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경험은 내게 연금술과 마법을 가르쳐준 교수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가스라이팅이라든지 그루밍이라든지 하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케이스였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난 가난한 시골 처녀 출신이었죠. 장학금만으로 학비를 겨우 댔고요.

그런 내게 절대자인 교수의 시커먼 속내를 거부할 힘이 어디 있었겠어요.

당장 내일 기숙사에서 쫓겨날 걸 걱정해야했는데.


차라리 그렇게 내 순결을 바치고 마음이 망가진 대가로 출세라도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 빌어먹을 새끼는 딴 여자한테 좆대가리를 휘두르다가 복상사로 죽어버렸어요.

그 자가 죽은 후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온사방에서 튀어나와 망인의 명예를 갈기갈기 찢었고

그 와중에 그 자를 한톨만큼 믿은 나는 같은 패거리로 취급당해 대학에서 쫓겨났어요.


방황하던 나는 연고도 없는 먼 곳에 정착했어요. 한적한 변두리 영지에요.

약초와 화합물을 다룰 줄 아는 연금술사란 건 어디서나 귀하니 말이죠.

이곳에는 아무도 내 더러운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달까요.

몇 명의 총각들이 용감하게 고백해오기도 했지만 전부 거절했어요. 연애편지도 다 태웠어요.

-나 같은 게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어디있겠어요.




내가 사별한 남편, 그러니까 남작을 만난 건 왕진을 나갔을 때에요.

그 때 남편은 쉰 셋, 나는 고작 서른이었어요.

처음엔 미친 거 아니냐고 딱 잘라 거절했어요. 나이차를 생각해보라고, 당신 딸뻘이거든?

하지만 다른 사내들하고는 좀 달랐어요. 그는 포기하지를 않았어요.

그렇다고 찰거머리처럼 귀찮게 들러붙은 건 아니에요. 그저 정말로 천천히 다가왔을 뿐이에요.


언젠가- 내가 악몽과 죄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 안정제를 빻아 먹고 늘어져있을 때였어요.

약방에서 문단속도 안하고 약기운에 취해 늘어져 있었던 거야. 누가 들어왔으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그때 그가 들어왔어요. 나 대신 문단속하고, 커튼 치고, 조용히 요깃거리를 내 앞에 내밀더라고요. 위스키랑 같이.

잠깐이지만 이 남자랑 자도 좋겠다 생각했지만 이성 한구석의 공포 떄문에 그러지도 못했어요.

그저 조용히 투덜거리고, 술에 취해서 내 이야기를 진탕 읊었죠.


나 더러운 여자야. 겁탈당했어. -그게 겁탈인 줄도 모르고, 속고 산 것도 모자라서 이따위 꼴이 됐다고.

상관없대요. 꺾인 꽃은 다시 피우면 된대.


당신 간호만 할 거야, 남작가 집안일 따위 관심 없고 약방도 안 닫을 거야.

상관없대요. 하고 싶은 일 하래.


당신하고 잠도 안 잘거야. 그 집에 들어갈지 말지도 내가 정할 거야.

상관없대요. 언제든지 올 수 있는 집이지, 통금으로 가두려는 거 아니래.


당신이 딴 여자한테 눈길 주면 바로 이별이야.

상관없대요. 그럴 일이 없을 걸 확신한대.




우린 그렇게 십 년 넘게 살았어요.

남들 앞에서도 냉기가 가득한, 쇼윈도라고도 할 수 없는 부부로요.

방문객들과 남편의 친지들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어요.

남편은 젊은 여자에 미친 호색한이라는 비난 속에서 질타를 받아야했고

나는 남작가의 재산을 탐낸 싸가지없는 년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고

그때마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냐고 화를 내도 남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라고요.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미친 새끼라니까. 하.




남편은 그렇게 죽었어요. 내가 보는 앞에서 임종했죠.

죽기 전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까, 뭐라는 지 알아요? 내 알몸이 보고 싶대.

미친 거 아냐? 서른도 아니고 마흔이 넘고 살 붙은 아줌마 몸이 뭐가 좋다고?

어차피 죽기 전이라 생각하고 고용인들 다 꺼지라고 한 다음에 훌훌 다 벗어서 보여줬어요.


-만족한대.

남자가 무섭다고 과거에 사로잡혀있던 내가 낯빛 하나 안바꾸고 당당하게 서있으면 된대.

망가진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래. -남은 삶 동안 언제든지 새출발할 수 있고, 희망을 찾을 수 있대.

남작부인으로 살래. 다른 사람을 만나도 좋대. 행복하게 살래.

남을 미워하지 말래.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래.

내 앞으로 유산 다 남긴 유서와, 변호사와의 계약서를 보여주면서 그렇게 말하고 가더라고요.


상을 치른 뒤 첫 몇 년은 정말 바빴어요.

남편의 재산과 사업은 한 끗의 오차도 없이 모두 내 손에 들어왔어요.

일가친척들은 남편의 재산을 갈라먹을 생각만 했지만 그런 시도는 애초에 생전의 준비로 모두 차단됐죠.


나는 남편이 남긴 사업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남편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족적이니까.

다행이 집사와 고용인들은 충성스러웠고, 남편의 사업 동료와 지인들도 성의껏 나를 도왔어요.

나는 남편이 사업을 더 키웠고, 내 약방도 훨씬 크게 키울 수 있었죠.

심지어는 남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해서

내게 그 개소리들을 지껄인 남편의 친지들에게도 용돈을 내주면서 그들의 심기도 꺾었어요.




그러면 뭐해. 그이는 돌아오지 않는데.

고인은 고인일 뿐야.


아무리 화를 내도 온화와 평정을 유지하던 부드러운 얼굴하며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끈기있게 다가와 마음의 벽을 허문 발길에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내 암흑 속 진실을 알아봐준 눈빛까지


그 모든 게 그리워.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걸 사무치게 깨닫고 나서야.

그이가 진짜로 날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더라고요.


그러면 뭐해.

그이는 돌아오지 않는데.

고인은

고인일 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