저녁에 자율학습시간에 떠든다고 단체로 기합받고 맞고..92년까지 계속 맞은 것 같다

 

24. 중학교 때 선생들 돌아가면서 한 반 마다 간담회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때 돈을 많이 받기로 알려진 체육 선생이 들어왔다. 누군가 촌지에 대해 물어보자 "촌지란 것은 뇌물이 아니라 개개인이 잘되라는 의미에서 받는 소정의 보답"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씹새끼야 그냥 뇌물이라고 해.

 

25. 고등학교 때 자기 매를 자랑하는 선생세끼가 있었다. 없어진 하키부가 있었는데 선수들스틱이 많이남아서 특주품으로 각지게 깍아달라고 하고 자동차 그랑프리 깃발처럼 흰색도장하고 검은전기 테이프로 감을 것이었다. 그걸자랑하면서 니네가 이걸로 맞을 때 테이프 감은 부분이 궁뎅이에 맞으면 더 아플거라고 자랑하면서 낄낄거리는 것을 들었다. 미친 씹새끼 아닌가.

 

26. 국민학교 5학년때 반에 장난꾸러기 친구가 있었다. 하루는 아이들과 장난치다가 연필로 여러군데 찍은 급식빵을 복도에 떨어뜨렸다. 옆반의 개같은선생한테 걸려서 뒤지게 복도에서 맞았다. 담임이 데리고 와서 그 급식빵을 벌서며 모두 먹게했다. 담임세끼가 광물흑연영양소가 듬뿍 들은 빵을 준거지.

 

27. 국민학교 다닐대 2학년부터 서울우유가 간식으로 배급되었다. 초록색 5X5 바께스에 각우유가 포장되어서왔다. 이상하게 이 우유는 개봉하면 바로구린내가진동했다. 정부에서 돈을 들여지급하는 것이므로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먹은 후 각우유봉지를 잘 접어서 모으라고했다. 그 썩은 내 나는 봉지를 다 접어서 모으는 사람은 꼭 몇명만 시키고 반장이나 부반장 등 촌지를 많이 접수한 친구들은 그런일을하지 않았다.

 

28. 중1때 담임, 중2때 담임이 전교조 선생이었다. 중1담임은 영어선생이었는데 중2학년때 짤리고 사회선생과 교문에서 가부좌 시위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중2때 담임은 민주적인 교육을 시킨답시고 떠드는 아이들을 하나도 조용히 시키지 않고 수업을진행했다. 사회선생이었는데 도대체 중2때는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중3때 모두 학교를 나갔다.

 

29. 촌지를 많이 준걸로 알려진 "유XX"이라는 개세끼가 있었다. 한 번은 아이들 많은 복도에서 한 약한 아이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 세끼 옆으로 몇몇 선생이 지나갔는데 신기한 것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세끼가 그 때 전교 어린이 부회장이었다. 그 때 이세끼 가방 보조주머니에는 내가 그토록 사고 싶었던 아카데미의 차파랄 경주용차 조립식이 들려 있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거 죽을 때 까지 못 사보겠구나"

 

30. 국민학교 6학년때 학교에서 뺑뺑이를 잘못돌려 멀쩡한 옆에 중학교 놔두고 멀리 전철타고 5정거장이나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여기 친구들은 본드도 마시고 담배피고 술마시고 그런 친구들이 많았다. 중3때 교실 건물 중 개구멍 있는 폐기된 위층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너무 본드를 불어서 담임선생 인솔하에 단속하러 갔었다. 이때 처음으로 빨간책과 콘돔을 봤다.

 

31. 고등학교 때는 발발이한테 제일 많이 맞았던것 같다. 미적분을 발발이한테 배웠는데 졸라 못해서 매일 맞았다. 칠판에서 나가서 풀어봐 하면 10중 팔구는 풀지 못했다. 이래서야 대학을 갈수 있을까 생각했고, 그 때는 대학 못가면 인생종치는 줄 알았다. 어찌어찌 대학을 갔는데 그제서야 미적분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맞은 효과일까? 아니면 자율적 자습의 결과일까?

 

32. 국민학교 때 꼭 학기초에 화분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명목상 1년내 키워서 겨울 되기 전에 화분키운거에 대한 글을 쓰고 마친다는 거였는데, 솔직히 아이들 마다 화분의 크기와 꽃 모양이 매우 달랐다. 화분은 계급이었다.

 

33. 가을만 되면 무슨 무슨 경시 대회 한다고 공부 잘하는 얘들이 방과 후 모여서 수학 잘하는 타 반 선생으로부터 과외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가서 입상한 것도 아니었다. XX시 무슨 백일장 장려상, 수학경시대회 이런데 한 줄 넣으려고 하는 부모들이 많았다. 저녁엔 동네 큰 회관에서 식사들을 했다.

 

34. 5~6학년때 무슨 국민 정신 교육 실천 사례집인가 해서 전교생이 원고지 몇장정도 되는 에세이를 내고 그 중 우수한 것을 골라서 얇은 책을 냈었다. 글 좀 쓴다는 얘들의 글이 주로 수록되었는데, 아직도 생각나는게 있다. "우리동네에는 칼X아저씨라는 분이 있는데 술만먹으면 주변사람들과 싸우고 그래서 자기네들은 칼X아저씨라고 부른다, 그 어른을 보며 자기는 앞으로 그렇게 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라는 글이다.이 친구 PTSD걸렸을 거다.

 

35. 80년대 서울에 있는 재래시장에는 전봇대에 묶여있는 개들이 많았다. 집을 보는 게 아니라 다 음식이었다. 한 번은저녁에 두 어른이 긴 막대기에 큰 개의 다리를 묶고 양쪽에서 몽둥이로 패면서 길을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걸 본 다음날 선생들이 지나가면서 보신탕에 소주 한잔 하는 농을 들은 이후로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36. 국민학교 4학년때 아침에 문방구에서 지우개를 샀는데 거기 마이클잭슨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학교에서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있는데 반장년이 와서 그런 불순한(?)물건을 갖고 다니면 안된다고 하는 거였다.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니까 선생에게 이야기 하고 말았다. 마이클 잭슨 지우개를 선생에게 뺏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