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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시계. 불.



...저기, 료슈. 


뭐냐.


최근 들어 생각한 거지만, 너 초반에 모가지 썰고 한 거에 비해서 요즘은 잠잠하더라.

사실 검 휘두르는 거 조금 좋아할 뿐인 착한 아이인 것 같기도 하고.


하? 내가 또 모.분하기라도 바라는 거냐, 시계?


(슬슬 버스의 광기에 적응한 싱클레어)

...알 것 같아요. 특히 최근에 새로 받으신 인격이...유모...메이드...츤데레...


이 자식은 E.G.O가 뒤틀리는 게 아니라 성벽이 뒤틀려서 뭔 붉은 혜성이 되어버렸네.

...하지만 마음에 들어.


미.새. 같으니...


네? 미안하니까 새 인격으로 교체해서 봉사해주신다고요?


시.발.(시시한 도발에 일일이 발끈할 생각은 없다.)


료슈는 말없이 버스 창가에 기대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지옥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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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넬슈 인격으로 정실 취급을 받으며, 작중의 수많은 또라이들에 비하면 사실 정상인이 아닌가? 라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료슈.

오늘은 그녀에게 남은 사실상 유일한 정체성인 "줄임말"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모.분.조.도.(모가지를 분질러야 조용해지지, 도야지 같은 놈들), 모.불.아.위.(모든 것을 불살라서라도, 아름다움을 위해.) 등등.

료슈는 이제까지 나온 모든 서브컬처 캐릭터 중에서도 독특한 말투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캐릭터다.


작품의 설정을 설명하고, 캐릭터의 생각과 감정을 묘사하고. 사소한 뉘앙스나, 무심코 흘리는 단어를 이용해 복선을 깔고.

대사는 캐릭터가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그렇기에 이미지를 통한 비언어적 표현이 가능한 만화에서도, 컷의 절반 이상을 말풍선으로 채우면서까지 가능한 한 많은 대사를 집어넣으려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료슈는 "만.단.지.예.(만물의 단축은 지고의 예술)"이라 주장하며, 이 관행을 거부한다.

독자에게 최대한 자세한 정보를 쏟아붓기는커녕, 알아들을 수 없는 줄임말을 쏟아내며 이해를 포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제작진은 어째서 료슈에게 줄임말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성을 준 것인가?

본 시계대가리는 그 답을 료슈의 모티브가 된 문학 《지옥변》의 저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서 찾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일본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하려면 따로 고찰글을 파야 하니 만.단 하겠다.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것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과 인물상이 어떻게 "줄임말"로 연관될 수 있는가, 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작품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있다면, 바로 "짧다"는 것이다.

미완성 장편소설도 있다고 하고, 딱히 장편과 단편의 구분이 명확한 시대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단편보다도 짧은 "엽편소설(葉篇小說)"의 범주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아쿠타가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거미줄》과 《라쇼몽》만 해도, 10페이지가 채 넘어가지 않는 빈약한 분량을 자랑한다.


어쩌면 료슈의 가슴이 빨래판인 것도 작품의 얇은 두께를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




...관리자님께서 료.고.파 스페셜 메뉴가 되셨으니 이 뒤는 제가 이어서 설명할게요.

이렇듯 "단편을 주로 창작한 작가의 성향이, 「말의 단축」이라는 형태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가 고찰의 첫 번째 결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너무 빈약...



료슈 씨를 말한 게 아니니 진정하세요!

아, 아무튼 료슈 씨에게 "줄임말"이라는 캐릭터성이 붙은 이유에 대한 또 다른 고찰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이에요.


바로 "믿을 수 없는 화자"이죠.


《지옥변》의 화자는, 화가 요시히데나 그의 딸이 아닌, 지옥변 그림을 의뢰한 영주를 섬기는 어느 하인이에요.

그는 영주에 대한 광적인 수준의 충성심과 존경심을 품고 있어, 작중 묘사는 일방적으로 영주를 선하고 훌륭한 인물로만 묘사해요.

--화자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믿으면, 영주의 본모습을 눈치채는 것이 불가능한 거에요.


다음으로, 《덤불 속》이라는 작품에 대해 짚고 넘어갈게요.

이 작품은 한 남자의 살인 사건에 대해, 이 사건과 연루된 자들이 검비위사(현대의 경,검찰 포지션의 관리)에게 증언하는 내용이에요.

문제는 이 증언이 전부 범인과 살해 방식이 다르게 묘사된다는 것이죠.

심지어 마지막에는 피해자인 남성의 영혼을 불러낸 영매의 입을 빌어 남성이 진술하는데...말하는 건 영매인 만큼 이 사람이 진짜 남성의 진술을 대신하는지, 아니면 영혼을 불러낸 척 사기를 치는 건지 독자는 알 길이 없어요. 

결국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게 작품을 읽은 독자의 결론이 되겠죠.


이야기가 조금 난잡해졌지만, 다시 료슈 씨에게 돌아가죠.

프문은 왜 료슈 씨에게 왜 줄임말이라는 캐릭터성을 부여했는가? 

원작인 《지옥변》이 그러하듯이, 료슈 씨의 "줄임말"은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넣기 위한 장치라는 해석이에요.


《Limbus Company》는 기본적으로 "단테"의 1인칭 서술자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요.

자아심도 등을 통해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단테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보여주죠.



즉, 누군가 각 잡고 거짓말을 하면, 기억상실이라 도시의 상식에 어두운 단테는 속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믿을 수 없는 화자"는 다름 아닌 저, 싱클레어가 될 수도 있어요.

저에게 료슈어(語) 통역기라는 캐릭터성이 붙기는 했지만, 사실 제가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는지 단테는 알 길이 없어요.

그냥 되는 대로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료슈 씨가 그저 귀찮아서 모.분 하지 않고 넘기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죠.


이제 "줄임말"과 "믿을 수 없는 화자"의 관계에 관해 조금 짐작이 가시나요?

「청소년의 인터넷 상의 줄임말은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그 세대만의 신조어라는 점에서 은어(隱語)의 성격을 띄며...」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적 있죠?


료슈 씨의 줄임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모.분이 모가지를 분지른다는 뜻인지, 모제스의 분수절정쇼를 보라는 뜻인지 어떻게 알아요? 

료슈 씨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알려주지 않는 한은, 설령 료슈 씨가 부연 설명을 덧붙여도 믿을 수 없죠.


료슈 씨는 지금 혼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은어, "줄임말"을 쓰고 있고.

그에 따라 모두가 료슈 씨의 줄임말에 대해서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된 거에요.


이게 스토리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될지, 애초에 활용은 될지도 알 수 없지만.

이런 해석을 해보았다, 정도로만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유언은 그것으로 충분한가?


아.


모제스는 그대로 연기를 한 모금 빨고 싱클레어의 포를 떴다.

1만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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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합리주의를 추구해서 "예술은 무조건 의식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는데, 

합리적=효율성=줄임말로 이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고.

덤으로 의식≒눈에 보이는 것만을 취급하는 예술 지상주의자들인 약지와도 연결되는 점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중간에 모제스 분수절정쇼는 뇌의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