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간은 날 잡아두곤 몇 분째 말을 하고 있다. 과거의 예술이 어쨌느니 현대의 문화산업이 어쨌느니 하는 그런 이야기였는데 전혀 흥미롭지도 않았고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에 서툰 것 같았다. 지식을 나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나열했는데 마치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나눠준 잡지의 빼곡한 글씨를 강제로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그는 정말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을 늘어놓는 걸까?

언젠가 책에서 읽은 문구가 떠올랐다. 우둔한 자는 후회의 말을 늘어놓고 똑똑한 자는 적당한 조언을 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나는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진정한 미덕은 침묵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문득 학창시절 나에게 미술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진정으로 지혜로웠던 것 같다.

 

선생님은 언제나 조용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온갖 잡소리를 늘어놓아도, 혹은 자거나 몰래 딴짓을 하더라도 선생님은 언제나 묵묵히 교과서에 적힌 것들을 가르쳐주셨고 가끔은 짧은 영어를 사용하거나 컴퓨터로 사진을 보여주셨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았고 큰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시끄럽고 난잡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왜 가끔 느끼지 않는가.

선생님들이 어린 학생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 눈빛.

 

그가 정말 특이하리만큼 조용한 사람이라고 느낀 것은 일련의 사건 덕분이었는데. 그때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 반 날라리 둘이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헛소리를 해도 미술 선생님은 자기네들을 가만히 놔둔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기에 미술 시간만 골라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가끔은 둘이서 싸우기도 했는데 그날은 그들의 싸움이 절정에 이른 날이었다.

 

“야 이년아! 니가 빌린 거나 갚아라.”

 

날라리 둘 중 하나가 아주 큰소리로 날라리 친구에게 소리쳤다. 온 교실이 울릴 만큼 쩌렁쩌렁하게 소리친 탓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도 놀란 듯이 그 애들을 바라보았다. 

 

“니 애미다 이년아!”

 

욕을 먹은 친구 날라리가 대답하면서 날라리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윽고 둘은 엉키고 설켜서 싸우기 시작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선생님은 나지막하게 싸우지 말라고 말했지만 날나리 둘의 고함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그 둘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날라리 중 하나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팔을 잡힌 날라리가 선생님의 얼굴을 팔꿈치로 내리쳤고

선생님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그의 눈 옆으로 가늘게 피가 흘렀다.

 

“이년들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옆 반에서 수업을 하고 계시던 수학 선생님이 미술실의 문을 반쯤 부수면서 들어오셨다. 날라리 둘은 수학 선생님을 보자 그 자리에서 싸움을 멈췄다.  

 

“이년들이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수학 선생님은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날라리 둘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나가셨다. 미술 선생님은 허탈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남은 수업 시간 내내 미술 시간에 벌어졌던 일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두 명의 날라리들 때문이 아니었다. 미술 선생님 때문이었다.

정말 특이하면서도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미술 선생님의 태도는 그를 만날 때부터 날 흥미롭게 했지만 오늘 벌어진 사건 덕분에 그 호기심이 절정에 달한 것이었다. 나는 미술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날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좋은 날이 될 듯했다. 

 

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미술실로 달려갔다. 미술 선생님은 아까 다친 부위를 냉찜질하면서 컴퓨터를 쓰고 계셨다. 그는 들어오는 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무슨 일 있니?”

 

그가 말했다. 

 

“아니요 선생님. 궁금한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다치신 곳은 괜찮으세요?

 

내가 말했다.

 

“아 그래. 크게 안 다쳤어. 조금 까진 것뿐이야.”

 

그가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뭐가 궁금한 거니?”

“선생님. 전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뭐가 다르다는 거니?”

“선생님은 언제나 조용하시잖아요. 애들이 듣던 말던 계속 수업을 하시고 시끄러워도 화를 내시지 않고요.”

“선생님이니까 수업을 하는 건 당연한 거지.”

“아무도 안 듣는데도요?”

 

내 질문에 선생님은 허허 소리를 내시며 웃었다. 그리곤 대답하셨다.

 

“난 학생들을 믿는단다.”

“믿는다니요?”

“그 애들이 언젠간 알게 될 거라고.”

“뭘 알게 된다는 건가요?”

 

선생님은 다시 웃으셨다. 

 

“얘야. 난 가르침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정말 중요한 건 자신의 자유의지야. 자유의지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그 의지로 살아가거든.

가르침은 그 자유의지가 생기고 난 후에 필요한 거야. 난 아이들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편이란다.

정말 중요한 건 그 자유의지는 누군가가 가르쳐준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거지. 몇몇 선생님들은 그 의지를 심어주려고도 하는데, 자신의 의지가 누군가에 의해서 생긴다니. 언어적 모순이 아닐 수 없구나.”

“전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알 필요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단다. 그저 선생님의 헛소리니까. 그냥 무시해버리거라.”

 

곱씹어 본다면 그의 말들은 난해해서 도통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미술작품 같았다. 그가 자주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뒤로 기회가 될 때마다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대답해줬다. 사실 그의 말 중에 내가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대단히 추상적이었고 그 뜻을 알기가 어려운 말들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의 말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사실 그에게 끌림을 느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미술에 심취한 사람들은 다 이런 것일까? 그는 고갱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는데 하루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정말 멋진 작품이야.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린 거지?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엔 할 수 없구나.

선생님은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른 경외감에 휩싸인단다. 사람의 존재 그 자체인 작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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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엔 작은 테니스코트가 하나 있다. 미술 선생님은 퇴근 후 매일 그곳에서 테니스를 쳤는데 볼 때마다 혼자 벽을 향해 공을 치고 계셨다.

10분, 20분이 지나도 선생님은 계속 공을 치는 것을 반복했고 그 모습에 또다시 알 수 없는 흥미가 생긴 나는 테니스코트로 향했다. 

 

“선생님. 테니스 치시는 것 좀 봐도 될까요?”

 

내가 물었다.

 

“아 그래. 그런데 집에 늦게 가도 되는 거니?”

 

그가 테니스를 치면서 말했다.

 

“오늘은 좀 늦게 가도 돼요.”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나는 관중석에 앉아서 공이 벽에 튕기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공이 벽에 부딪히는 곳도 똑같았고 선생님의 자세도 똑같았다.

주변 하늘은 노을을 받아 붉게 빛났고 사방은 조용해서 공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퉁퉁거리며 들려올 뿐이었다.

 

“너도 한번 쳐보는 게 어떠니?”

 

선생님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마침 한번 쳐보고 싶어지려던 참이었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나에게 테니스라켓을 건넸다. 그의 흰머리 끄트머리에 땀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멀리서 볼 때보단 흰머리가 많았다.

얼굴 곳곳에 옅은 주름이 가득했지만 제법 잘생겨 보였다. 난 문득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이 궁금해졌다. 

 

“살살 치거라. 조금만 힘을 줘도 공이 붕 뜰 거야.”

 

나는 공을 쳤다. 공은 붕 떠서 담장을 넘어가 버렸다.

 

“주워올게요 선생님.”

 

“아니야. 몇 번 만 더 쳐보거라. 공은 나중에 가지고 와도 괜찮단다.”

 

나는 다시 공을 쳤다. 이번에도 공은 담장을 넘어갔다.

 

“다시 쳐봐도 되나요. 선생님?”

“그럼. 마음껏 치거라 공은 많으니까. 아. 여기 물렁물렁한 공이 있는데 이걸 한 번 쳐보지 않으련?”

 

선생님은 공 더미에서 물렁물렁한 공을 골라 나에게 던졌다. 나는 물렁물렁한 공을 쳤다.

가까스로 벽 끄트머리에 맞았지만 다시 되돌아오는 공을 쳤을 땐 담장을 넘어가버렸다.

 

“선생님. 공 좀 줍고 올게요. 더 이상은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테니스코트를 나가서 담장 뒤쪽으로 갔다. 그곳엔 공 두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머지 하나를 찾기 위해 낙엽 더미 쑤셔보기도 했지만 그 어디에도 공은 없었다. 누가 마법이라도 쓴 것 같이 뿅 사라진 것이다. 

 

“선생님. 공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내가 테니스코트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럼 이때까지 공을 찾고 있었던 거니?”

 

선생님이 말했다.

 

“물렁물렁한 공이 없어졌어요. 선생님이 아끼시는 것 같아서..”

“아냐. 괜찮아. 공은 많단다.”

“그래도 물렁물렁한 공은 하나뿐이잖아요.”

“하나뿐이라도 상관없단다. 그저 공일 뿐이야. 마음 쓰지 말거라.”

 

그는 웃으면서 나에게 라켓을 건넸다. 나는 다시 라켓을 쥐었다. 

 

“다시 쳐보는 건 어떻겠니? 못 쳐도 상관없단다. 공이야 넘어가면 다시 주어오면 되고 없어지면 다른 공을 쓰면 되니까.”

 

나는 라켓을 휘둘렀다. 공은 다시 담장을 넘어가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공을 주우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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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은 드디어 길고 길었던 현대 문화산업에 대한 설교를 끝냈다.

그가 이렇게 긴 연설을 끝내고 흡족해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는 정말 자신의 연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어때 여보? 재미있지?”

 

그가 말했다. 

 

“그래요. 여보.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는 게 어때요?”

 

내가 말했다.

 

“그럽시다. 나도 마침 배가 고팠는데. 뭐 먹고 싶어요?”

“난 팥빙수가 땡겨요.”

“그래요. 팥빙수 먹으러 가요.”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웃었다. 나는 그가 웃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