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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혹은 아방()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처음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밤에 신비로운 광채가 비쳤다. 장성하자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였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침류왕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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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서기 393) 봄 정월, 임금이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장으로 삼아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감복하였다.

가을 8월, 임금이 진무에게 말하였다.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옷깃처럼 중요한 곳이다. 지금 그 땅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기울여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임금은 마침내 병사 1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싸웠다. 석현() 등 5개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으나,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굳게 지켰다. 진무는 군량미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3년(서기 394) 봄 2월,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임금의 이복동생인 홍()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4년(서기 395) 봄 2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20일 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 임금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병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浿) 가에 진을 치고 대항하여 싸웠다. 우리 병사가 크게 패하여 사망자가 8천 명이나 되었다.

겨울 11월, 임금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친히 병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주둔하였다.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얼어 죽는 자가 많이 발생하자, 군대를 돌려 한산성()에 이르러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6년(서기 397) 여름 5월, 임금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7년(서기 398) 봄 2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다.
3월, 쌍현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임금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대를 내어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다. 그날 밤에 큰 별이 떨어져 진영에서 소리가 났다. 임금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여겨 공격을 중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