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라는 그라모스 철기군의 잔당을 성노예로 샀다고요? 무명객님 제정신입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호들갑도 유분수지. 무시하며 솔글래드나 따르려는데 행상인 나찰씨의 낯빛이 심상치 않다.
장난을 치려는 게 아니었나? 이쯤 되자 이쪽도 덩달아 기분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평소 존댓말을 입에 달고 살던 나찰씨가 이런 말을 할정도라고? 대체 뭔데? 그라모스 철기군이 뭐 어쨌다고?


"하... 무명객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확실히 어린 아이겠지요?"

"예? 아. 어리다면 어린 아이에요."

"몇 살이었죠?"

"글쎄요..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어요. 그라모스 철기군이 곤충 떼 재난 때 만들어졌으니 아마 그쯤에 만들어졌다고 보면 꽤 먹지 않았을까요? 근데 생긴거만 보면 10대.."

"이런 미친!"


내가 로리콘 기질이 있다지만 욕은 좀 너무하지 않나. 사람 무안하게.

"십대 모습을 한 그라모스 철기군이라고?"

그런데 나찰씨는 내 성적취향에 놀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명객님, 정신 차리세요. 아직 집에 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구매를 취소하시지요."
"취소라뇨? 이미 열흘 전부터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데요?"
"이런 멍청한...! 무명객님은 그 반디라는 그라모스 철기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긴 왜 몰라. 늘씬하고 예쁘고 변신 멋지고 허리 잘 흔들고.... 생각해보니 잘 모르긴 하네.

"호들갑좀 그만 떠시고 왜 그러는지 말이나 좀 해주세요. 대체 왜 그러는거에요?"
"하아. 알겠습니다. 제가 쉽게 설명해드리죠. 기본적으로 그라모스 철기군은 곤충 떼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갑병입니다."
"그거야 저도 알죠."
"자. 그럼 잘 생각해보죠. 태어날때부터 전투를 위해 유전자를 개조해서 만들어진 전사가 수많은 곤충 떼로부터 최소 몇십년간 살아남았다면? 내로라하는 군단들도 한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경지에 올랐겠지요."
"음...진짠가요?"
"제가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거기다 무명객님이 들인 반디라는 철기군이 십대의 여아 외형이라면... 제가 아는 선에서는 단 한명... '스텔라론 헌터 샘' 밖에 없습니다."

듣다보니 식은땀이 흐른다.

"그럼 왜 노예로 잡힌 건데요?행성채로 부수고다니는 스텔라론 헌터 샘이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힐 리가 없잖아요."
"잡힌 게 아니라 잡혀준 거죠.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으시면 곤란합니다."
"잡혀줬다? 대체 왜죠?"
"일상에 권태로움을 느낀 거죠.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거고."
"그렇다고 노예를 자처하나요?"
"성정이 좀 변태적인 철기군일수도."

그러니까, 나찰씨의 말은 어느 변태적인 그라모스 철기군이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미삼아 노예를 자처했다는 소리였다.
그게 말이 되나?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바람에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술잔에 담긴 솔글래드의 탄산이 빠져가는 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내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나요? 노예 각인을 찍어놓았으니 무슨 수를 써도 저한테 반항하지 못해요."
"무명객님은 행상인을 안 해서 다행입니다. 그런 머리로는 일 년 안에 패가망신 했을 테니 말이죠."
"그건 또 무슨 소리죠? 알아듣게 설명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무명객님은 노예 각인을 누가 새겨준다고 생각하죠?"
"그야 운명의 노예 엘리오가...?"

어, 잠깐만. 스텔라론 헌터들은 각자 엘리오와 어떤 거래를 했기에 엘리오를 따르고 있는 것 아니었나? 샘의 거래 내용이 설마...?

"자신의 수하에게 부여한 노예 각인이 정말 의미 있을거라고 보는건가요?"
"그럼 왜 노예 각인을...?"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무명객님을 가지고 노는 거라고."

섬칫 어깨가 떨린다. 내가 근처에 가기만 해도 벌벌 떠는 반디가 사실은 날 가지고 노는 거라고?
말도 안 돼.
그래.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나찰씨는 나를 골려주기 위해 헛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솔글래드를 비워버렸다.

*

열차에 들어오자 거적대기나 마찬가지인 옷을 입은 반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서오세요 주, 주인님.."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 어눌한 말투는 여전히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그래도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나찰씨의 호들갑 때문인지 오늘은 뭔가... 주의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식사부터 하자."
"네, 네에..."

공손하게 대답한 반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러 떠났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간 뒤 간단한 세면을 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식탁에는 반디가 한 요리들로 진수성찬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반디가 먹을 음식은 식탁 아래에 마련되어 있다. 어제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대충 비벼넣은, 개밥만도 못한 것이다.
반디를 한 번 흘겨본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먹자."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디가 바닥에 납짝 엎드려서 개밥을 먹으려 들었다.
평소와도 같은 행동이지만 오늘은 뭔가 껄끄럽다.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한 다음 반디를 붙잡아 일으켰다.

"오늘은 식탁에 앉아 먹도록 해."
"네, 네에..? 아니, 아니에요... 저 같은 되먹지 못한 쓰레기는 감히 주인님과 겸상할 수 없는 거예요... 부디 주인님의 발치에서 어제 주인님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처리하게 해, 해주세요..."
"괜찮아. 혼내지 않을게."
"그, 그런..."

반디는 묘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깨작깨작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기쁘지 않은 건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마쳤다.

"개척자 스페셜."

에프터로 먹기 위해 개척자 스페셜을 가져오라 시키니 반디는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칵테일을 들고 돌아왔다.
문제는 중간에 발이 엇갈린 모양인지 넘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와장창! 내가 손수 만든 아끼는 칵테일잔이 박살나며 노면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주, 주인님 제가 죽을 짓을..!"

반디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복한다. 익숙한 뒷머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어떠한 벌이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으나 이번 한 번은 봐주기로 하였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됐어, 내가 치울테니 너는 방으로 들어가 있어."
"네..? 주인님..?"
"괜찮다고 했잖아."
"하지만, 하지만 저는 벌을 받아야...!"
"토달지 마."

내가 말을 끊어버리니 반디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창백해진 것이 아니다. 싸늘해진 것이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나는 분명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주인님은 어쩐지... 상냥하시네요..."

짜내듯 내뱉은 말. 반디는 그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때를 노려서 반디의 방에 설치해두었던 감시용 비콘을 가동시켰다.
혹시 몰라 헤르타씨에게 받아뒀는데 이번 기회에 써보는 것이다.

끼이익ㅡ.

문이 열리는 소리. 뒤이어 반디가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는 게 보인다.
반디는 공허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더니 경멸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제 역할도 제대로 못하네. 건방진 새끼가. 태워 버릴까."

더없이 냉소적인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설마. 설마 나찰씨가 했던 말이 전부 정답이었나?
이 그라모스 철기군은 학대당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나한테 팔려온 거라고? 목격한 진실이 너무나 터무니없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낮게 침음하였다.

"다른 주인을 알아봐야 하나..."

반디의 손에 피어오른 불꽃이 날카로운 예기를 띈다.
이런 씨발! 당황한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근처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하나 꺼내들고 계단을 타고 올라 반디가 있는 방을 벌컥 열었다.

"엣...?"

방금 전까지 나를 씹고 있던 주제에, 반디는 순진무구한 눈방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 주인님... 어째서... 오늘은 쉬게 해주신다고..."

처음에는 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역겨운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티를 내면 내가 저 그라모스 철기군에게 죽는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하지? 머릿속 주판을 최대한 굴리던 나는 손에 개목걸이가 잡혀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서랍 속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마음이 바뀌었어."

최대한 침착하게. 나는 평소와 같은 억양을 내뱉으며, 반디를 향해 개목걸이를 집어던졌다.

"오늘은 알몸 산책이다. 버러지 같은 년."
"아, 알몸 산책이요...?"

반디가 경악한다. 아니, 경악을 연기하고 있었다. 입 꼬리가 미묘하게 히죽거리는 게 그 증거였다.

"주... 주인님 그것만은... 제발 용서해주세요..."

미친년. 나는 억하심정이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말문을 열었다.

"알몸 산책 이후에는 성고문 시간을 갖도록 하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정신나간 그라모스 철기군을 조교해야만... 아니, 조교하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