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기


어렸을 때, 한자사전을 읽은 적이 있다.

책장에 있던 책은 전부 읽어버렸고 내용도 다 외워버렸기에 일부러 다시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린 나이 탓에 계속 부풀어 오르는 탐구심과 활자에 대한 갈망으로 내가 손에 든 것은 한자사전이었다. 사전은 도구이지 책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익숙한 한자조차도 몰랐던 읽는 방법이 있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개중에는 억지로 끼워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내력이 펼쳐진 두께 5센티미터 정도의 세계에, 다른 책을 읽을 때는 얻을 수 없었던 또 다른 종류의 고양감을 그 당시의 나는 가득 품고 있었다.


<껍질을 벗겨서 표면을 닦은 후, 금속으로 깎아 문자로 만들어 고정하는 것에서 유래>


『록錄』이라는 글자의 유래에 다다랐을 때, 다음을 원하며 계속 페이지를 넘기던 내 손이 문득 멈춘 기억이 떠오른다. 근처에 있던 『예銳』나 『주鑄』를 보던 것처럼 스쳐 지나가던 눈이 일부러 돌아와 『록錄』이라는 한자 항목을 그야말로 눈동자에 새겨 기록하겠다는 듯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기가 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나에게 『기록』이란 말은 낯설었다. 지금은 이미 매일, 매시 마주하는 단어가 되어버리긴 했어도. 그래서 애착이 있었다거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단어는 특별하게 여겨도 손해는 없을 거라고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어제, 오랜만에 다시 한자사전을 펼쳤다.

그것은 단지 흥밋거리로 읽었던 지난 날과 달리 명확하게 그 한자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두 가지 마음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입 밖에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것>


『기억』과 『기록』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실제 내가 예상했던 대로 한자사전을 찾아본 바로는 소리가 비슷한 『억憶』과 『록錄』은 전혀 달랐고, 나는 그것을 음미하며 한숨 돌리고 조금 버거운 크기의 사전을 닫았다. 그 때는.


『기억』은 세 단계로 나뉜다. 『기명』, 『유지』, 『상기』. 마음에 적고, 그것을 간직하고, 떠올린다. 결국 이 중 명銘이라는 글자가 금속으로 이름을 새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어떻게 해도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억』이 마음에 『기록』하는 것, 『기명』하는 것을 포함한다면, 나는 마음의 표면을 벗겨서 닦고, 거기에 잊지 않으려고 무기질적인 차가운 바늘로 도려내, 정성껏 상처를 내며 기억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그래.

지금은 이미 확신하고 있다.


흰색 운동화를 신은 발걸음이 시야 끝에서 보여 바라보던 휴대전화를 슬립 모드로 만들었다. 신호에 눈을 돌리자 아직 빨간색 그대로였기에, 액정이 꺼진 휴대전화와 함께 싫어도 느껴지는 도시의 바쁨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파란색으로 변한 신호와 따라오는 혼잡한 발소리를 보내며, 잠시 멈춰선 채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바뀌었는데, 라고 말하고 싶은 모습으로 내 얼굴을 의아한 듯 바라보며 앞질러가는 사람. 신호대기 중인 차 안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하는 기품있는 늙은 개. 퐁, 퐁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보행 가능』을 알리는 음향. 다섯 번째 그 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물결을 타고 걷기 시작했다.

가끔 괜히 이런 시간을 갖고 싶을 때가 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닌, 그저 멈춰서서 세상을 관찰하는 시간이. 최근엔 300 페이지 가량의 책을 다 읽은 뒤 의자 등받이 천천히 기대 가만히 창밖으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던 그 한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습관...... 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빈도가 낮은 습관은 항상 혼자 있을 때 일어났다. 그것이 밖에서, 그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이레귤러적인 상황을 깨닫고, 자신의 일이지만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이미 춘분을 맞이했지만, 전혀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 없었던 회색빛 거리 풍경이 드디어 물들기 시작하는 것을. 심호흡하고 일부러 이쪽에서 찾으러 가지 않아도, 그저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미하게 꽃향기가 콧구멍을 간지럽히는 것을. 계절을 만들어내는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며 아련하기만 했던 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새로운 한 해의 시작만이 내가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조금 쌀쌀한 바람을 타고 봄――이라기 보다는 새 학기――에 어울리는 냄새가 났다. 온화한 날씨의 상쾌함과는 정반대인, 탄내나는 화약과 그을음 냄새.


"어이! 폭파하라는 말은 안 했잖아!"

"시끄러! 가게를 열지 않는 게 잘못이야!"


따스한 햇살에 녹은 것은 눈뿐만이 아니다. 겨우내 어디서 숨어 지냈는지 알 수 없는 불량배들이 이 계절을 기다렸다는 듯 원기왕성한 모습으로 오른손에 횃불을, 왼손에 총을 들고 식당 문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을음을 들이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는 걸 보고 어째서 횃불을 선택했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결국 말하자면 슈프레히콜* 같은 것으로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날뛰고 있다!』라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데모나 집회에서 여럿이 구호나 요구 조건 등을 외치는 일. 또, 그 외침)

어차피 5분도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와서 제압당할 텐데라고 생각하며 한숨쉬고 올려다본 빌딩의 전자게시판에 있는 뉴스가 딱 눈에 들어온다.

『총학생회장, 실종 후 후임인가?』

검은 실루엣에 물음표가 붙은 인물상 옆에 고딕체의 붉은 글씨로 큼직하게 적힌 제목. 동영상 게시 사이트에서 사용되는 「조잡한 썸네일」 같은 것을 보며 비슷한 가짜 보도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잘도 질리지 않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최근 며칠 간 불량배 수의 변화는 「따뜻해져서」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 그 그래프는 분명히 총학생회장 실종이 기점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자치구 밖을 걷고 있는 것도, 횡단보도에서 일부러 멈춰버린 이유 없는 기대감의 원인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랜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주변보다 한 층 더 높은, 조금은 색다른 존재감을 내뿜는 빌딩으로 들어선다. 무기질적이고 시스테매틱한 입구 벽에는 「총학생회」 라고 적힌 로고가 곳곳에 붙어 있고, 입구 정면의 카운터에 앉아 있던 소녀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애교 섞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총학생회 본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나요?"

"우시오 노아입니다. 나나가미 린 행정관의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총학생회에서 내 앞으로 온 편지에 나나가미 린의 이름은 없었지만, 학생 개인에게 연락하는 건 틀림없이 그녀에게서 온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 그러니까. 아행에..... 아, 이, 우, 「우이」, 「우에이시」......"


접수처 소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명단의 처음부터 찾고 있다는 건 조금 큰 혼잣말에서 전해지지만 검색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그 모습에서 이곳에 배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점까지 금방 알게 된다. 요컨대 총학생회 내부에서도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고 인사쪽도 인력부족이라는 거겠지.


"「우지이에」, 「우시오」 .......아, 있다! 우시오 노아 씨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뒤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으로 가시죠!"


『현재 자리를 비웠으니 기다려주세요.』 라는 삼각 팻말을 접수대에 놓고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입니다.」 라는 안내를 따라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바깥 경치가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서서히 펼쳐지는 그 경치를 곁눈질하며 접수...... 겸 엘리베이터 걸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조금 전 명단을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창문에 빨려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앞으로 기울어진 자세를, 하지만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이며 거리의 모습을 일편단심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여기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처음이신가요?"

"흐에!? 네, 네! 처음이에요!"


소녀는 창문에서 손을 놓고 옷깃을 여미며 정말 알기 쉽게 헛기침을 했다.


"사실 이 총학생회 본부에 배치된 이후로 어제까지 6일동안 제 담당은 접수뿐이었는데, 엘리베이터 담당자가 다른 부서로 옮겨져서요. 오늘부터 1인 2역으로 엄청 바빠요....."

"그렇군요...... 분명 앞으로 여러 번 볼 경치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의 첫 번째 동승자가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굉장히 멋진 얼굴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기, 기록인가요!? 어, 영광.... 입니다......?"


당황하면서도 똑바로 선 뒤 매뉴얼대로 고개 숙이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다. 놀리는 보람도 있고.


"여, 여하튼!"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등 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13층입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소녀는 문을 열며 배웅해주었다.

분명 매뉴얼이 아닌, 활짝 웃는 얼굴로.


"기다리게 했습니다. 나나가미 린 행정관."

"아뇨. 5분 전이에요, 우시오 노아씨. 그리고..."


나를 맞이한 것은 총학생회장 산하의 행정위원회와는 구분되는, 총괄실에 배치된 수석 행정관 나나가미 린 『뿐』 이었다. 이 상황은 대체로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였지만, 일대일로 대화할 확률은 낮다고 생각했기에 자연스럽게 등줄기가 펴진다.


"성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뜻하는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겠죠?"

"어머, 저는 『합리와는 거리가 먼』 아이스 브레이크를 끼워 넣어도 상관없어요. 린 행정관. 제가 5분 전에 온 건 아이스 브레이크 때문입니다만. 필요하다면 날씨 얘기라도, 라고 생각해 잠잘 시간을 아껴서 생각한 것을 세 가지 정도 준비해왔으니까요."


나나가미 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얼굴에서 감정을 읽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 가면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엄청 신경쓰이는 내용이지만 이번에는 사용하겠습니다. 그보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쪽으로."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걸어가는 나나가미 린을 따라 방 오른쪽 구석에 있는 출입구를 지나자 흰색 바탕의 방과는 달리 검은 벽면과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있었다. 조금은 넌센스, 라기보다는......


"악취미적, 이죠."


자신의 사고가 소리로 들려왔다는 것에 놀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옆을 걷던 목소리의 주인은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희망에 부응하는 형태인 것 같습니다. 만약 환영받게 된다면 레드카펫을 걸어보고 싶다는 모양입니다."

".....그건 어떤 분이?"


나나가미 린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런, 틀림없이 노아씨는 전부 예상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꽤나 고평가된 듯하다. 홀려서 멈춰선 나는 더 이상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그녀보다 먼저 한 발 내디뎠다.


"저는 탐정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어떤 분이 말씀하신 건가요?"

"선생님입니다."

"선생님, 인가요?"

"지금은 행방불명된 총학생회장이 실종되기 전 직접 연방수사동아리 『샬레』의 고문으로 지명한 선생님입니다."


『샬레』. 소문일 뿐이지만 들어본 적이 있다. 연방조직의 초법적 기관으로 학생들은 각 학원의 울타리를 넘어 참여가 허용되며, 거기에 참가 학생을 병력으로 움직일 수 있어 세계 경찰로도, 전략 예비로도 될 수 있는 동아리다. 이런 무질서한 동아리 활동은 구상 단계에서 기각된 줄로만 알았는데 이미 설립까지 했다는 건 다소 계산 밖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우시오 노아씨는 선생님의 비서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유를, 알려주세요."


분명히 말해 선생님이라는 존재의 이야기가 나온 시점에서 우선 틀림없이 내가 그 보좌로 부름받았을 거라는 결말까지는 짐작했다. 하지만 비서라는 건 너무 비약적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 이외에도 적임자가 있다. 연방조직에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 고문의 비서를 뽑는다면 총학생회에서 택하는 게 우선 자명하다. 만약 『학원의 울타리를 넘어선』 동아리 활동의 책임자를 특정 학원에서 뽑아 버린다면 다른 학원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억측과 모략이 생겨나고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의 두 글자, 오직 그것뿐이다.

아니, 혹은 그 의도를 가지고 내가 뽑혔을 수도 있다. 총학생회장의 실종으로 백지화된 에덴조약. 그로 인해 다시 대립관계로 되돌아가는 게헨나와 트리니티 두 학원이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도록. 반면 『두 학원을 향한 공동반격』 이라는 선택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기 위해 밀레니엄이라는 제 3자에게 권력을 갖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나가미 린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던지는 듯한 대답을 했다.


"후보가 될 수 있는 모든 학생 중 당신이 적임이라고 과반수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합니다, 라고 항의하기 위해 입을 열던 나를 제지하고, 이제 행정관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그 여자는 닫혀있는 문에 손을 댔다.


"이건 결정사항이기에. 그럼, 부탁드렸습니다. 우시오 노아 비서."


문을 연 채 빨리 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행정관을 뒤로 한 채 붉은 카펫 끝에 있는 문턱을 넘었다.


어둡다, 라고 생각했다. 검은색 일색이었던 조금 전까지의 복도에서도 전체적인 광량이 적었지만, 천장에 매달린 간접조명 세 개만으로는 방의 넓이에 비해 밝기가 부족하다. 분명 책장이 있으면 서재 같은 차분한 분위기가 연출됐을 텐데, 방 한가운데 있는 안락의자 외에는 가구가 없어 정돈된 느낌을 넘어 어딘가 쓸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 싫어도 눈길을 끄는 안락의자에는 누가 앉아 있었고. 그런 모습이 왠지 굉장히 환상적인 죽음의 연출이라고 느꼈다.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세미나 서기, 우시오 노아입니다. 오늘부터 비서로서 신세지겠습니다."


말을 걸자 탁, 하고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복도를 레드카펫으로 하고 싶다』라는 단 하나의 정보로 구성된 인물상을, 그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고쳐 쓸 필요가 있었다.

〈『선생님』은 조용한 사람〉이다, 라고.

책을 덮는 몸짓, 의자에서 일어서는 몸짓. 그리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몸짓. 일거수일투족이 지금까지 만나온 누구보다 조용했다. 과거 트리니티와의 교류회에서 만났던 『아가씨』들도 몸짓이 철저하고 조용했지만, 이 사람의 그것은 뇌 속에 기억하고 있는 어떤 말도 딱 들어맞지 않아 그 몸짓을 위해 새롭게 의성어를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돌아서서 다가오던 선생님은 쿵! 하고 넘어졌다. 그것도 화려하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 괜찮으신가요?"

"아하하, 미안.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손을 내밀자 그 사람은 그것을 가볍게 잡고 일어섰다. 크고, 투박한 손. 그리고 키가 크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서야 『선생님』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우시오 노아씨, 라고 했나. 오늘부터 잘 부탁해."


바닥에 부딪힌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에 대해서라는, 자신의 평가를 덧붙인다.

〈『선생님』은 조금 얼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의도가 어떻든 간에,

〈비서로서의 일은 아무래도 지루하지 않을 듯 합니다〉 라고.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우시오 노아씨, 좋은 아침."

"『노아』면 돼요. 그보다 선생님, 오늘 일정 말입니다만......"


나와 선생님의 하루는 어김없이 이 대화로 시작된다. 분명 선생님만의 유머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치고는 조금 넌센스라고 느끼게 된다. 전날 밤에도 전한 하루의 예정을 매번 「사막......! 즐거울 거 같네.」 라거나 「사막!? 사막인가......」라는 리액션을 돌려주면서, 선생님이 내린 커피를 둘이서 마신다. 그날그날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이는 선생님도 커피 맛만큼은 한결같고 변함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런 뒤 엘리베이터를 불러 집무실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사이, 생텀타워나 하늘에 떠 있는 헤일로를 새롭다는 듯, 그러나 노인이 연못의 잉어를 바라보는 듯한 고요함으로 바라보고 현관 앞에서 헤어진다. 나는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로, 선생님은 매일 다른 장소로. 나는 이미 익숙해진 엘리베이터의 가상 버튼이나 현관의 스캔 게이트에 대해 선생님은 만지는 모든 게 신선한, 처음 도시에 온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다.

밀레니엄에서 세미나 업무를 마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기 전 샬레를 경유한다. 비서용 카드를 스캔해 집무실에 입실한 뒤 선생님의 하루 일정과 일일 기록에서 샬레로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해 방에 비치된 안락의자를 빌려가며 가방에 넣어둔 책을 읽는다. 도착 예정 시각 10분 전에는 책을 갈무리짓고 선생님이 이곳에 방문하는 시간에 딱 맞는 좋은 냄새로 맞이할 수 있도록 끓인 물과 커피 그라인더를 준비한다. 그와 특별한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생활이 시작된 지 둘째 날에는 벌써 아침에는 선생님이, 밤에는 내가 커피를 내리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문이 미끄러지는 무기질적인 소리가 들린다. 계산대로, 시간에 맞게.


"수고했어, 노아. 혹시 커피 만들어?"

"네. 제가 마시고 싶어서 준비했지만, 지금은 2인분을 내릴 수 있어요. 마침 타이밍이 딱 맞았네요."

"오, 오늘은 내가 운이 좋은가 보네. 그럼 부탁할게."


항상 선생님은 그렇게, 운이 좋다고 말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선생님』은 조금 얼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라는 평가를 바꿀 수 없는 것은 이런 부분에서. 딱 한 번 「아뇨, 오늘 선생님 운세는 최하위였어요.」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지만, 조금 슬픈 표정을 지은 뒤 「지금 운이 좋았으니까 상관없어.」 라고 중얼거렸기에 그 이후 그걸로 놀리는 건 그만뒀다.


"네, 기꺼이. 끝난 뒤에는 이야기를 기록하게 해주세요."


비서라고 들었기에 그건 이제 다양한 업무를 떠넘긴다는 얘기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선생님께서 부탁하신 일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매일 아침 하루 일정을 확인하는 것. 또 하나는 퇴근 후 선생님이 말하는 그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것. 전자를 들었을 때는 과연 비서답다고 수긍했지만 후자는 비서라기보다는 세미나 서기의 업무에 가깝다고 느꼈다. 순간적으로 「과연, 그래서 내가」 라고 납득하기는 했지만 수많은 서기 중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학생을 뽑는 이유가 뒷받침 되지 않아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고양이 혀인 선생님이 커피를 식히며 그날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는 맞장구치며 기록한다. 회의록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것과 달리 평소 기억으로만 간직하는 사소한 말의 억양과 재빠른 표정의 움직임으로부터 역산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까지 읽어 노트에 적었다. 선생님은 그 밀도에 대해 「대단하네」 라고 말했지만, 감정을 읽는 행위는 모든 인간이 평소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다. 다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게 나고, 의식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게 다른 사람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계기는 사소한 실수였다. 평소에는 끓는 물을 조금 둬서 온도를 낮춘 뒤 커피를 내렸던 나는 그날, 익숙해졌다고 책을 읽으며 준비하다가 끓인 직후의 물로 커피를 내리고 말았다. 원두의 잡맛이 많이 녹아내린 커피를 조금 맛봤더니 그것은 이미 혀가 놀라 움츠러들 정도로 씁쓸했다. 그런데도 문득 선생님은 어떤 반응을 할까 하고 흥미를 느낀 나는 대체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시기에는 너무 쓴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놓았다.

반쯤 건성으로, 그래도 필요사항은 꼼꼼히 기입하면서 선생님이 그걸 마시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복 복면단이라는 낯선 단어를 말하는 과정에서 두 번 깨물었고, 진정하기 위해 선생님은 컵을 들고 마침내 입에 넣었다.

눈이 크게 떠지는 게 보이고 컵을 바로 뗀다. 한동안 안에 든 검은 액체를 흔들며 바라보던 선생님은 딱 한마디,


「너는 굉장히 쓴 커피를 내리는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약간의 뒤엉킴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침에 선생님이 내리는 커피와 거의 동등한 것을 계속 만들고 있었다. 분명 그게 선생님에게 익숙한 맛이니까. 기억으로서 그것이 전제에 있기 때문에, 과거의 맛과 비추어 「오늘의 커피는 쓰네.」 라는 감상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런데 「너는」. 「너는 굉장히 쓴 커피를 내리는구나」 라고 말했다. 왠지 내가 주어가 된 그 한 문장에서 크레바스로 떠밀려난 것 같은 차가움과 깊은 어둠을 느꼈다. 그 바닥의 깊이를 헤아리며 왠지 걸렸던 점은 선생님에 대한 평가로 썼던 〈얼빠진 부분이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혹시 더 다른 말로 표현되어야 할 사실이고, 무언가 크게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조금씩 나의 검증은 시작되었다. 매일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지 묻고 그 반응을 개인 노트에 계속 기록해 나갔다.

〈1일째, 커피에 설탕을 두개 넣은 걸 마신다.〉

〈2일째, 「설탕도 우유도 다 사도야~!」라며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3일째,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4일째, 「아침에는 블랙이었으니 저녁에는 밀크로」라며 우유를 넣은 걸 마신다.〉

〈5일째, 설탕과 우유를 모두 넣어 마신다.〉

〈6일째,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7일째, 「사실 나, 블랙밖에 안 마셔.」라며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날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블랙밖에 마시지 않는다는 말도 장난으로 한 농담이라면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위화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 위화감과 지금까지 쌓아온 작은 요소들을 결합하여 나는 이미 어떤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그것을 참이라고 한다면 모든 수수께끼가 맞물린다. 맞물리지만, 그것은 주판으로 도출되는 단순한 이론 위에 있는 게 아닌, 숫자보다 무기질적인 사실..... 그런 생각이었다.

결국 이긴 것은 호기심이었다. 아직 태양도 잠들어있을 무렵, 나는 첫 기차를 탔다. 틀림없이 그것을 확인하면 결정적이 되고, 어쩌면 비서라는 계약도 끝나 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전철 문이 닫혀도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샬레 앞에 와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비서 카드를 스캔하고 있었다.

일단 이유는 「약점을 잡고 싶어서」 라고 정했다. 다만 사실은 키보토스라는 세계 밖에서 온 가장 큰 변수로, 그 존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취약성으로, 그 선생님을 둘러싼 세계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는 그 중 가장 작은 나라는 존재의 크기를 선생님이라는 자로 재보고 싶었다.

5시 59분. 집무실 안쪽, 지금까지 들어간 적 없던 침실로 들어간다. 이곳도 총학생회 본부, 13층 방과 마찬가지로 놀라울 정도로 간소했다. 침대와 그 옆에 놓인 엔드 테이블만 덩그러니 있고 테이블 위에는 자명종과 장부만 놓여 있다. 남자의 침실에 혼자 침입하고 있다는 상황은 나이를 생각하면 아마 좋지 않겠지만, 이 호기심은 그런 이론의 한계 밖에 있었다. 여섯 시 정각, 나갈 때라는 듯이 울리기 시작하는 자명종을 멈추고 나는 선생님의 어깨를 흔든다.


"선생님, 선생님. 일어나세요."


뭔가 중얼거리더니 선생님은 천천히 눈을 뜨고 두어번 깜박였다.


"아침이에요, 선생님."


그리고 피가 통한 뺨부터 귀까지 단번에 붉어졌고, 평소에는 조용한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며,


"너는...... 누구야?"


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아아, 역시 그렇구나.


『아비도스 사막』이라는 단어에 대한 반응이 매일 다른 것도,

엘리베이터에서 보이는 키보토스의 풍경을 매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도,

매일 같은 타이밍에 커피를 내리는 것에 대해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너는 굉장히 쓴 커피를 내리는구나.」라는 말도,


그리고 나, 『우시오 노아』가 선생님의 비서로 뽑힌 것도.


그의 기억이 일몰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의외로 선생님의 『비밀』을 알게 된 뒤에도 비서로서의 업무는 계속되었다.

아침 저녁 하루 두 번 샬레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기록을 이어간다. 달라진 점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나의 선생님에 대한 평가를 덧붙인 것.

〈선생님은 당일을 끝으로 기억이 사라져 버린다〉

아주 조금이지만, 〈얼빠진 부분이 있다.〉 라고 기록했던 걸 후회했다. 하지만 샬레에 온 지금도 선생님은 가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넘어지기에 좀처럼 그것을 완전히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노아."


샬레의 집무실, 그 한구석. 한 면에 펼쳐진 하늘을 비추는 스크린이었을 자리에는 열 장 정도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중앙에 〈나는 『선생님』이다.〉 라는 것과, 〈『우시오 노아』는 내 비서다.〉 라는 것. 그 조금 위에 〈중요한 것은 포스트잇에 써서 여기 붙이기!〉 라고 내 글씨로 쓰여진 것도 있다.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한 게 엊그제인데 이미 창문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니 일 년도 안 돼 이 창문은 꽉 차버리겠구나, 라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중에는 유달리 눈길을 끄는 포스트잇도 있다.

〈샬레 앞 역 건물 안의 카눌레가 맛있어!〉

일기를 다시 읽을 필요도 없다. 어제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한 나는 문득 그날의 『커피 타임』을 다채롭게 하고 싶어 역 건물 안에 입점해 있던 빵집의 카눌레를 들고 온 것이다. 카눌레를 먹는 게 처음이었는지 선생님은 그 맛에 대단히 감탄하며 연신 「맛있어, 맛있어.」 를 반복해 5분가량 기록이 진행되지 않았다.


"아, 봐, 노아."


마침 선생님도 그 포스트잇을 눈치챈 것 같다.


"역 건물의 카눌레인가, 엄청 신경 쓰이네."

"네,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구나』 라고 하셨어요. 제가 나갈 때는 그 포스트잇이 없었으니 선생님이 혼자가 된 후에 살짝 덧붙인 거 같네요. 분명 어제의 선생님은 그걸 잊고 싶지 않으셨던 거겠죠."

"『살~짝』이라고 해도. 오늘의 나에게 들켰는데 말이야."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포스트잇을 떼어내고 선을 그은 후 다시 썼다.


〈샬레로 돌아올 때는 역 건물의 맛있는 카눌레를 산다!〉


"이걸로 매일 먹을 수 있겠네."

"어제는 제가 샀습니다만, 다음부터는 선생님이 사주세요♪"

"엑...... 그래도 그건 그런가. 카눌레 값, 경비로 처리되지 않으려나."

"포기하고 자비로 구입해 주세요. 그럼 오늘 업무 내용 확인입니다. 오늘은 아비도스 고등학교의......"


선생님의 기억이 매일 리셋되고 있다는 게 공유하는 비밀이 되었고, 기록력과 기억력을 높이 사서 채용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나에게는 다음 의문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어떻게 일을 해내는 걸까.

아비도스를 폐교 위기에서 구해낸 일은 선생님이 가장 최근에 해결한 큰일일 것이다. 아비도스생에게는 영웅담이라 할 수 있는 그 일을 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소속된 학원에서도 게임개발부가 현재 진행형으로 신세를 지고 있는 듯 하다. 공사 혼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방침 아래 그를 자신의 사생활에 반영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지만 자신과 가까운 학생이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근질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런 불안정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약한 존재――정신적으로 연약하다는 걸 아는 일반 학생은 나 뿐이지만――가 어떻게 총학생회장의 지명을 받았는지, 그리고 비서를 대하는 게 아닌, 『학생』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매우 궁금했다.

선생님과 만난 뒤로 호기심이 멈출 줄을 모른다.

「Curiosity killed the cat」

『호기심은 고양이도 죽인다』라는 말은 잘 안다고 할까, 엔지니어부의 고양이가 따끔한 꼴을 당하는 걸 자주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이라는 학원에 속해 있는 자신 또한 당연하다는 듯이 그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오늘 업무 내용은 이런 거에요. 그러니."


그래서 나는 그날 학원에 휴가를 신청했다.


"오늘은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잘 부탁해...... 아니 잠깐, 에에!?"




"어라, 선생님. 오늘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네."

"그러려나. 나는 항상 이런 느낌 아냐?"


맑게 갠 하늘 아래 공터 중앙. 토관 위에 앉아 있던 소녀가 그 체격의 가벼움을 연상시키는 발걸음으로 뛰어내리며 다가왔다.


"매번 제각각이잖아! 지지난번에는 5분 지각이었고, 저번에는 지각하지 않았지만 『더러워져도 괜찮은 옷으로』 라는 걸 깜빡하고 새하얀 셔츠를 입고 왔고!"

"하하, 미안미안. 오늘은 제대로 메모해서 더러워져도 될 옷을 입고 왔어."

"그건 알겠지만, 선생님. 절망적으로 머리띠* 안 어울리네......"

*鉢巻き 머리를 수건 등으로 동여매는 일, 또는 그 천


선생님이 머리띠에 대해 언급하는 건 오늘만 두 번째다. 내가 탈의실에서 나온 선생님에게 「어울려요.」 라고 말했더니, 「정말!? 그럼 매일 두를까」 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하루를 시작할 때 머리띠를 두른다!」 라는 포스트잇을 벽에 붙이고 있는 걸 보고 농담이었지만 이것도 재미있을까 싶어서 내버려두기로 한 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에서 정반대의 평가를 받은 선생님은 노골적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에에, 그럴수가...... 매일 두를까 생각했는데."

"아니~ 그건 아마 그만두는 편이......"


뺨을 긁으며 겸연쩍은 듯이 눈을 돌리는 그녀는 쿠로미 세리카. 아비도스 폐교대책위원회 소속 1학년생으로 회계를 맡고 있다. 선생님은 어떤 학생의 인물상을 말할 때, 「뭐, 착한 아이야.」 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마지막에 붙이니 자세한 평가는 스스로 고쳐 쓸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착한 아이』인 건 틀림없어 보이지만, 조금 츤데레틱한 사람이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선생님. 그 아이는?"


왼손을 허리에 짚고 반대쪽 오른손이 나를 향한다. 움직임이 깔끔하다. 빚더미에 앉은 아비도스 고등학교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그녀가 숱하게 해냈을 접객 덕분일까.


"아, 소개가 늦었네. 이쪽은 우시오 노아씨. 평소에는 내 보좌를 맡아주고 있어."

"안녕하세요, 우시오 노아입니다. 노아라고 불러주셔도 괜찮아요."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의 이름을 댈까 조금 고민했지만 선생님이 그걸 의도적으로 덮는 듯 하여 나도 따랐다.


"그렇구나. 그럼 꽤 높으신 분이거나 하는 걸까?"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나를 발밑에서 위로 훑은 뒤 급변해 환한 미소로 이렇게 선언했다.


"뭐 그래도 아르바이트 하는 동안은 높으신 분 같은 건 상관없으니까! 물론 아르바이트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러니 오늘은 잘 부탁할게, 노아씨!"

"아. 아뇨. 저는 뒤에서 기록만 할게요."


나는 미리 정해놓은 대사를 돌려준다. 오늘은 운동하러 온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선생님의 평소 행동을 관찰하는 게 목적이다.


"그런 모양인데. 오늘은 둘이서만 힘내볼까."


쿠로미씨는 조금 얼굴을 붉히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 괜찮지만! 이쪽이 더 익숙한 걸."




"세리카~ 앞으로 얼마나~?"

"아까 그 말 한 지 5분밖에 안 됐다니까! 입보다 손을 움직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났다. 태양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동안 선생님은 「앞으로 얼마나」 를 다섯 번, 물 마시러 쉬는 걸 일곱 번, 몸을 좌우로 비트는 운동을 열두 번 하고 있다.

한편 쿠로미씨는 선생님이 쉬는 걸 보면 엉덩이를 걷어찰 정도였고, 그 외의 시간은 묵묵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체력이 없다.〉 고 쓰면서, 쿠로미씨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력가.〉 라는 평가를 덧붙였다. 자기 학교의 빚 따위, 말하자면 졸업한 후엔 상관없는 일이 돼버리는데 그걸 분골쇄신하여 갚으려는 모습은 조금 눈부시게 보였다. 일단 도와주는 형태이긴 하지만, 이 정도 열정에 맞추려면 역시 선생님이 좀 더 진지하게 임했으면 좋겠다고 외야이면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런 그의 모습에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어서 그녀는 선생님의 태도를 어딘가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자신도 선생님을 놀릴 때, 선생님에게 농담할 때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까. 포커페이스는 대인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에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라는 것은 자기 평가일 뿐이고,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어쩌면 저렇게 『알기 쉬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한, 그리고 동급생과 이야기하는 한 눈치채고 있다고 느낀 적은 없다. 단지, 이 타이밍에 그런 두려운 생각이 스쳐지나간 것은, 「남의 언행을 보고 제 버릇을 고친다」...... 분명 우연이 아닐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미로운 고찰 대상을 발견한 시점에서 나도 풀 뽑는 걸 돕기로 했다. 관측자로서 있는 것 만으로는 결국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테고 관측자, 즉 비서로서의 내가 아닌, 『학생』 으로서의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쿠로미씨와 같은 곳에 서지 않으면 기록할 수 없다고 느낀 것이다.


"어라, 노아! 도와주는 거구나."

"이대로는 커피를 마실 시간이 없겠다고 느꼈기에. 하나 빚지는 거니까요."

"빚!? 빚이 생겨버린 건가......"

"아, 그럼 노아씨, 이 목장갑 써."

"감사합니다, 쿠로미씨."

"세리카로 괜찮아. 그럼 나머지 반은 기합 넣고 간다."


두 사람은 뿔뿔이 흩어져 풀을 뽑아나간다. 처음에는 끝의 한 줄을 뽑고 끝나면 다음 줄로 이동하던 나도 그걸 따라 무작위로 눈에 띄는 잡초를 뽑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방법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두 시간 동안 이 작업을 계속하는 선생님과 쿠로미씨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최적화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이 된 뒤에도 문득 고개를 드니 선생님이 쉬고 있었고, 「선~생~님~」 하며 불렀더니 쿠로미씨와 딱 겹쳐서 둘이서 얼굴을 마주보고 한참을 웃었다. 결국 효율이 올랐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채 그대로 작업을 계속했고, 충분한 시간을 남겨둔 채 공터의 잡초는 모두 정리되었다.


"좋~아, 끝났다~! 노아씨, 고생했어."

"네, 세리카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바이트가 끝난 축배 대신 페트병의 물을 부딪쳤다.


"어, 내 거는?"

"어라, 계셨군요, 선생님."

"물 잔뜩 마셨잖아! 선생님은 물 금지!"

"그건 좀...... 목이 바짝 말랐다구."

"농담이야, 농담! 자, 이거. 선생님도 수고했어."


병을 기울이며 문득 눈길을 주자 쿠로미씨는 물을 가슴에 안은 채 선생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붉은, 새빨간 눈동자다. 몸을 움직이면서 생긴 체온은 나도 감돌고 있다. 그러나 그 붉은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열기는 분명 그 뿐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그럼에도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열기라고――그도 그럴 것이 그것 하나만을 제목으로 한 책이 몇 권이나 이 세상에 나왔고, 나는 그 중 일부를 읽었으니까――직감으로 알았다.

심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 감정이 솟아나는 곳은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이라는 걸 직접 그 눈을 들여다보지 않았는데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이럴 때 로맨틱이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계속 생각해왔다. 그런 기대를 하며 마음의 뚜껑을 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공포』라는 두 글자였다.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지금 바로 물을 마시고 있는 당신 앞에서 오로지 선생님을 생각하는 소녀가 자신의 심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알기 쉽게 얼굴에 보이던 그 열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에 그걸 눈치챘다고 해도.

내일의 선생님이 그걸 알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나만은 잊지 않으려고 썼다.

〈쿠로미 세리카씨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라고.




한 장 한 장 늘어나는 포스트잇을 보고, 창문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며 선생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번에 흥신소68에 식량을 보낸다.〉

이것은 26일 전, 사무실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게 된 게헨나 학원의 조직, 흥신소68이 공원에서 노숙하게 됐기에 식량을 보내주자고 얘기했던 일.

〈엔지니어부 부실, 입구 옆에 있는 우산꽂이는 건들지 마!〉

이것은 그저께. 부실에 방문한 선생님이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우산꽂이에 가져온 우산을 꽂았더니 금세 그것이 분쇄기에 넣은 것처럼 박살난 일. 아무래도 우산꽂이형 리사이클기였던 거 같다.

〈곰고기 맛있게 조리하는 법〉

이건, 반년하고 나흘 전. 붉은겨울 특별반에 소속된 학생이 「만약 곰을 잡게 된다면 어떻게 조리하는 게 좋을까요」 라고 물었을 때 답변하기 곤란했던 일.

모두 완벽하게 기억한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전부를.

하지만 이제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포스트잇과의 차이 때문에.

창문을 앞에 둔 채 눈꺼풀을 감는다.

눈꺼풀을 감아도 여전히 나는 창문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 창문에는 집무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내가 선생님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날, 내가 선생님에게 가르쳐준 것은 『나의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이 기록법이라는 것은 사실 나 그 자체였다.

벽으로 다가가면 포스트잇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저는 선생님의 비서입니다.〉 〈『선생님』은 조금 얼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비서로서의 일은 아무래도 지루하지 않을 듯 합니다.〉 ......

그 포스트잇을 떼어내 손에 쥐면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내가 선생님과 처음 만났던 그날 연방수사본부 13층, 복도보다 더 어두운 부실, 안락의자, 그리고, 환상적인 죽음의 연출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까지.

눈꺼풀을 떴다.

〈문의 5보 뒤, 2보 오른쪽은 넘어지기 쉬우니 주의!〉 라는 포스트잇을 떼낸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넘어지기를 반복하길 닷새째, 내가 그 장소를 기록할 것을 제안했을 때 선생님의 묘한 미소, 바닥에 표시를 하기 위해 비품실에서 꺼낸 테이프, 그리고 그것을 잘랐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가위.

〈이번에 흥신소68에 식량을 보낸다.〉 라는 포스트잇을 떼낸다.

이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것이 선생님이 보고 있는 세계였다. 흥신소68의 누군가와 이야기했을 때 느낀 공기 온도. 나눈 시선과 언어화되지 않은 만큼 나타난 표정의 재빠른 변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 그런 무대를 수놓는 계절의 향기.

그 모든 것을 깨닫고 미래에 전하고자 포스트잇 속에 15자로 한껏 마음을 담았던 26일 전, 선생님은 이미 죽었다. 15자로는 전하지 못했던 포스트잇 밖으로 크게 튀어나간 기억들을 전부 길동무로 삼아 죽었다.


반년하고 사흘 전의 선생님도 죽었다. 그저께의 선생님도 죽었다. 어제의 선생님도 죽었고,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았던 선생님도 내일이면 죽고 만다.

그런 선생님의 『최선을 다해 살았다』 라는 증거를, 선생님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형태로 기록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누군가의 안에서, 내 안에서 살아 있었어야 할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 안에서는 이미 죽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걸 선생님에게 전해도 오늘의 선생님은 이제 몇 시간밖에 살지 못한다. 내일이면 나는 또 그저 비서인 우시오 노아로 취급되겠지.

그런 생각의 끝에서 한 가지, 굉장히 사소한, 그러면서도 가장 큰 의문이 떠올랐다.


"노아."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선생님이 정장을 벗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서있었다. 갑자기 깨어난 청각으로부터 천천히 후각이 돌아왔고, 미각이 그 뒤를 이었다. 쉬익하고 물이 끓는 기분 좋은 소리만이 방에 울리고 있다. 커피 냄새가 어렴풋이 풍기고 그 향기를 맡은 조건반사인지 침이 달다.


"뭔가 고민하고 있던 거 같은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선생님."


선생님은 「그런가」 라고만 말하고, 부엌으로 갔다.


"있지, 오늘은 내가 저녁에 커피를 내려도 될까?"


『오늘은』 ? 지금 선생님은 분명히 『오늘은』 이라고 했다. 마치 매일 밤 내가 커피를 끓이고 있다는 걸 아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 사이에서 오직 그것만이 암묵적인 양해로 창문의 포스트잇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매일 변함없이 계속되던 습관.


"선생님, 제가 매일 밤마다 커피를 내리는 걸 기억하시나요?"


그 말은 들은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가슴 주머니에서 손에 들어가는 크기의 장부를 꺼냈다. 그것은 선생님의 침실 엔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다.


"특별히 중요한 건 여기 쓰고 있어."


특별. 선생님 안에서 내가 내리는 커피는, 혹은 커피를 내리는 나는, 일몰과 함께 죽어버리는 기억이 아닌 계속 살아가는 기억으로서 간직하고 싶은 특별한 것이구나. 그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왠지 나는 느껴보지 못한 설렘을, 느낄 리 없는 설렘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외의 모든 것――그 장부에 적혀있지 않은 모든 것은 사라져도 되는 기억인 것이다. 그런 냉혹한 사실을 너무나도 쉽고 명확하게 마주치게 되었다.


"됐어, 노아. 카눌레도 말이야, 자."


어제의 내가 맛있다고 하며 먹었던 그것이, 오늘의 나에게는 아무래도 매력적이지 않은 모양이라 뛰기 시작한 마음의 웅성거림에 맡기고 몸을 움직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억이 펼쳐진 창가로. 뒤에서 선생님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면서 한 장의 포스트잇을 집어들었다.

〈노아에게 빚진 게 하나 있다.〉

〈선생님에게 받을 빚이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은 분명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선생님은 저에게 한 가지 빚이 있어요."

"선생님, 대답해주세요. 선생님은 어째서 『선생님』 을 선택하셨나요?"


이런 기록을 남기게 한다면.

이런 기억을 심어준다면.

학생의 얼굴도, 이름도, 매일 서류를 다시 봐야 인식할 수 있다면.

나에게 『특별』이란 말로 저주를 내릴 정도라면.

어째서 선생님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선택하셨나요?

선생님은, 심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이지만 이 질문을 한 걸 후회하게 되는 고요한 회색의 슬픔이었다.

그리고 멀리. 구름 너머 하늘 저편, 저기 떠 있는 헤일로보다 위를 내다보는 듯한 푸르고 애틋한 눈을 차가운 창문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는 건 말이지."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키보토스 밖에 있을 때 버릇이야. 그래서 하루도 거른 적이 없어."


가슴에 넣어뒀던 손바닥만한 장부를 펼치며 선생님은 계속한다.


"여기서부터는 이 장부에 적혀 있는 내용이야. 나는 이제 선생님이 된 이유 같은 건 기억나지 않고, 그때 안고 있었을 적극적인 열기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아. 지금 내게 있는 건 소극적인 삶과 언젠가 죽은 내가 남긴 저주 뿐."

"키보토스에 오기 전부터 내 기억은 이랬어. 계속 병동에 누운 채로,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가는 듯한 나날을 타성에 젖어 살았지."

"나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감정 변화에는 상응하는 설득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매일 필사적으로 미래의 나에게 오늘 살아있는 증거를 맡기려고 노력했던 나조차 눈물 젖은 베개에서 깨어나 그것이 어째서 젖어있는 지를 일체의 감정조차 전달되지 못하는 장부 기록으로 가르쳐야 했던 그런 날들이 십 년 동안 계속됐으니, 그건 이미 타성에 젖어 살게 될 이유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

"그래서 자신도 놀랐지. 10년에 걸쳐 정성스레 얻어맞으며 축 처져버린 감정을 만들어낸 성격 나쁜 신의 노력이 한순간에 불쑥 망가지는, 그런 우연한 계기가 있다는 사실에."


선생님은 메모지를 새로 한 장 뽑아서 거기에 적어 넣었다.

〈누군가의 엔드롤에 실리고 싶어〉


"무슨 책에서 읽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고 메모조차 남아 있지 않아. 단 한 문장으로 나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 누군가의 엔드롤에 자신의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증거나 다름없으니까. 이미 죽어버린 어제의 나도 분명 누군가의 마음이 기억해 주고 있고,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온 내 조각들이 이어지든 아니든, 그 결과 지금을 살고 있는 나, 혹은 그 밖의 누구라도 좋아. 누군가의 앞에 아련한 신기루로 내 상이 떠오른다면."

"난 그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선생님은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된 거야."


그건 분명 저 장부에 적혀 있는 내용일 테고.


〈선생님은 오만합니다〉


지금의 선생님은 그런 동기 같은 건 기억 못하시겠지만.


〈제멋대로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특별함을 해석했을 뿐인데.


〈자신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특별하다고 간단히 말합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오늘의 선생님은 앞으로 몇 시간 뒤에 죽으니까.


"아, 커피. 미지근해졌네. 다시 데울까......"

"어차피 잊어버릴 텐데."

"노아......?"


이 목소리를.

이 눈을.

이 얼굴을.

이 온도를.

이 냄새를.

이 눈물을.

기껏해야 내일의 당신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어차피 잊어버릴 텐데. 특별하다고 쉽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우시오 노아씨, 좋은 아침."

"『노아』면 돼요. 선생님. 오늘은 샬레 내 업무입니다."

"고마워, 그럼 밤에 봐!"

"네,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 방금 돌아왔습니다. 빵집이 조금 붐벼서..... 주무시고 계시네요."


"선생님, 커피를 타왔어요."


"선생님, 조금 식었으니 이제 마시기 좋을 때에요."


"선생님, 선생님."

"으응...... 아......"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선생님. 이미 커피도 다 식었고..."


"음, 그러니까."


"너, 누구였더라?"







"아, 우시오 노아씨! 오랜만이네요, 무슨 일로...... 오셨...... 나요..."

"나나가미 린 행정관을 만나게 해주세요."

"힉...... 어, 어어, 그, 그럼 이쪽으로 와주세요......"

"어, 그러니까, 13층입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행정관, 알고 있었나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우시오 노아 비서."

"선생님 기억의 지속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을."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럼 다시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어째서 제가 비서로 뽑혔죠?"

"후보가 될 수 있는 모든 학생 중......"

"진짜 이유는?"

"......당신의 뛰어난 기억력으로 선생님이라는 존재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선생님을 뇌에서 추출해 본뜨면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선생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우시오 노아씨, 당신의 『있는 그대로』 를 기록할 수 있는 뇌라면 그게 가능하니까요."







저는 선생님의 비서입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지금을 사는 선생님을 기록합니다.〉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우시오 노아씨, 좋은 아침."

"『노아』면 돼요. 선생님. 오늘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죠."

"산책? 너에게는 업무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다...... 라는 모양인데, 그게 업무 내용이야?"

"네, 제가 오늘 정했습니다."




"선생님, 이게 역 건물의 카눌레고, 이것은 주문한 냉동 카눌레에요."

"이게 그? 뭐라고 할까, 전혀 모양이 다르지 않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듯이 카눌레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돼요. 저는 이쪽 준비를 할 테니 선생님은 커피를 내려주세요."

"맡겨줘. 내가 밤에 커피를 내리는 건 처음 아냐?"

"그렇지 않아요. 오늘이 두번째예요."







좀 더.





"우와아......! 크네......!"

"여기는 3년 전에 자연과 공존하는 도시를 지향하기 위해 만든 인공연못인 거 같아요. 수질까지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으니 수영도 할 수 있답니다."

"헤에......! 노아, 수영해 볼래?"

"아뇨,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뛰어들어 보시는 건 어떤가 하는데요."


"......"


"선생님, 의외로 수영할 줄 아시네요."






좀 더.









좀 더.













좀 더.













"저기, 노아."


어제와 마찬가지로, 엊그제와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손놀림으로 커피를 내리던 내 손을 멈춘 것은 너무도 연약한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어느 날, 업무가 끝나고 헤어진 뒤, 혼자가 된 선생님이 어렴풋이 중얼거리던 말을 나는 마음 한가운데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언젠가, 자신조차 잊어버리는 걸까〉

어째서인지 지금, 그 말이 떠올랐다.

주전자에서 뿜어져나오는 증기가 높게, 슈욱 하고 높게 뻗어 나간다.

아아, 오늘이구나. 그때부터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가는 선생님에게, 마침내 오늘 그 무너짐이 따라잡혔다는 걸 목소리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 또한 그걸 깨달은 듯 했다. 『오늘의 선생님』은 본래 모를 것이다.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공포를 안고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조차 잊고 지금을 살아가는 등 뒤에서 절벽이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 사이에 선생님 안쪽에 있던 본래의 적극적인 삶에 대한 집착이 그걸 직감하게 한 듯했다.


"무슨 일이세요, 선생님?"

"오늘은 이제 자려고."

"커피는."

"오늘은, 됐어."

"그렇다면 선생님이 주무실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고마워."








"있잖아, 노아."

"왜 그러세요, 선생님?"

"사실 부끄러워서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서워. 계속, 무서웠어."








"노아, 무서워. 내 손톱 끝에 붙은 아주 조금의 차가움이 손끝으로 옮겨오고 그런 조금의 어두움이 언젠가는 몸 전체까지 퍼져나가 이 마음까지 닿아버리는 게."

"괜찮아요. 곁에 있을게요."

"포스트잇 보는 게 두려워.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전부 사라져 버렸어. 그 뒤에 있었을 네 온기가. 이런 『온기』라는 말도 내 망상일 뿐이고, 사실은 거기에 온기조차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드는 내가 두려워. 상상으로 채우는 열기로는 손끝에서 퍼지는 차가움을 이길 수 없었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게, 계속 두려웠어. 이런 몸의 떨림도. 떨면서 계속 키워온 너에게 전해야 할 말들도. 잊혀지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워."

"그럼, 적어도."










"손을."

"손을 잡고 있으니까요."

"지금 살아계신 선생님은 진짜예요. 사라져버린 감정 따윈 이제 잊어주세요. 지금 저의 이런 온기만은, 그것을 느끼는 선생님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짜니까요.

"게다가, 『분명 마음이 기억해주니까』.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언젠가의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 가."










"사실은 말이지."


"사실은 커피가 마시고 싶었어."


"네가 내리는 특별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어."


"원하신다면 가져다 드릴게요."


"부탁할 수 있을까?"


"네."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선생님은 고양이 혀니까 조금 식히는 게 좋겠죠."




"선생님."






"선생님."






그날, 허망하게도 내 비서로서의 일은 끝을 고했다.






"아, 우시오씨! 오늘도 오셨네요!"


병원 자동문을 빠져나가자 쾌활한 목소리가 나를 맞이한다.


"네, 지나가는 길이라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면회를 허락해 달라고 평소처럼 말한다.


"매일 병문안 오시네요. 음, 혹시 특별한 분이라거나 그런 건가요?"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발언을 눈치챘는지 그 사람은 당황하면서,


"앗, 죄, 죄송해요! 깊이 질문하는 건 룰 위반이죠." 라고 말을 이었다. 특별한 분.... 인가.


"――아뇨."

"아뇨. 그저 아는 사이예요."


내가 찾는 병실은 3층 맨 안쪽에 있다. 어린 아이끼리 쫓아다니는 복도를 지나 막다른 골목에 있는 방을 두 번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소독약과, 은은하게 풍기는 새 붕대 냄새. 창문으로 흘러오는 잔잔한 바람이 방에 누워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든다.


"당신은, 매일 와주시는 거 같네요."

"네, 과거에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혹시 우시오 노아씨, 인가요."


이 사람을 찾아온 횟수를 기억하는 것은 두 자릿수를 넘어서고 그만두었다. 그런 지금에야 내 이름이 나온 것에 허를 찔린다. 뭐라고 대답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침구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남성은 상체를 일으켜 비치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장부를 집어들었다.


"변덕스럽게――정말 변덕스럽게도 오늘 아침 저는 이 노트를 읽었습니다. 새빨간 타인의 자서전..... 이라고 할까 일기일 뿐입니다만, 몇 번이고 『우시오 노아』 당신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이것을」 이라며 그는 그 낡은 장부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젠 제가 갖고 있어도 소용없는 물건이니까요. 우시오 노아씨, 당신이 가지고 계세요. 제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선생님』이라고 불린 사람 같은 무언가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간단히 끝내고, 나는 그 손때묻은 표지를 열었다.




〈나는 기억이 매일 사라져 버려.〉

〈특별한 것은 여기 기록하는 것.〉

〈7월 2일. 신록이 푸르다. 분명 내일은 더 선명하겠지!〉

〈7월 3일. 바람이 상쾌하다. 문병 온 사람에게서 꽃을 받았다. 엄청 예쁘다.〉

〈7월 4일. 물을 갈아주는 걸 기억해 둔다. 어제의 나는 땡땡이 친 거 같아.〉

〈7월 5일. 오늘은 밥이 조금 단단했다.〉





〈8월 20일. 꽃이 시들었다.〉

〈9월, 둘 줄었다.〉




〈1월 1일. 또 새로운 해가 온다.〉




〈특별한 것 따위는, 하나도 없다.〉







〈언제 죽을 수 있을까. 이런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엔드롤에 실리고 싶어』 ! 이거다! 이거라고!〉

〈살고 싶어! 어쨌든 살고 싶다고 지금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어! 3월 13일, 오늘 이 날이 혁명의 날이야.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되는 거야!〉

〈선생님이야. 선생님이 되어 제자의 기억에 남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노력이든 하겠어. 이 열기만은 잊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받은 꽃 향기라든가, 이미 베여버린 바깥 나무라든가, 점점 줄어드는 병실 동료라든가, 그런 것들이 있었던 거 같아. 지금의 나는 과거의 그 광경을 전혀 상상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아. 기억이 안 나도 상관없어! 이것만. 이것만은 부디 잊지 말아달라고, 내일의 나에게 전하고 싶어.〉


〈전해줘. 부탁이야. 선명하게 켜진 이 불꽃을, 이 열기를. 이 달리고 싶은 감정을! 지금까지 감정은 조금도 문자에 실리지 않았어. 하지만, 이 열기만은! 제발.〉



〈부디, 전해지길.〉






〈언젠가의 나에게. 열기는 보상 받았어.〉


〈제자가 종종 꽃을 전해주러 와. 한때 창문에 놓여있던 꽃이 이제는 없듯이 이 꽃도 언젠가는 시들어 버리겠지. 하지만, 내가 자랑하는 학생의 마음은. 그 마음속에서는, 꽃도 나도, 반드시 계속 살아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샬레라는 기관에 배속되는 거 같아. 이곳에서도 『선생님』으로 불려. 익숙해.〉

〈환영받는다면 레드 카펫을 걸어보고 싶어. 밑져야 본전이니 말해보자.〉


〈『우시오 노아』씨가 내 비서를 맡아준다는 모양이야. 든든해.〉

〈우시오 노아씨는, 굉장히 기억력이 좋아. 착한 아이야.〉


〈그녀에게 기억이 사라져 버리는 걸 들켰어. 이제 숨길 필요는 없어.〉

〈여기에 쓰는 건 줄어들지도 몰라. 푸른 하늘이 새 장부니까.〉


〈카눌레는 엄청 맛있어! 역 앞 빌딩에서 파는 물건. 포스트잇에도 썼으니까 또 먹을 수 있어.〉

〈내일은 꼭 넘어지지 않을거야.〉




〈검증 : 우시오 노아는 귀가하는 시간에 딱 맞춰 커피를 내리고 있을지도. 내일의 나, 부탁해.〉

〈정말 딱 맞았어. 대단해!〉




〈그녀에게 미움을 샀을지도 몰라〉

〈나는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

〈어쩌면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호감을 전한 적이 있을지도 몰라〉

〈아아, 알고 싶다.〉

〈하지만 이제 다른 사람이야. 오늘 미움 받은 나도, 이제 앞으로 몇 분만 있으면 죽어서 내일은 없겠지.〉


〈마음을 창으로 삼을 수 없을까.〉

〈얼음이 얼어붙은 것처럼 단단해.〉

〈조금씩 깎아주겠어.〉

〈『커피를 매일 아침 내린다.』 고 새겨져 있어. 그 아득한 옛날의 기억은 마음에 기록되어 있어.〉

〈그러니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깎아가면, 또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안 되는 거 같아.〉




〈희망이 없어.〉

〈자신이 사라져 가.〉


〈뒤에서 이미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져.〉





〈우시오 노아씨에게


적어도 이 장부를 읽고 있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한 적이 있었어.

이렇게 전달할 수 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네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은 저주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아. 이런 어리석은 자를 제발 용서해주길 바라.


너를 사랑했던 언젠가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야.

새빨간 타인으로서 밖에, 너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꼭 전해야겠지.


너를 만나서, 네가 비서로 있어줘서, 곁에 있어줘서, 나는 정말 행복했어. 지금까지 고마워.〉






"우시오 노아씨."


"내가 커피를 잘 내리는 모양이야."


"모처럼이니 한 잔 마시고 가지 않을래?"



그 향도,

커피 그라인더를 돌리는 조용한 모습도,


컵에 따르는 몸짓도,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김도,


애수를 자아내는 쓴맛도,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신맛도,


그 모든 것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선생님이었다.




기록은, 상처를 동반한다.

기억은, 아픔을 동반한다.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남긴 상처를, 나는 전하고 싶다.



그렇게 바랐다.








"선생님."

"무슨 일이죠?"

"선생님은 어째서 선생님이 된 거야?"

"후훗, 얘기하면 길어지는데요."

"또 그렇게 넘긴다니까."

"당신이 만약 선생님이 되고 싶다면 가르쳐 줄게요."

"에~ 그럼 아직 됐어."

"그때는 이 노트를 보여줄테니까."

"시시해. 아. 커피 나도 마실래."

"네. 여기."

"선생님의 커피, 매일 맛이 변하지 않네. 요렁 같은 거 있어?"

"요령인가요......"


"그것도 비밀이에요. 하지만, 언젠가."


"언젠가, 알려줄게요."






나의 기억을. 『선생님』의 기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