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달빛이 쏟아지는 밤. 이스마엘은 좌석에 앉아 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고, 달은 만월인 너무나도 상쾌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무언가 잘못 먹은듯이 불편했다.


"...하아."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구료."


"으아앗?!"


이스마엘은 화들짝 놀라 돌아보다 거의 나자빠질 뻔했다. 겨우 자기 몸을 가눈 그녀는, 그제서야 누가 말을 걸었는지 볼 수 있었다.


"아니, 이상 씨...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아...미안하오. 다들 자러 갔을 시간에 이곳에 있기에..."


"후우...심장마비 같은 일로, 관리자님 보고 시계를 돌려달라기엔 너무 어이없잖아요."


"으음..."


이상은 머리를 조금 긁적이며, 이스마엘 건너편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데 그래서 왜 갑자기 이 시간에 나오신 거에요? 설마 사람 놀래키는 취미가 생긴 건 아니겠죠, 돈키호테 씨나 할 짓을..."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료."


"네?"


"대체 왜 그렇게 근심 섞인 얼굴로 앉아있던 것이오? 그래도, 떨쳐낸 것이 많을 터인것을."


순간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스마엘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녀는 무언가 쏘아붙이기 일보 직전인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의 얼굴은 풀리고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미안하오. 말하기 싫은 것이라면..."


"아뇨. 말씀하신 대로, 저도 좀 더 달라져야 하는 것이겠죠."


"그래요. 달라져야 하는데..."


"새로 관측된 거울세계 때문이오?"


"......"


얼마 전, 이스마엘이 새로 얻은 인격, 그리고 그 거울세계.


***


"허억...! 바, 방금..."


<......>


"후우...방금, 그건..."


<...이스마엘.>


"아, 아뇨...관리자님, 괜찮아요. 그저...잠시 숨 고를 시간이..."


<그, 그래...>


"저 인격은......전에 히스클리프 씨와 이상 씨의 인격들을 봤을 때 설마 했지만..."


"후우, 아니에요. 우선은, 이 나침반을 따라가겠다고 했으니. 당신을 믿으니까요, 관리자님."


***


"...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그래도 쉽진 않더라고요."


"싱클레어 씨가 그 쥐어들 자의 인격을 보았을 때의 반응이 생각나더군요. 그때는 완전하게 이해를 못했지만..."


"본인의 최악의 가능성과 동화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테니 말이오."


"뭐, 그런것도 있지만..."


이스마엘은 다시 한번 밖을 내다보았다. 비록 육지로 올라온지는 좀 되었지만, 그녀의 눈에 아른거리는 달빛은 마치 파도와도 같았다.


"거울은...가능성을 비추잖아요?"


"그렇소만."


"그럼...저도 저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걸까요?"


"......"


"아무리 희박하다고 해도. 거울은 자신을 비추는 것이잖아요?"


"그럼 저도 저렇게, 모두의 마음을 휘어잡아 버리고, 사람을 저의 인어로 만들어버리는...그럴 가능성이 제게는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토록 닮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떨쳐내겠다 생각했는데..."


"왜...다른 가능성이 나올 수는 없었던 걸까요? 왜 하필 저에게..."


이상은 잠시 침묵했다. 같이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밤 늦게 집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잠시 비추었다.


"이스마엘 양."


"아...괜찮아요. 그저 누구한테라도 이야기 하니 좀..."


"도박을 해본적이 있소?"


"......네?"


너무나도 갑작스런 질문에, 이스마엘은 방금 전까지 어둡던 분위기는 완전히 잊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이상을 바라보았다.


"아니...로쟈 씨라면 몰라도..."


"뭐, 한두 번 정도는 가벼운 내기를 해본적은 있지 않소?"


"그야...그렇긴 하지만..."


"그런 내기할 때, 본인이 믿는것은 항상 확률이오. 동전이 앞면이 나올 확률. 제비가 당첨이 될 확률. 공이 제대로 굴러갈 확률 등."


"그럴 때마다 도박사들은 입을 모아서 말을 하오. '이번에는 반드시 될 것이다. 운은 내 편이다.'"


"하지만 정작, 정말로 운이 그들 편을 들어줄 확률은 얼마가 되오?"


"...적죠."


"그렇소. 그럼에도 그들은 그 조그마한 가능성을 확실함에 가깝게 믿고서는 내기를 강행하오. 관점에 따라, 그것은 용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그건 어리석음의 극치오."


그들이 말하는 사이 달은 조금 더 높이 떠올랐다. 은은한 달빛에 이상의 얼굴이 잠시 버스의 창문에 비쳤다.


"이스마엘 양. 가능성을 맹신하지 마시오. 본인의 가능성이 반드시 자신의 것이라 믿다가는, 정말 자신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으니."


"하지만..."


"무엇이오?"


"이상 씨는요?"


이스마엘은 창 밖에서 눈을 돌려, 이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상 씨는, 거울 속의 날개를 찾으셨잖아요. 그것이 본인의 가능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소만."


"그런데 가능성을 맹신하지 말라니,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음. 오해의 여지를 만든 것 같소, 이스마엘 양."


"가능성을 맹신하는 것은 피해야 하오. 허나...가능성을 부정해서도 안될 테지."


"...그러면 대체..."


"잠시 생각해 보시오. 싱클레어 군의 가능성 중에는, 본인이 쥐어들 자가 되어, 수많은 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학살자가 있소. 허나 우리가 아는 싱클레어 군을 보시오. 과연, 그가 그 가능성을 따를 것 같소?"


"설마요."


이스마엘은 곧바로 대답하였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본인의 가족이 겪은 것을,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는 짓을 할 리가...절대로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잖아요."


"바로 그것이오."


이상 역시, 비로소 이스마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택."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겠지. 그리고 그 가능성들 중에는 너무나도 참혹한 것이 우리 안에 잠들어 있을수도 있소."


"허나 우리가 그럴 때 해야할 것은, 선택이오."


"상이와 마주하였을 때를 기억하오? 나는 그 자리에서 나의 날개를 펼쳤지만, 날아오르지 않을수도 있었소."


"네? 하지만 분명 그때, 거울은 본인을..."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새들이 전부 나는 것은 아니지 않소?"


"등에 날개를 걸치고서는, 평생 땅을 걸으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 혹은, 멀리 멀리 날아갈 수도 있소. 바로 그것이 선택이오."


"설령 거울이 내 날개를 비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날개를 움직여 비상하는 것은 결국 온전히 나의 몫이오. 나는 그 가능성에 희망을 보았고, 그래서 이를 움켜쥔 것이오."


이상은 몸을 기울여 이스마엘을 더 가까이 바라보았다.


"가능성을 맹신하지 마시오. 지금 본인의 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가능성을 부정하지 마시오. 본인이 나아갈 길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그저...바라보시오. 바라보고, 고민하고, 그리고 선택하면 되오."


"그대 역시, 그 적디적은 피쿼드호의 선장의 가능성을 잡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나침반을 보고 여행을 떠나는 가능성을 잡을 것인지...선택은, 그대의 몫이오."


잠시,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내, 이스마엘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는 달리 그저 가벼운 한숨이었다.


"...고마워요, 이상 씨."


"신경쓰지 마시오. 벗을 돕는 것은, 매우 이상적이기에."


"후훗."


"왜 그렇게 웃소?"


"아뇨. 그저, 제가 그 인격을 보았을 때 그 자리에 있던것은 관리자님과 파우스트 씨 뿐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를 알고 계셨나 싶어서요. 과연 누구한테 들었을까요?"


"......그건. 나는 그저..."


"이상 씨, 말은 참으로 청산유수지만, 거짓말은 잘 못 하시네요."


"다시 한번, 고마워요. 그리고, 관리자님께도 전해주세요. 감사하다고."


"이것 참, 본인의 부탁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당부를 들었건만."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선택한 나침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으니까."


"허어. 단테가 들으면 머쓱하겠구료."


"하하하."


깊어가는 밤 속에서, 둘은 나지막히 웃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볼께요. 내일도 열심히 일해야 할 것 같으니."


"윽, 본인은 요즘 거울 던전에서 쉬질 못한 것 같소..."


"그럼 지금이라도 더더욱 쉬셔야죠."


"음. 그래도 먼저 들어가시오. 달밤을 보고 있자니, 눈을 붙이지 않아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구료."


"그래요. 그럼 잘 자요, 이상 씨."


"고맙소."


이내 이스마엘은, 자기 방 쪽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이상은 잠시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작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한 통찰력이오, 이스마엘 양."


"허나, 그래도 전부 궤뚫어보지는 못했구료."


"관리자만 그대 생각이 마음에 있던 것은 아니었소만."


***


"그니까...좀 가서 이야기 해보라고."


"알겠소만...같이 가는것이 더 낫지 않겠소?"


"미쳤냐? 내가 가면 그녀석이랑 나 사이에 제대로 말이 되겠어? 나도 싫다고. 그나마 너라면 대화가 잘 될거 같아서 부탁하는 거지."


"허허."


"뭘 웃냐?"


"아니오. 그저, 조금 안심이 되었기에."


"안심은 무슨 안심...피곤해 죽겠네. 난 간다."


"음. 이 이상은 나에게 맡기시오."


"...너 진짜 그거 일부러 하는 거 아니냐고..."


***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이상의 주위를 달빛이 나지막히 감쌌다.


"역시, 좋은 벗들을 만난 것 같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