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습기를 머금고 차갑게 춤을 추는 바람이 장난스럽게 뺨을 스치며 웃음 짓는 12월.

한 노인이 어깨에 소복히 눈이 쌓이는 것도, 쌀쌀한 추위도 잊은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어떤 가게 앞에 서 있다.

젊었을 때, 키가 꽤 컸던 모양인지 등이 조금 굽은 지금도 주변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은 듯 하다.

그런 노인에게는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내리는 함박눈이 녹지 않고 조금씩 쌓이는 겨울이 되면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이제는 꽤 멀다고 생각되는 과거의 이야기,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고 오랫동안 그를 머무르게 하는 특별한 추억이.


첫 만남은 그녀가 일하고 있는 동네의 작은 책방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노인은 점심시간마다 그를 마음에 들어하는 직장 상사의 권유를 받아 점심을 얻어먹고 다니는 것이 일상인 젊은 사회 초년생 남성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일방적인 대화를 하는 식사에 피곤하기는 하지만 저축을 하느라 일상생활에 투자할 돈이 모자랐던 남자는 어쨌든 잘 되었다며 상사를 따라다니던 차에, 하루는 겨울에 먹으면 그렇게 기가 막힌 음식점이 있다면서 안내를 받아서 이동을 하던 중 그곳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딱히 자기 주장을 하지는 않겠다는 듯 얌전하고 조용하게 키 큰 빌딩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몸집으로 끼어있으면서, 간판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책방'이라고 적힌 옥외 광고판 하나 뿐인 자그마한 건물.


"이런 곳에서 장사가 되기는 하는 건가?"


보자마자 어째서 인지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그 책방을 잊지 못하고 퇴근과 동시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주인이 들었다면 상당히 실례였을 말을 남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작은 곳이었다.

그때 당시에도 꽤 오래된 것인지 원래는 새하얗게 칠해 놨었을 벽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에 대비되어 은은한 베이지 빛을 띠고 있었고, 주변이 밝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았던 점심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었던 입구 위쪽의 자그마한 네온사인 하나가 주변이 어두운 지금에야 기를 펴며 깜박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날이 꽤 쌀쌀하네요."

"―안녕하세요."


그가 문을 열고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훅 하는 따뜻한 공기와 함께 카운터에 앉아있던 아담한 젊은 여성의 시선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 흥미롭다는 듯이 도끼눈을 하고 무표정하게 남자의 얼굴을 향해 몇 초간 꽂혔다.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에, 남자는 자기가 문 밖에서 했던 말이 안까지 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무안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며 여전히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오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책방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하, 안은 생각보다 넓구나."


시에서 관리하는 도서관에 비하면 크기나 등록되어있는 책의 양이 적다고 밖에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에서만 바라봤을 때의 상상하고는 다르게 꽤 규모가 있는 곳임을 느끼며 남자는 책장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초등학교를 다니기도 전부터 뛰어노는 것보다도 독서를 좋아했던 그로서는 일찍 퇴근을 해도 집에 가자마자 저녁을 먹으며 TV만 바라보는 직장인의 삶에 상당히 질려있었던 참이었는지, 책을 펼쳐서 읽고 있는 것도 아닌데 책을 살피고 있는 것 만으로도 무언가 머릿속이 맑아지고 흥미로움이 새롭게 솟는 것을 느끼며 오랜만에 시간을 들여서 읽어볼 생각으로 책장에서 몇 권 골라 뽑았다.


"―사실 건가요?"

"으아악!!"


그때 갑작스레 그의 뒤에서 들리는 한 박자 쉬고 숨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여성의 목소리.

남자는 전혀 대비되어있지 않았던 상황에 뒤를 돌아보며 깜짝 놀라 튀어 올랐고, 그 소리와 행동에 그녀 역시 놀란 것인지 '어와아'하는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놀라게 만든 사람이 오히려 놀라서 쓰러지는 어이없는 상황에 남자는 놀랐던 가슴과 화가 날 수도 있었던 감정이 오히려 냉정해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렇게 뒤에 서 계시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제가 몸을 돌리다가 부딪히면 다치실 수도 있었어요."

"―미안해요."


바닥에 쏟아진 책들을 다시 주워 들고, 처음부터 살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사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책들의 최종적인 구매를 하기 위해 카운터로 같이 향하는 길에 여자가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최근 남자와 비슷한 나이 대의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이 방문하고 나면 그들 중 누군가 책을 사지도 않고 어질러 놓은 채로 방치하고 사라지는 일들이 꽤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안에는 딱히 cctv도 없고 혼자서 관리하는 책방이다 보니, 범인을 어떻게든 잡고 싶었던 그녀가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자기가 손님을 추적하여 감시하는 것.

그리고 기념할만한 첫 번째 시도의 대상이 바로 지금 이 남자였던 것이다.


"다 해서 4만 7천 원이에요."

"여기 만원으로 다섯 장이요."

"여기 거스름돈 3천 원 입니다."


남자는 '계산을 할 때는 한 박자 쉬고 말하는 거 안 하는 걸 보니 의외로 일할 때는 똑부러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결재를 마친 뒤에, 책들이 담긴 봉투를 그녀에게서 받아 들면서 문득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올 때는 막 시작한 듯 조금씩 오던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으로 변해있었음을 깨달았다.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했네요. 꽤 쌓이겠는데요?"


그는 별 생각 없이 생각한 그대로를 내뱉은 말이지만, 말을 들은 여자는 휙 하고 머리를 돌려 바깥 상황을 확인하더니 뭔가 허둥지둥 서두르기 시작했다.

계산대를 정리하고 책들을 이리저리 정리하는 것으로 보아,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책방 문을 닫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열심히 움직이면서 서두르는 것 치고는 상당히 진행이 더뎠는데, 그녀의 체구 자체가 아담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까 자신이 의도치 않게 놀래킨 남자의 반응에 넘어졌을 때에 허리 쪽에 부담이 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모습은 지켜보고 있던 남자 역시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인지할 수 있을 만 했고,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그는 그녀를 돕기 위해서 팔을 걷으려고 했지만 전혀 해본 적 없는 일에 참여해봐야 도움보단 방해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는 정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밖으로 나갔다.


"오, 정리는 다 끝내셨나 보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어, 어라? 왜 아직도 여기 계신 건가요?"


그리고 시간은 꽤 흘러, 책방의 밖에 눈이 꽤 쌓여있는 시점.

욱신거리는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온 여성을 반기며 남자가 말을 걸었다.

꽤 오랜 시간 밖에 서 있었던 모양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그의 몸 이곳저곳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당연히 손님으로 찾아온 남자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여자였기에, 그녀의 날카로운 도끼눈이 조금은 벌어지며 당황한 듯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들은 남자는 책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갈 곳 잃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답했다.


"아, 그게 아무래도 저 때문에 좀 몸이 불편해지신 것 같아서요. 정리를 도와드리기엔 여기 책방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게 없기도 하고, 그렇다고 안에 있어봤자 거슬리기만 할 것 같아서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려요? 왜..요?"

"최소한 타고 가실 대중교통까지 이동하는 건 좀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것 참,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는 그를 오지랖 넓은 착해 빠진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업자득으로 다친 사람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니.

실제로 그녀는 남자의 설명에도 당황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그를 한동안 쳐다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어깨와 머리에 잔뜩 쌓여있는 눈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마치 아까 했던 책장 정리처럼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의 털어내기였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뻗어 보려다 몇 번의 작은 시도 끝에 똑바로 서 있는 남자의 머리에는 자신의 키로는 닿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저기요, 조금 숙여보세요."

"아, 네. 이렇게 말인가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남자의 머리에 쌓여있는 눈은 당연하게도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앞으로 쏟아져 내렸고, 여자가 잘 볼 수 있게 눈높이를 맞춰 머리를 내렸기 때문에 그 눈은 곧장 그녀의 얼굴로 우수수 떨어졌다.

여자는 깜짝 놀라며 어푸푸 하는 소리를 내었고, 남자도 당황하여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어 그녀의 얼굴을 덮은 눈을 치워주며 차가워진 여자의 얼굴을 감싸주었다.


"우와, 차가워라. 괜찮으세요?"

"..."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아직 조금 남아있는 눈 때문에 차가워진 것인지, 아니면 또 자기의 짧은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인지 조금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지금 까지 일어난 일 중 가장 깜짝 놀란 나머지 평소의 날카로운 도끼눈을 유지하지 못하고 땡그랗게 뜨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작은 미소에서 점차 큰 웃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잠깐 동안 웃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도끼눈으로 돌아와 뾰루퉁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언제까지 자기 얼굴에 대고 있을 거냐며 자신의 손으로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하던 일은 마저 해야 하는 성격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남자의 머리를 자신에게 잡아 당겨서 머리의 눈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눈을 쏟아 놓고 그렇게 웃으시면 안 되어요."

"미안합니다. 너무 귀여워서 그만."


이 대화를 끝으로 둘 사이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서로 뭘 듣고, 뭘 말했는지 약간 이해를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둘 다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눈을 털어주는 손길이, 눈을 터는 손의 움직임이 좀 전과는 달리 상당히 어색해져 있었음을.


추억에 잠겨있던 노인의 뒤에서 가게의 문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인 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여인이 나와서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영감, 추운데 눈 맞으면서 뭐하고 있어요?"

"별 거 아니오, 임자. 좀 생각할 게 있었거든."

"어휴, 이 어깨에 쌓인 눈 좀 봐. 어디 좀 털게 숙여봐요."


노인에게 말을 건 여인은 이내 그의 몸에 잔뜩 눈이 쌓여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노인은 수긍하며 몸을 좀 낮추는가 싶더니, 무언가 떠올린 듯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웃음을 띄며 여인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서 눈을 털어내고 있던 여인의 얼굴에 노인의 머리에 쌓여있던 눈이 쏟아져 내렸다.


"에구머니나!"


여인은 곧장 어푸푸, 하는 소리를 내고 당황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 웃으며 자신의 손 만큼이나 주름진 여인의 얼굴을 털어주기 시작했다.


"이런, 또 머리에서 눈이 흘렀구먼. 자, 이리로 와봐요."

"―아직도 철이 못 들었어요, 당신은."


노인의 장난에 당했다는 듯 여인은 잠깐 그를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았지만, 한 박자 쉬듯 한 마디 말을 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굴에 남아있는 눈 때문에 차가워진 탓인지 또 다시 붉어진 얼굴에 따뜻한 노인의 온기를 느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