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고려의 제22대 해동천자가, 이제는 다 늙고 힘이 다하여 쇠하고 공기가 빠지는 듯한 목소리로 그의 부인을 입에 담았다.


현 태자의 어머니이자, 그의 두 번째 부인이 아닌, 그의 첫 번째 딸을 낳아준 첫 번째 부인을 말이다.


해동천자는 강제로 혼인을 맺었지만, 그래도 함께 잠자리를 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정겨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런 아리땁디 아리따운, 그런 부인과 함께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실없이 웃었다.


실없는 웃음소리는 잠깐 동안 이어지더니, 이내 끅끅대는 작은 통곡소리로 바뀌었다.


그를 시중드는 나인들이 혹시라도 이를 발견할까 하는 걱정은, 수십 년간 응어리진 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참으로 한심하누나, 참으로 한심해..."


돌이켜보면, 참으로 한심하디 한심한 인생이었다. 


백부의 장남과 장손이 있어 종친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보위와는 연이 없는 인생을 유유히 살다 갈 운명이었으나,


무반들이 일으킨 반역으로 백부가 폐위되며 그 장남과 장손은 각기 보위에서 밀려나매, 그의 아비가 새롭게 보위를 차지하였고, 아비의 장자인 그 또한 새로운 동궁으로써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반역자들에 의해 보위에 올려진 군권은 미약했으며, 반역자들이 국정을 농단함에도 그의 아비와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베필을 맞아들이는 것 역시, 오로지 그들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여러 무반을 처형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의 딸을 베필로 맞게 되었으니, 그녀가 바로 천자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처음에는 반역자의 딸년이라고 어찌나 홀대했는지 몰랐다.


문안 인사를 하면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철저히 무시했고, 음식을 바칠 때는 입맛이 없다며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팍팍 내었다.


그러던 중에, 결국 합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군주의 권한이 반역자들에게 넘어간 분노를 그 반역자의 딸년에게 대신 풀고자 했는지, 예법에 어긋나게 다소 거칠게 대하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나오게 했고, 그것이 그에게 무언가 만족감을 주었는지 그는 그녀를 더욱더 세게 대했다.


그렇게 거칠고 폭력적인 합궁을 마치고 나니, 밀려 들어온 것은 후회였다.


인간적으로 심하게 대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닌, 저 반역자의 딸년이 제 아비에게 이 모든 것을 밝혀 저 자신이 그의 숙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추악한 후회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때부턴가 무언가 추악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듯 했다.


합궁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더욱더 거칠게 대했고, 그 강도는 점점 더 높아졌지만, 그녀는 단지 고통을 참으며 신음할 뿐이었다.


그렇게 합궁을 하며 그녀를 마구 대하던 어느 날, 그는 별안간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그녀가, 그에게 구걸하고,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그렇게 그날은, 늘 거칠게 대하던 것에 더해, 기습적으로 그녀의 목을 졸라댔다.


그는 그녀의 목을 힘껏 조르며, 그가 날 하던 대로 거친 행동을 했다.


그녀가 제발 그만하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반역자들을 그리 할 수 없으니, 대신 그 딸년이 그리 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게 목을 조여도, 그녀는 단지 고통스러운 신음만을 내기만 했다.


그가 원하던 목숨을 구걸하는 반역자의 여식의 모습은 없었다.


그를 그저 슬픈 눈동자로 바라보며,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묵묵히 그의 거친 행동을 받아들이는 한 가련한 여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결국 그의 추악한 마음이 사그라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목을 쥐고 있던 손도 움츠러들었다.


추악한 마음이 사그라듬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혐오와 한심함이, 그리고 무력감이 몰려들어와 그의 울음보를 터트렸다.


얼굴을 쥐어싸매고, 그는 몰려들어오는 그 감정들을 느끼며 끅끅대며 울었다.


괴롭혔던 그녀의 앞에서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한번 터진 울음보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터져나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목의 벌건 손자국을 문지르던 그녀가, 별안간 그에게 다가와, 그녀의 가슴팍에 그의 얼굴을 묻게 하고선,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원하신다면 더 심한 것을 해도 된다고.


이렇게 해서 원통이 풀리시고.


자기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실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꺼이 그리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죽는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그때, 그는 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분노와 증오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껏 응어리진 그의 한을 모두 다 풀듯이 한껏 구슬프게 울어재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하며 그를 위로했다.


그때부터였을까, 그와 그녀는 더없이 사이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더 살갑게 대해 주었고, 더 부드럽게 말해 주었으며, 합궁을 할 때도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의 그런 행동을 어색해했으나, 싫지는 않은 듯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에게 마침내 태기가 있었다.


손주를 볼 생각에 그의 아비도 오랜만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만일 아들이라면 어떨까, 딸이라면 어떨까 하며 온 종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렇게 열 달이 지나고, 태어난 아이는 귀엽디 귀여운 딸이었다.


대위를 이을 아들이 아니라 실망했지만, 그래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소중한 첫 아이와 행복하게 지내며 웃음꽃이 만개했었다.


허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아비가 다른 반역자들에게 살해되어 한순간에 역적이 되었고, 이후 그들은 역적의 딸년을 후비로 둘 수 없다면서 그녀를 폐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힘이 없는 군주의 태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녀가 강제로 폐출되는 날, 그저 눈물만 흘리고, 가슴에 묻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후에는 미친 듯이 여색에 빠져 살았다.


그녀를 대신할 여인을 찾기 위해서였는지, 단지 쾌락을 풀고자 했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대신할 수 있는 여인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그저 그녀를 잊고자 했다.


새롭게 들인 태자비에게서 유일무이한 적자를 본 이후로는, 그의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진 듯 했다.


이후 아비와 함께 폐위되고, 그의 사촌동생이 그를 한남공(漢南公, 그 한남 아님)으로 봉하며 수십년간 죽은 듯이 살 때는, 그의 신세가 더욱더 처량해졌기에 그 슬픔이 더 커져 그녀를 떠올릴 재간조차 없었다.


다시 그녀를 떠올린 것은, 그의 사촌동생이 폐위되고, 그가 마침내 보위에 오른 후였다.


다시금 궁에 돌아오니, 그녀와의 행복했던 기억이 다시 돌아오며, 잊고 있었던 그녀를 다시 떠올렸다.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이미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고 했다.


"참으로 한심한 인생이었소..내새에는, 더 힘 있는 부군이 되어...다시 만나고 싶소..


염치없는 것은 잘 알지만, 도저히 당신을 잊을 수가 없구려..."


해동천자의 눈가에 습기가 차더니, 이내 그것이 물이 되어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