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장편)마녀의 기사-1 - 순애 채널 (arca.live)


어느덧 초승달이 하얗게 빛나는 밤이 찾아왔다. 

카이엔은 연기가 나는 어느 오두막의 문 앞에 섰다. 

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똑똑, 하며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배런 단장님의 집이 맞나요?”


끼익, 문이 열리자 배런이 호쾌하게 웃으며 카이엔을 맞이했다.


“카이엔! 어서 와라.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배런은 카이엔에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일반병이 높은 사람의 집에 초대받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카이엔은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배런이 정중하게 몇 번이고 부탁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놀라 웅성거리기도 했다. 


“사실 며칠 전에도 널 데려오려고 했는데, 훈련 때문에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었구나.”

“아니예요, 저도 다른 아저씨들과 같이 지내면서 친해지던 차였으니까요.”

“하하하! 적응은 잘 하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힘든 건 없고?”

“훈련이 조금 힘들긴 한데, 그래도 버틸만 해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믿음직한 군인이 되겠죠.”

“자식, 너 아직 15살도 안된 꼬맹이야! 벌써부터 그런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면 친구 안 생긴다.”

“하하….”


잠시 기다리던 사이, 레아가 살짝 방문을 열고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있는 카이엔의 모습을 보며 히익, 하고 깜짝 놀랐다. 


“아, 레아! 마침 잘 왔다. 오늘은 카이엔이랑 함께 식사할 거니까, 그녀석 옆에 앉으렴.”

“어….”

“걱정 마라. 카이엔은 절대 너한테 나쁜 짓 안 할거야. 그럼 난 마저 요리 좀 하고 올테니

그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라, 알겠지?”

“네, 다녀오세요.”

“빨리 와야해요, 아빠…”


레아는 일단 반신반의한 채 조심스레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두 손을 움켜쥔 채 여전히 제대로 앞도 못 보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진정시켜야 겠다는 마음으로 카이엔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 오늘 하루는 어땠어? 나 없는 동안 뭐하고 놀았어?”

“어, 그, 그게…”


레아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엄청난 긴장감으로 인해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마구 쿵쾅거렸고 벌써부터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냥, 창밖을 바, 바라보고…. 재, 재미없어서 죄송…죄송해요.”


중얼거리듯 매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레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으, 제발 욕하고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잘못했어요.’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밝고 청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진짜? 이야, 많이 발전했네! 얼마 전까진 아예 창밖도 못 쳐다보고 벽만 보고 있었잖아!

정말 대단해, 이대로 좀더 용기내서 내일은 같이 노는거야!”

“어…”


처음이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내 목소리, 외모, 행동. 모든 것을 싫어했는데, 이 소년만큼은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공감해주고 있었다. 


“헤헷, 이제야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네.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아. 여기서 미소만 지으면 더 

예뻐질 것 같은데. 어때? 나처럼 씩 하고 웃어봐! 그럼 기분도 좋아지고 에너지가 생길 거야.”


나를 향해서 웃어주는 사람은 전혀 보지 못했다. 대체 의도가 뭐지? 숨은 꿍꿍이 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정말 믿어도 되는 오빠일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거짓말.”

“응?”


뜻밖의 대답에 카이엔은 살짝 당황했다. 레아는 고개를 숙여 조그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저보고 예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다들 마녀, 재앙, 악마라고 불렀단 말이예요. 

카이엔 오빠도 사실 절 놀리는 거죠? 저 같은 흉측한 괴물이 예쁠리가…”


레아가 겁에 질린 채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자, 카이엔은 상냥하게 레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지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힉!”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어떡하지? 아빠를 불러야하나? 하는 생각에 잠길 찰나, 예상치 못한 상냥한

말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레아, 한번 내 눈을 바라볼래?”

“네..?”

“잠깐이라도 좋아. 곁눈질 하지말고 제대로 봐줘. 안 괴롭히니까 걱정 말고.”


레아는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엔 

다른 아이들에게선 볼 수 없던 진지함, 상냥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내 눈이 거짓말하는 눈으로 보여? 너처럼 예쁜 여자아이한테 거짓말하면 내가 나쁜놈이지.”

“정말요? 제가… 예뻐요?”

“응, 다른 여자애들보다 훨씬.”

“어째서요? 전 붉은 눈을 가진 마녀라구요…”


카이엔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망설임 없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난 네가 마녀라고 생각한 적 단 한번도 없어. 

내 눈엔 네 붉은 눈동자는 루비처럼 밝게 빛나는 보석과도 같아. 

그러니까 네 스스로 널 마녀라고 단정짓지 마. 알았지?”


그동안의 상식을 완전히 박살내는 듯한 대답이었다. 자신의 눈을 루비라고 표현해준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이 감정은 뭘까? 조금씩 레아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절대 긴장해서 느껴지는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두근거림에, 그녀의 통통한 두 볼이 불그스레 달아올랐다. 

동시에, 카이엔도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게 조금 쑥쓰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하핫, 너무 그렇게 바라보면 부담스러운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깜짝 놀란 레아는 어버버 하며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때, 문을 열고 배런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큰 접시를 든 채 식탁으로 걸어왔다. 


“아! 오셨어요, 단장님?”

“많이 기다렸지? 오늘은 레아가 좋아하는 통닭구이다. 내가 요리한 거니까 맛은 훌륭할 거야~”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배런이 조리한 통닭은 그가 자부할 정도로 무척 맛있었다. 

특히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하는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카이엔은 잠시 어른스러움을 내려놓고 아이같은 웃음을 지었다. 


“자식, 그렇게 맛있냐? 누가 보면 며칠은 굶은 줄 알겠다.”


“그야 엄청 맛있으니까요. 단장님의 요리는 정말 최고예요!”


“하하하! 부족하면 언제든 말해라!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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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가볼게요, 단장님. 저녁 맛있게 먹었습니다.”

“시간 비면 언제든 찾아와도 돼. 오늘처럼 정성껏 대접해줄테니!”


꾸벅, 인사를 마친 카이엔은 배런 뒤에 서있는 레아를 보며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레아도 내일 보자!”

“네...”

“잠이 안 올땐 날 떠올려봐. 부르면 언제든 찾아가줄게.”


배런은 아주 당돌한 카이엔이 대견하면서도 살짝 견제하듯 머리를 딱콩 쥐어박았다.


“자식, 꼬맹이 주제에 벌써부터 수작질이냐?”

“아얏!”


레아는 이런 상황이 재밌는지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의 웃음을 봤는지 못봤는지, 카이엔은 대문을 열고 레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제 진짜 가볼게, 내일 봐, 레아!”


레아는 떠나는 그를 보며 말 없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카이엔이 돌아가고 난 후, 배런은 레아와 시선을 맞춘 뒤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빠의 품은 익숙한지 레아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우리 예쁜 딸, 오늘 재밌게 놀았어?”

“네.”

“목욕물은 받아뒀으니 얼른 씻고 자렴. 오늘은 혼자 씻을 수 있지?”


그동안 홀로 목욕하는 것도 무서워해 어쩔 수 없이 배런이 직접 레아를 씻겨 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살짝 권유해보았다. 

레아는 잠시 생각에 빠지다 무언가 큰 결심을 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오늘은 혼자 씻어볼래요.”


드디어 듣고 싶었던 대답이 들려왔다. 배런은 딸이 대견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그래, 그래야지! 다큰 숙녀가 아빠랑 같이 씻으면 얼레리 꼴레리라고~”


부끄러운 지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딸이 그저 귀엽게 보였던 배런은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럼 아빠도 이만 자야겠다. 무서우면 아빠 방에 와서 같이 자자, 알겠지?”

“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아빠가 하품하며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레아는 

마당 뒤쪽에 위치한 욕실 안에 들어가 목욕 준비를 마쳤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안에 몸을 넣은 레아는 얼굴만 물 밖에 내민 채 생각에 빠졌다. 


‘카이엔 오빠는 정말 특이해. 나를 보고 전혀 무서워하지 않다니. 혹시 평범한 사람이 아닌걸까?’


그와 동시에,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보던 카이엔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빠의 초록색 눈빛, 원래 이렇게 멋있었나? 목소리도 어른스럽고 듬직해서 들을 때마다 편안해져…’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눈이 아름답다는 그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는지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달래려 깊이 잠수했다. 

몇 초 후 푸하, 하며 얼굴을 물 밖으로 빼내 크게 숨을 들이쉬었지만 

떨리는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떨림이 멈추지 않아… 나, 왜 이러지?’


이 떨림은 그녀가 목욕을 마친 후 침대에 누울 때까지 이어졌다. 

잠들기 직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카이엔으로 가득 찼고 

그가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정말 오빠가 꿈 속에서 날 찾아왔나? 계속 오빠가 곁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날 지켜주는 걸까? 왠지 모르게 점점 눈이 감겨…’


레아는 여태 잘 때마다 악몽을 꾸었고 자는 동안 누군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서 쉽게 잠을 자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을 지켜주는 기사 덕분에 나쁜 악령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고 긴장이 풀렸는지

레아는 처음으로 행복함을 느끼며 꿈 속 세계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