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조선의 한 지방에는 백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있었다.


일 년 내내 칼날 같은 눈보라가 일어 인간의 출입을 금했던 그 산은 신령이 깃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 나라님조차 어찌할 수 없는 곳이었다.


허나 여기, 간덩이가 부었는지 그곳에 발을 디딘 한 쌍의 남녀가 있었으니.


잔뜩 겁에 질린 채 어린 핏덩이를 품에 안고 내달리는 꼴을 보아 필시 도망친 노비들이었다.


그들은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헤치고,

뼈를 때리는 물가를 건너,

저승과 맞닿은 절벽을 지나,

백산의 중턱, 설목이 울창한 숲에 다다랐다.


이 넓은 산속에 사람 찾기란 쉽지 않은 법.

이제는 숨 좀 돌릴 수 있으리라 안심하던 그때에.


"저기 있다!!"


쫓아오던 놈들은 험한 산길에 바싹 약이 올랐는지 저 멀리서부터 얼굴을 붉히며 죽일 작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 치들은 지치지도 않는 건가?!"


핏덩이와 안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찰나의 순간 생각에 잠겼던 남자는, 이내 자상한 얼굴과 목소리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여긴 내가 막아볼 테니 당신은 먼저 가도록 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안돼... 당신 없으면 우리 아이는... 나는 어떡하라고..!"


"백산을 넘어 옆 고을로 가면 한 씨 성을 가진 약초꾼을 찾아. 분명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싫어... 당신도 같이 가..."


"같이 갈 거야. 놈들을 따돌리고 나면 바로 뒤를 따라갈 테니 당신은 아이랑 먼저 가."


"여보, 제발..."


"선화야."


분명 서릿장처럼 차가운 손일 터인데, 자신의 뺨을 어루만져 주는 임의 손길은 녹아내릴 듯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상제야..."


"시간이 없어. 어서 가."


"......꼭 다시 만나. 약속해."


"약속할게."


흐르는 눈물을 참고 여자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몸 성히 만날 수 있을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옆 고을에 도착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하아."


홀로 남겨진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맨손으로 검과 활을 든 이들을 상대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겠는가.


평범한 이들이었다면 도망을 치거나 머리를 조아려 생을 구걸할 것이다.

허나 이 남자는 결코 그러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남자는 남편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주먹을 쥐고 있었다.



ㆍㆍㆍㆍㆍ

ㆍㆍㆍ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단잠을 방해받은 은백색의 여우가 뾰로통한 얼굴로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은 집채만 한 덩치의 산군이었다.


"시끄럽게 굴던 놈들은 비실비실한 녀석을 죽이고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기에 팔다리를 자르고, 마침 얼마 전 새끼를 낳은 들개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잘했구나, 헌데 내 거처에 침범한 이들이 사내들 뿐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해를 품고 있던 년이 하나 있었으나, 체력이 다 했는지 제멋대로 쓰러져서는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그대로 두면 다른 짐승들이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영호여."


안 그래도 기묘한 기운이 흐르던 일대가 한층 더 차가워지는 것이 등골을 타고 느껴졌다.


영호라고 불린 산군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머리를 조아렸다.


"내 그대를 참으로 아끼지만... 그대에게서 섬세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한탄스럽구나."


"송구합니다..."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어미는 무릇 열 남성보다 강한 힘을 지닌다고 한다. 만일 그자가 일어나 요깃거리라도 찾으려 든다면, 얼마 전 태어났다는 들개들이 참으로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겠느냐. 내 거처에서 내 아해들이 피를 보는 일 따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소신이 미천하여 심도 있게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됐다. 이미 잠은 다 잔듯하니 내가 가도록 하마."


"따르겠습니다."


여우는 그 길로 여자가 도망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핏물을 머금은 발자국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이 아팠을 터.

허나 다리에 오는 통증보다 가슴에 박히는 통증이 더 컸으리라.


"저것이냐."


"예."


설목 숲 사이 홀로 솟아있는 백색의 눈덩이.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 칼바람을 맞으며 미동도 않고 있었다.


"흠... 영호여, 아무래도 그대의 판단이 맞았던 것 같구나. 귀찮게 걸음하지 않아도 됐는데, 미안하게 되었구나."


"아닙니다. 산신께서 하신 말씀이 백번 지당한 줄 아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자가 아해를 품었다 하지 않았느냐. 어디에도 보이지..."


"응애애..."


아기의 울음소리는 차갑게 식은 여자의 품 속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호오..."


여우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꼬리를 흔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9개의 꼬리가 주변을 밝히자 여우는 이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아해가 살아남는 것도 아닐 터인데, 인간이란 참으로 미련하면서도 애틋한 존재로구나." 


여우가 아기를 안아들자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는 여우를 바라보았다.


"반갑구나. 애석하게도 네놈의 부모되는 이들은 모두 죽었다. 앞으로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여우가 아기에게 묻자 아기는 여우에게 손을 뻗었다.


"마음마... 맘..마!"


"무례한 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산신의 옥체에 손을 대느냐!!"


"두어라, 이 어린 것이 살자고 열심히인 것을."


"하... 하오나 산신님..."


"이 또한 무언가의 연이렸다. 내 거처에 침입한 놈이다만, 딱히 죽일 생각은 들지 않으니 지켜볼 수밖에. 허나 아해야. 아쉽게도 이 몸은 아직 젖이 나오지는 않는다. 다른 어미를 붙여줄 터이니 젖동냥이라도 하여 살아남아보거라. 짧은 인간의 수명, 잠깐 동안의 유흥 정도는 되어줄 거라 기대하고 있으마."


여우는 아기를 산군에게 넘기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들개들에게 데려가 형제가 늘었다 알리고 오거라. 나는 오래간만에 유라를 보러 가야겠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산군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여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산군은 다시 고개를 들어 아기를 바라보았다.


"후우... 가끔씩 산신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산군의 앞에 멀뚱히 앉아 산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기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이상하구나. 이상해."


산군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기를 조심스레 물어올려 들개들 무리로 걸음하였다.



ㆍㆍㆍㆍㆍ

ㆍㆍㆍ



그로부터 몇 번의 해가 지나고.

아이는 제법 자라 산등성이를 뛰어다닐 나이가 되어있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탓인지 또래의 남아들보다 뛰어난 체격에 제법 영특한 아이로 자라주었다.


허나 속세의 많은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이에게도 고민이 있어 보였으니.

하루는 보다 못한 여우가 아이를 찾아가 물었다.


"산을 벗어나지 말라 하였는데 이는 벗어난 것도, 벗어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곳이니 내 너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구나."


"미안해 여우야."


"무슨 일이지? 요 근래 상한 고기를 먹은 들개 같은 표정을 하고는 계속 시야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있지 않느냐." 


"그냥..."


"세상에 그냥이란 이유는 없다. 솔직히 고하거라."


"음... 내 이름 말이야."


"이름?"


"저 아래에 다른 아이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내는데, 나는 이름이 없잖아. 너도 날 아이라 부를 뿐이고. 영호 형님도, 유라 누님도 이름이 있는데 나는 이름이 없으니까..."


"이름이 뭐가 중한 것이냐. 나도 이름 없이 잘 살고 있다."


"너는 모두가 떠받들어주는 산신이니 그렇겠지!"


"나뿐만이 아니라 너의 형제나 다름없는 들개들도 이름 따위 없다."


"하아... 그래... 괜한 생각이겠지?"


아이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는 마을을 뛰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흠... 그렇게 이름이 가지고 싶은 것이라면 내가 지어주면 그만이지 않느냐."


여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풀 죽어있던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짝이는 눈으로 여우에게 달라붙었다.


"정말?! 정말로 나한테도 이름이 생기는 거야?!"


"에잇! 떨어지거라. 너도 다 컸으니 조금 더 여인을 대하는 태도를 고쳐보는 것이 어떠하느냐. 너무 서슴없이 여인의 품에 안기려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알겠어! 고칠 테니까 이름!"


"이 녀석이 고작 이름을 가지는 게 그렇게 좋은가... 그럼... 주워서 기른 놈이니 주기는 어떠하냐."


"......"


아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여우를 바라보자 여우는 왠지 모를 머쓱함에 귀와 꼬리를 움찔거렸다.


"노... 농담이지 않느냐. 애초에 이름도 없는 내게 좋은 이름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괜찮아! 너에게 받은 이름이니 엄청 기쁜걸. 물론 이상하지만 않으면 말이야..."


"읏..."


여우는 가슴속이 간지러운 생소한 느낌에 살짝 당황했는지 풍성한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좋은 이름을 주면 좋을 텐데.

이럴 줄 알았다면 인간들이 살아가는 속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는 것이 좋았으려나. 

유라의 의견을 물어볼까?


여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둘을 스쳐 지나갔다.


꽤나 길어진 아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자 아직은 앳된 두 볼이 붉게 물들어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백..."


"응?"


"추위 속에 붉게 물든 네 볼짝이 겨울에 핀 동백꽃과 닮았구나. 그러고 보니 네놈과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처럼 붉게 물들어있었지."


"동백... 응! 마음에 들어! 고마워 여우야!"


동백이란 이름을 얻은 아이는 기쁜 마음에 여우에게 안겨들었다.


"하... 내 분명 태도를 고치라 하였거늘..."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정작 여우도 동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그럼 동백이여. 이제 그만 올라가도록 하자꾸나. 인간들의 마을에 모습을 보여봤자 좋을 것 없다."


"응. 역시 그렇겠지?"


동백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여우는 눈치를 채고 말을 이었다.


"유라에게 말을 해둘 터이니, 관심이 있다면 네놈도 인간들의 언어나 삶, 셈을 배워보는 것이 어떠하느냐?"


"어... 어?! 정말 그래도 돼?!"


"내 거처에 몇 없는 인간이니, 써먹을 수 있다면 써먹는 것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지. 너도 더 자라고 나면 유라처럼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알았어! 꼭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게! 고마워 여우!"


"그래."


여우는 동백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 어리고 귀엽기만 한 이 아이가 어떻게 자라날지.

어떤 짝을 만나 어떤 미래를 살아갈지.

조금은 기대가 되면서도.


'조금... 이상한 기분이군..."



ㆍㆍㆍㆍㆍ

ㆍㆍㆍ



다시금 여러 해가 지나고.


동백이 건장한 사내가 되었을 때.

여우는 멱을 감고 있는 동백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 제법...'


탄탄한 몸에 갸름한 얼굴.

속세에 있었다면 마을의 여인들을 홀리고 다녔을 법한 용모에 여우는 감상을 멈출 수 없었다.


'아무리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 한들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은 조금... 아니 많이 어긋난 짓이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과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을 번갈아가며 꼬리를 흔들어대던 여우는 이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오~ 동백이 제법 남자다운데?"


어느샌가 나타난 유라가 동백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사이좋게 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라가 조금 더 나이가 많다고는 해도, 둘 다 한창때의 인간 남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철렁이는 기묘한 기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여우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여우는 노골적으로 동백을 피하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면 불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기에.


그를 마주하지 않으면 괜찮겠지.

애초에 인간과 깊이 연관되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이제는 떨어질 시기야.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길 반복했지만, 한숨은 나날이 늘어날 뿐이었다.


"산신님..."


주인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는 산군 또한 마음이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녀석과 마주할 때 산신님께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니, 필시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겠군... 유라 녀석에게 도움을 받아야겠어.'


산군은 자신이 나서서 주인을 다시 웃게 해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이 어떤 일을 불러일으킬지는 모른채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지금껏 뭘 들은 것이냐?"


산군은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유라의 집에 쳐들어가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요컨대, 영호님께서는 동백이를 산에서 내쫓고 싶다는 얘기이신 거잖아요?"


"그래, 최근 놈과 마주할 때마다 산신님께서 산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쉰단 말이다."


"하아... 영호님..."


"왜 그러느냐?"


유라는 산군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았지만 눈을 가린 맹인의 시선을 산군이 알아챌 일은 없었다.

이에 유라는 포기한 듯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지금 동백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속세로 내려가 세상을 배우고 오기에는 괜찮기는 해요. 그리고 그러는 편이 산신님께도 도움이 될 수도 있구요."


"음, 그렇지. 녀석이 이곳에 없으면 산신님께서도 다시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으실 수 있을게야."


"딱히 그런 건... 에휴... 아니에요."


"...?"


"어쨌든 영호님께서 말씀하신 건 잘 알겠어요. 동백이에게는 제가 잘 말해볼 테니 영호님은 산신님을 잘 보필해 주세요."


"음, 알았다."


만족한 얼굴을 한 산군이 돌아가고, 유라는 창문 밖 하늘을 바라보며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산신님도 꽤나 소녀스러운 점이 있으시다니까...'


오늘 떠오른 달은 어딘가 조금 쓸쓸해 보였다.



ㆍㆍㆍㆍㆍ

ㆍㆍㆍ



"여우."


"동백?"


잠에서 깨어난 여우의 앞에는 동백이 앉아있었다.


"......여인이 자는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잘못된 행위다."


"미안, 미안.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 정도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한동안 마주치지도 못했으니까."


"그래, 끝났으면 어서 가ㄹ... 어?"


"나, 꼭 훌륭한 사람이 될 테니까. 여우도 나 응원해 줘야 해?"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게 무슨..."


무슨 일일까.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떠난다니, 왜?


여우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열심히 굴려보았지만, 지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데 나오지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가버린다고?


"동백이여,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잠깐ㅁ..."


"산신님, 동백이도 성인이 되었으니 장래를 위해서라도 속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도 적절하니 동백이가 잘 해낼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라의 말이 맞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놈도 다 컸으니 자기 밥값을 할 줄 알아야죠. 겸사겸사 제 짝도 찾을 나이이지 않습니까."


"아......"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단련시킨 놈입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놈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유라와 산군이 하는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여우는 하얘졌던 머릿속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구나... 알았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여우의 귀와 꼬리는 축 처진 채 바람에 흔들거릴 뿐이었다.


유라는 죄송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었고, 산군은 주인의 상태가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돌아오는 것은 언제쯤이 될 것 같..."


여우가 작은 목소리로 동백의 귀향을 물으려 했으나 이내 막히고 말았다.


"한동안, 아니 조금 오래 못 보겠지만 건강히 지내야 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의 손은 칼에 베인 상처보다도 뜨거웠다.


언제 이리 컸는지.

품에 안아 내려보았던 아해가 지금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니.


"잘 다녀오거라."


"응."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만남은 생각보다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다.


여우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고 또 참았고, 시야에서 동백이 사라지자마자 폭포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에 모든 걸 내려둔 채 깊이 흐느꼈다.


이 날, 조선에는 기록적인 대폭설이 내려 하늘이 노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고, 국가적으로 하늘을 위로하는 제사가 이루어졌다.



ㆍㆍㆍㆍㆍ

ㆍㆍㆍ



입춘.

세상은 봄을 맞이하였으나, 아직 한겨울을 지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이제 그만 기운을 차려주십시오."


"괜찮다."


"괜찮지 않습니다. 벌써 몇 년째 이슬조차 입에 대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산신님이셔도 이러시면 조만간 쓰러지십니다."


"괜찮다 하였다."


"산신님...!"


"시끄럽다."


여우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산군은 주인의 상태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시 동백을 데려와야 하나, 아니면 새로운 인간의 아해라도 데려와야 하나.


허나 동백을 다시 데려오려고 유라에게 말을 걸어보아도 '때가 오길 기다리세요.'라는 말만 계속하고, 새로운 아해를 데려온다 하여도 주인의 기분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산군이 머리를 싸매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여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신님... 또 그곳에 가시는 겁니까?"


산군의 물음에도 여우는 답하지 않았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평소라면 뒤를 따를 산군도 아주 약간의 눈치는 있는지 주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뒤를 따르지 않는 것이 여우를 위한 일이기도 했기에.


여우는 한참을 걸어 어느 장소에 도착했다.


백산의 중턱.

설목이 울창한 숲속.

여우와 동백이 처음 만난 그 장소.

이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이름 없는 묘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여우는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여우는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대들의 육신을 방치하였기에, 그대들의 혼을 달래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냐." 


여우는 떨리는 손을 얼굴로 가져가 흐르려는 눈물을 막았다.


"미안하다... 그대들의... 그대들의 육신을... 찾아보려 애... 애썼는데... 찾지 못하였다..."


여우는 흐느끼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신이... 내가 못나서... 해서는 안... 안될 짓을... 용서를... 부탁이니 용서를..."


여우는 오열했다.


"제발..."


칼날 같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백산.

들려오는 소리가 바람의 것인지, 흐느끼는 여인의 비명인지.


이승과 저승이 공존하는 이곳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차고 넘칠 정도로 맛본 여우는 눈보라와 함께 소멸하는 듯 보였다.


허나 그러한 여우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오니.


"산신님."


"...유라?"


"저와 함께 산보를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새하얀 설원을 천천히 걷는다.

사박사박 눈을 지르밟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유라여... 여기는..."


넓은 길목.

유라가 평상시 백산과 속세를 드나들 때 사용하는 길이었다.


"유라여... 나는 이곳을 떠나선 아니 된다."


"떠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럼 이곳엔 어찌하여..."


"오늘은 손님들을 맞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손님들이라니..."


여우가 의아한 듯이 묻자.


"장원~!!! 급제요~!!!"


"...!"


멈추었던 가슴이 뛰기 시작함을 느낀 여우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명마를 탄 채 머리에는 어사화를 꽂고 많은 이들을 대동하며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의 건장한 사내.


"동백...?"


"여우야, 여우야. 잘 지냈어?"


"정말... 정말 동백이더냐...?"


"그래, 나다 여우야."


여우는 젖어들어 앞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나아갔다.


"정말로... 정말로 그대가... 내가 알던 동백이 맞느냐...?"


동백은 환하게 웃으며 양 팔을 벌렸다.


"장원 급제 하였으니, 고향땅에도 한 번 돌아와야지. 보고 싶었어."


여우는 한달음에 달려가 동백의 품에 안겼다.


"나도... 나도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


어린 소녀처럼 품에 안긴 채 우는 여우를 동백은 자상하게 토닥여주었다.


"그... 나으리... 품 안에 그것은 혹...!"


"시... 시방 저거 요괴가 아니여라!?"


"나으리 어서 나오십시오! 위험합니다!"


여우의 귀를 달고 꼬리가 아홉 달린 인간 형상의 여인을 처음 본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게 뭐 대수인가.


"쉿. 이제부터 내 안사람이 될 여인에게 실례가 되는 말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동백의 말 한마디에 소란스럽던 일행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안사람...?"


그 잠깐의 침묵을 깬 것은 여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아하하... 실은 너랑 만나지 못하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나면서 역시 너는 날 사내로 보지 않는구나... 하고 반쯤 포기했었는데..."


동백은 귀를 붉히며 머쓱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크게 성공한 뒤에 다시 돌아와 네 말대로 백산에 도움이 되도록 일이나 열심히 할 생각이었는데, 속세에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심장이 이상했다.

어찌 이리도 빨리 뛰느냔 말이다.


"그전에! 나는 너에게 이름을 받았는데 나는 아직도 너를 여우라고 부르는 게 뭔가 이상하잖아?"


여우는 마음이 새하얘졌다.

동백이 없던 사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던 마음이 이제서야 맑게 갠 느낌이었다.

허나 그것 또한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러니 나도 너에게 이름을 주고 싶었어. 많이 생각해 봤는데 이게 제일 괜찮은 것 같더라고."


동백의 체온이 전해질 때마다.

동백이 한마디 한마디 말을 할 때마다.

종이 위에 번지는 먹물같이, 여우의 마음은 빠르게 선홍빛으로 변해갔다.


"너는 내 삶의 시작이었고, 너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어. 너에 곁에 있을 때, 나는 가장 행복함을 느껴."


동백은 여우의 두 뺨을 어루만지듯 들어 올렸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봄, 넌 나에게 봄과 같았어. 봄보다 따스하고, 봄보다 편안했어."


늘 시야를 가리기만 하던 눈물이, 오늘은 눈앞의 남자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듯했다.


시야에는 오직 그대만이 가득했다.


"봄아, 나와 계속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 이제 떨어져 지내는 건 그만하자."


인간의 출입을 금하는 영구동토의 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토록 뜨겁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던가.


수십, 수백 년을 살아온 산신은 지금 여느 평범한 소녀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눈 앞의 남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응..! 우리 꼭 그렇게 하자!"


"많이 좋아해. 사랑해 봄아."


"나도... 나도 그대를 열렬히 사랑한다. 쭉 함께 있겠다는 약속, 깨면 용서하지 않겠다 동백이여."


두 사람을 축복하는 듯 백산의 눈보라는 잠잠해졌고, 주위에는 푸르른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어 박수를 보내주었다.


따스한 햇살 속에서 둘은 입을 맞추었다.


많은 이들이 동백꽃은 겨울 꽃이라고 생각한다.

추운 겨울을 버티며 피어나는 꽃이기에 그러한 인식이 생겼을 것이다.

허나 이날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새로 알게되었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피어난 끝에 봄과 만난 동백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여우와 동백에게 늘 행복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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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





bonus.


"산신님!! 큰일입니다!! 인간들이 대규모로 백산에...!"


"영호님, 쉿."


땀을 뻘뻘 흘리며 부리나케 달려온 산군이 인간들의 침범을 알리려고 하였으나, 유라에 의해 제지당했다.

뒤늦게 상황을 마주한 산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유라에게 물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이럴 것 같아서 영호님에겐 따로 말씀을 안 드렸었는데,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무슨 소리를 하는게냐.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라."


"하아... 영호님. 눈치만 조금 좋으셨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우린 가요. 앞으로 바빠질 거에요. 특히 영호님은 더."


"유라여? 그게 무슨 소리인게냐? 어이! 밀지 말거라! 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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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느라 수고했다.

중간중간 전개가 설명없이 막 넘어간다던가 하는 부분은 의아할 것이다.

다음편에 관련 요소 집어넣어서 양 뿔리기 용으로 써먹으려 그런거다 에헷 뀽.

백산 고을 이야기는 총 5편으로 쓸 예정이다.

Ep.2는 꼴릴 때 돌아와서 올린다.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