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 채널

본디 저는 정치적 성향을 내비치지 않는 성격이지만 얼마 전 이 채널에 올라온 게시글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적어 봅니다.


얼마 전, SNS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과 같은 것을 좋아할 때의 쾌감은 좋지만, 남과 같은 것을 싫어할 때의 쾌감은 더더욱 좋다."


그렇습니다. 남과 함께 무언가에 대한 감정을 배출하는 것에는 쾌감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아함의 감정일 때보다 불쾌의 감정일 때 우리는 심리적 만족을 크게 느낀다는 것. 저는 이 상황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을 물을까 합니다. 위의 문장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상해 보이나요, 혹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은 이 상황을 이상하게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겉으로 표출한다는 것이 그 대상의 내외적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점과 같은 다양한 이유에 따라, 현대 사회에서 혐오는 올바르지 않은 행동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방금의 상황을 옳지 않다고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 위의 문장이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도 계실까요? 당연합니다.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수만큼 많을 겁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이 물음의 답변으로써 저만의 추측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무리를 형성해 왔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감정에는 무리에 대한 소속감이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무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무리에 소속된 인간의 침입을 막아야겠죠. 무리에 진입하는 그 사람이 좋은 의도를 가졌는지, 나쁜 의도를 가졌는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무리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고, 이 자세는 경계심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무리를 경계함으로써 자신의 무리가 변질 혹은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그때의 인간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은 의심으로, 의심에서 배척으로 이어지죠.


저는 비로소 이때 배척을 위한 혐오 감정이 뇌내 체계에서 정당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다르게 생긴, 다르게 행동하는 무리를,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고 불쾌의 감정을 내뱉게 된 것입니다. 혐오 감정을 표출한 경우에는 다른 무리를 멀리하고 자신의 무리 구성원과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감정적 이득이 발생할 수도 있기도 하지요.


물론 선사시대에는 공동체 형성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보니 배척과 혐오는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사회가 발전하며 생깁니다.


흔히 과학자들은 인간의 진화 속도는 아주 느리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단맛과 기름진 음식을 예로 들자면, 이것들은 각각 당과 지방을 다량 포함하고 있어 섭취 시 생존에 있어 유리하므로 인간은 자연스레 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게 풍족한 지금은 당과 지방에 대한 접근성이 극도로 높아져 이것들이 보이는 대로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아직도 단맛과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죠.


전 혐오 감정도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혐오를 하든 안 하든 생존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혐오를 옳지 않다고 여기는 현대 사회에 비추어 봤을 때, 맨 위 문장에서 언급한 혐오 감정의 역설은 과거의 본능이 현재의 사회질서와 위배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본능이 현재의 사회질서와 위배"된다는 것. 이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우리의 사회질서는 인간의 본능을 따라야 할까요, 아니면 정의를 따라야 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인간의 본능을 사회질서를 통해 억누르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정의를 향해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혐오 감정의 역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를 자기 절제와 관련짓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다수의 연예인들이 외모를 가꾸기 위해서, 인간의 본능에 따라 다량의 음식을 섭취해 지방으로 비축해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식욕을 억제하고 절제하며 마른 체형을 유지하죠. 그리고 그 연예인의 팬들 중 어느 정도는 그 분의 다이어트 성공을 축하합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자습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고3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하였을 때,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찬사를 보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는 사고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를 보아, 인간의 본능으로 남아 있는 혐오 감정을 (표출할 수도 표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라는 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본능을 절제하는 것, 저는 이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혐오는 무조건 배제해야 할까요? 물론 전혀 아닙니다. 다만, 저는 혐오 표출의 인정에 대해 조건을 붙였으면 하는 바입니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해하는 행동에 관해서만 혐오 표출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학살 행동은 그 누구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인간을 함부로 다뤘기 때문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인간 학살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반한 행동에 대해서 혐오 감정을 내뱉는다 해도, 그 어떤 사람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인류 보편적 가치에 반했다는 객관적이고 모두가 납득 가능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저는 이러한 사유에 대해서는 혐오 발언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잠시 샜지만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혐오 정서라는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전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만으로, 한 개인의 의견만으로 세상이 바뀔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회는 어마무시하게 거대하고, 그런 만큼 아주 서서히 움직입니다. 따라서 혐오 감정이라는 본능을 억제할 필요성에 대해 사람들은 늦게 깨달을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려는 사고방식이 퍼짐에 따라 혐오 표현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즉, 세계 각지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혐오 감정은 긴 기간 동안 사그러들지 않을 겁니다. 되려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이 바로 이 글의 제목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파시즘의 재도래입니다.


전 세계에서 혐오 감정이 빗발치고, 앞날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은 한참 전부터 이미 진행중인 일이었습니다. 성별 혐오, 국가 혐오, 인종 혐오, 사상 혐오 등등 이미 우리 주변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혐오의 주된 대상인 소수자들은 어떻게 이를 대처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직 명확히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흐름, 인간의 본능과 사고회로 등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져 효과적인 대안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각자의 방법대로 파시즘의 시대를 헤쳐나가야 합니다. 현재는 그 대안으로 소수자 간의 연대가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효과적이라고 장담하기도, 그렇다고 이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으리라고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것 마냥 각자의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런 슬픈 현실이 우리 소수자의 현재 및 가까운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서로에게 행운을 빌 수 밖에요.


혐오 감정의 소멸 그리고 소수자들을 비롯한 이 세상에 대한 정의가 이뤄지길 바라며, 이상 저는 글을 마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무래도 새벽에 적은 글이다 보니 감정에 치우쳐 적은 부분 혹은 논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에 담긴 저의 개인적인 사상은 아직 명확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 대해 이견이 있으시거나, 혹은 여러분만의 생각이 떠오르신 분은 자유롭게 정중히 댓글을 남겨주세요. 소중히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