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은 순챈 소재글을 기반으로 쓴 글 임을 알림.

https://arca.live/b/lovelove/103644769?target=all&keyword=%EC%A1%B8%EC%97%85&p=1



시끌벅적한 학생들의 목소리.

교문 앞에 몰려든 학부모들과 꽃을 파는 노점상들.

커다란 현수막과 기대, 시원함, 섭섭함...여러 감정이 섞인 표정들.

졸업식은 여러모로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행사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했다.

물론 그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은...꼭....오늘만큼은..."


그에게 고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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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별 생각 없었다. 연애는 완전 남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올라온다고 해서 뭔가 크게 바뀔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은 고교 데뷔라고 아예 다른 사람처럼 행색을 바꾸고 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머릿속이 온통 꽃밭인 것 같은 기대감을 잔뜩 품고서.


"연애니, 사랑이니 그런 거에 들뜨는 거 바보 같아."

"얼씨구, 잘난 체 하기는."


복도에 일주일엔 두번 꼴로 나타나는 실연 또는 애인과의 다툼으로

인해 질질 짜는 동급생을 보면서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같이 다니는 지영이가 핀잔을 주곤 했다.


"너도 직접 경험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글쎄."


딱히 이성이 싫은 건 아니다.

철벽을 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눈이 높아서 같은 학교의 남자아이들이 눈에 차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다 깨달은 현자인 척 잘난 체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는 이런 이벤트와는 접점이 전혀 없었다.

여고생, 하면 판에 박을 수 있을 법한.

20XX년대의 여고생 표본으로 후~~대에 쓰여도 될 법한.

그런 특별한 데 없고 그렇다고 딱히 모나지도 않은...그런 나에게는.

이렇다 할 접점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접점을 먼저 만들려고 나서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고백을 받아 사귀어 봤지만,

두근거린 건 잠시뿐,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서로에게 흥미가 식어 금세 헤어진 탓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내 속에 있던 연애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그러면서도 가끔, 복도를, 거리를 지나가는 커플들을 보며

살짝 부럽다고 생각하는 나는.

가슴뛰는 사랑을, 연애를 부정하면서도,

나도 가슴 속에 만화나 소설같은

가슴뛰는 운명의 상대...같은 걸 기다렸던 것 같다.

다시 실망하는 게 두렵다는 핑계로...

먼저 다가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봄은, 새로운 시작은 항상 사람을 설레게 한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입학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이 없으니,

나는 가슴 속에 남 모르게 고이 간직해 놓았던,

연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래. 난 이게 맞나 보다.

내가 봐도 딱히 내게 매력을 느낄 포인트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어필을 막 한 것도 아니고.

잘 꾸미지도 않으면서 무슨 그런 기대를 하냐.

양심도 없지.


...라고 생각한 2학년 때의 어느 날,

나는 만나버렸다.

적어도 내게는...운명의 상대를.

보기만 해도 가슴 뛰는 사람을.


그가 딱히 내게 잘 해준 것도 아니었다.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흔히 만화에 나오곤 하는

넘어졌을 때 도와줬다,

짐 옮기는데 같이 도와줬다...같은

그러한 이벤트조차도 없었다.

그냥...그냥...웃는 모습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복도를 지나가다 그 모습을 봤을 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내 머릿속에 멋대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는 나가지를 않았다.

불합리도 이런 불합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느끼지조차 못했다.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껴버린 것이다.


이번엔 다르다고 느낀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도서부원을 하고 있었다.

도서실에 인포에 앉아 책을 읽으며 대출, 반납을 도와주고 

가끔 선생님을 도와 장서 관리를 하는...

지원율 제로에 가까운 기적의 자리.

당연히 나는 지원했고 어렵지 않게 그에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어쩌다가 도서부원이 된 거야?"

"담임이 그냥 떠넘기던데."

"교사가 그래도 되는 거야?"

"뭐...생기부에 좋게 써준다니까. 독후감 같은 거도 다 적어준다는데.

나쁠 건 없잖아. 조용한 거. 싫어하지 않기도 하고."

"둘이서 뭐하고 있어?"

"아, 부장님."

"그냥 선배라고 불러. 어차피 고3이라 자주 오지도 못하는데.

부장이면 뭘하냐~ 권력도 없고. 딱히 혜택도 없고.

정작 제일 신경써야 할 고문 선생님이란 사람은

한달에 한 번 꼴로 얼굴 비추니."


고3인 부장 선배(남자),

그리고 그와 나.

도서부는 고작 이렇게 3명이 다였다.

수험 준비하고 생기부 채운다고 이런저런 활동 때문에

얼굴을 자주 비추지 못하는 선배를 빼면 단 둘이니,

기회도 이런 기회가 없었다.

나는 착실하게, 조금씩 그에 대해서 알아갔다.


"뭐 읽어?"

"소설."

"생기부에 소설도 쓸 수 있어?"

"포장하기 나름이지. 소설도 소설 나름이지만."

"그럼 지금 읽는 건 생기부용? 아니면 그냥 좋아서?"

"글쎄...요즘 유명하다 해서. 어떤가 하고 읽어보는 거야."

"그럼, 좋아하는 책 있어? 추천이라도 좀 해줘."


너무 속보였나 싶은 질문이었지만,

이미 입밖에 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질문인 것처럼 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었다.

지금 이 대화를 하면서 그는 한 번도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으니까.

무신경한 건지...내가 귀찮다고 여겨지는 건지...

어느 쪽이든 그가 야속했다.


"글쎄...좋아하는 책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추천하는 책이라면..."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건, 네 취향인데.


"『토지』 한 번 읽어 봐."

"아~그...작가가 펄 벅이었나?"

"그건 『대지』고."

"아..."


괜히 아는 척 해보려다 망신살만 뻗쳤네.

원하던 것도 못 얻고...하...


"그 둘을 착각하는 사람은 처음 봐. 너 되게 웃긴다."


그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보며 웃었다.

내가 반했던 그 웃는 얼굴.

원래 나였다면 자존심에 웃지 말라고 화를 냈어야 하지만,

그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책은 듣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런 걸 봤는데.


"어...너 열 있어? 얼굴이 빨간 것 같은데."

"어..아..아마도? 왠지 오늘 몸이 좀 으슬으슬하더라.

양호실 좀 갔다 올게."


정신 차리고보니, 나는 바보같이 벌개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굳어버려 있었다.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어떻게든 얼버무려서 다행이었다.

그 외에도.


"오늘 점심 별로지 않았어?"

"왜, 난 제육 좋던데."

"제육 요즘 너무 자주 나오는 것 같아. 이제 질려."

"난 매일 나와도 잘 먹을 것 같은데."


좋아하는 음식이라던지.


"아..여행 가고 싶다."

"갑자기? 어디 생각나는 데라도 있어?"

"그냥...학교만 벗어나서 편히 뒹굴거릴 수 있다면 어디든지."

"흠...그럼 넌 주말에도 집에만 있겠네?"

"어지간하면?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럼 그냥 집 가고 싶다는 거 아니야?"

"어. 집 가서 잠이나 자고 싶다. 따뜻한 이불이 그리워...

딱~~이불 속에 들어가서 게임하면서 간식 집어먹으면 그게 낙원인데."


여가시간에 주로 뭐하는지라던가,


"자, 이번 학기 부활동 지원비 나왔더라."

"아, 선배. 그거 그럼 어디다 써요?"

"다른 동아리였으면, MT를 가던, 회식을 하던, 야외 행사를 가던 할텐데..

우린 사람도 적고 관심도 적어서 크게는 못하니까..."


선배는 카드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니네 둘이서 그냥 간식거리나 사와."

"선배도 같이 가시죠."

"귀찮아. 어차피 자주 들르지도 못하는데...

니들이 제일 많이 먹을 거니까 니들 취향껏 사와."


카드를 받아들고 근처 마트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묘하게 신나 보였다.


"얼마나 살려고 그렇게 신이 났대."

"과자 좋잖아. 게다가 내 돈도 아니고. 공짜라고."


좀처럼 볼 수 없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은 그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다른 학생이었으면, 별 유치한 놈이 다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콩깍지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귀엽게만 보였다.


"그거 좋아해?"

"이거?"


나는 그가 한아름 집어든 파울볼 바닐라맛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고문 선생님 취향. 이거 하나면 자잘한 건 다 봐준다니까.

그리고, 이거 살짝 얼려 먹으면 진짜 맛있어."

"헤에...그건 몰랐네."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진지한 눈빛이

마트의 진열장을 빠르게 훑었다.


"이건 어때?"

"감자칩? 좋아하는 편이지만...좀 그래."

"맛 괜찮지 않아?"

"손에 묻잖아. 그럼 책 넘기면서 먹기 불편하니까. 

책도 더러워질 수 있고."


보기보다 세심하구나.

그냥 좋아하는 것만 고를 줄 알았는데.

진짜 세심한 건지, 어쩌다 얻어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날은 그는 과자에, 나는 과자를 고르며 행복해하는 그의 미소에

온 정신이 팔린 탓에, 정작 내 취향의 과자는 하나도 사지 못했다.

하지만 보람찬 날이었다.

내가 반한 그 얼굴을 하루에 여러 번 볼 수 있다니.

희귀한 날이었으니까.


"그...지영아."

"응?"

"나도 화장 가르쳐주면 안 돼? 내가 밥 살게."

"뭐?"


내 요청에 지영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화장? 네가?"

"왜 그렇게 놀랍다는 듯이 바라봐...

나도 할 수도 있잖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그녀의 반응에

약간 속이 쓰린 나는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꾸미는 데에는 전혀 관심도 안 쓰더니,

이게 무슨 일이래? 남자친구라도 생겼어?"

"그건 아니고...그냥...나도 한 번쯤 해 볼까 싶어서."

"흐~응~~"


그녀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졌지만,

그녀는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럼, 학교 끝나고 샵 좀 가자.

저녁에 시간 싹 비워놔."

"어? 어..."


그 날 저녁은 온통 정신이 없었다.

BB, 앰플, 토너, 에센스...화장품 종류가 이렇게 많은 지도 처음 알았다.

립글로즈 색깔도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다 달랐다.


"이거랑 이거랑 똑같은 거 아냐?"

"야! 무슨 생판 모르는 남친 같은 소리를 하냐?

완전 다르잖아! 구분 안 돼?"


내가 아직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지영이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후...그냥 내가 코디해줄게. 넌 그냥 내가 골라준 거나 사서 써."


나는 그녀가 카트에 우르르 거침없이 담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았다.


"자, 이건 내가 계산할게."

"네가? 왜? 내가 쓸 건데..."

"신경쓰이는 사람한테 어프로치하겠다는데, 

절친이 이 정도는 도와줘야지."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어허."


그녀는 변명하는 내 말문을 막았다.


"나중에 밥이나 진짜 거하게 쏘든지.

아니면 너도 커플되서 와.

그 때 되면 네 어록 읊어주면서 실컷 놀릴 거니까."


그녀에게는 이미 들켜버린 것 같았다.

네 표정이 지금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스꽝스러운 것만은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게, 지영이는 볼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실실 웃고 있었으니.


"내일 아침에 니네 집으로 갈 거니까 일찍 일어나."

"?"

"으이구! 세팅해줘야 될 거 아냐!

21호, 23호도 구분 못하는 애한테 알아서 화장하게 둘 수 있겠냐?

아무튼 그렇게 알아.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늦게 일어나기만 해봐."

"어..어. 알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대에 대자로 엎어졌다.


"와...기 빨려..."


꾸민다는 게 이렇게 손 많이 가는 거였어?

도대체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진다고...


"자, 다 끝났어."

"와."


거울 앞에는 뿌듯한 한 사람과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같이 있었다.


"어때? 내 솜씨가."

"이런 게 가능한 거였어?"

"내가 꾸미고 다니라고 몇 년 전부터 말했잖아.

베이스가 좋은데. 왜 그걸 썩히냐니까."

"이야..."

"ㅋㅋㅋ 얘 봐라. 좋단다 그냥. 

거울 속에 들어가라고 하네.

이제 가자. 늦겠어."


스스로도 놀랐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어제 기빨린 여고생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어제 얼마냐 달라지겠냐고 생각했었지만, 그 이상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네. 왜, 설레?"

"설레긴 뭘 설레."

"숨길 걸 숨겨라. 티 팍팍 내면서 뭘 숨긴다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잘 해봐."


고민하는 사이, 어느 새 우리는 학교에 도착했다.

내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와 마주치면, 그는 나를 알아볼까?

바뀐 나를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방과후가 다가올수록, 두근거림은 점점 커졌고,

수업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정신차려보니,

이미 도서실 문 앞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할까.

기대와 걱정이 섞인 눈으로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

".........."


내 걱정은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그는 내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그저 읽던 책이나 무덤덤하게 읽을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난 뭘 기대한 거람.


시간이 좀 지나자 오기가 생겼다.

이쯤되니 언제쯤 알아보나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사락-사락-


책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 난 지 어언 30여 분,

나는 책 너머로 계속해서 그를 흘겨봤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그냥 말 걸어버릴까? 너무 짜치는데.

왠지 지는 것 같고..


탁.


마침 그가 읽던 책을 접었다.

그래! 책을 다 읽으면 이 쪽을 볼 수 밖에 없겠지.


"..........."


그는 내 쪽을 아주 잠깐 보더니,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기지개를 폈다.

뭐야? 뭐지?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무슨 일 있나? 이 시간까지 안 오고..."


그러더니 도서부 톡방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묻는 것 아닌가.

아. 그냥 못 알아본 거구나.


"이 시간까지 안 오긴."

"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진짜 눈치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너, 너였어? 완전 못 알아봤네..."


그는 전에 없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왠지...네가 아예 안 온 적이 없는데, 너무 늦는다 했어.

처음 보는 사람이 들어오길래, 그냥 다른 학생인가보다 했지."

"내가 염색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못 알아볼 일이야?"


솔직히, 아무리 화장의 위력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알아볼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나도 안다, 나조차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낄 정도인데,

멋대로 그가 알아볼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거라는 걸.

하지만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 보니까 알아볼 법도 하긴 한데...

그렇다고 처음 보는 것 같은 사람 얼굴을 자세히 들여보지는 않잖아."

"..........."

"그것보다, 어쩌다가 이미지 체인지 한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관심가는 사람이라도 생겼다던가?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상담해줄 수도 있는데."


불편한 기색을 감지한 그는 필사적으로 화제를 전환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어떡하나, 이 사람. 걸음마다 지뢰를 밟는다.

너한테 잘 보이려고, 어떻게 보일지 걱정해가면서, 기대해가면서...

꾸미고 왔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인데.


"...뭐, 도움이 될 지는 장담 못하겠지만...아마 참고는 될 거야!"


어떻게든 이 기류를 바꾸려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와 버린다.

그냥, 내 억지인데. 못 알아본다 한들 네 잘못도 딱히 아닌데.

내가 고백할 용기만 있었어도, 이렇게 번거롭지 않았을 것이다.

무섭다. 처음에는 고백까지 생각해서 너에게 다가갔지만,

정작 너와 가까워진 지금은...이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서,

고백했다가 다시는 얼굴을 못 볼 것 같아서.

이렇게 들이댄 주제에 겁쟁이처럼 또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아.


"....됐어. 딱히 그런 거 아니야. 한 번 흥미가 생겨서...이미지 체인지 해 봤어."

"아, 그래. 뭐, 나중에 상담할 일 있으면 얘기해 줘.

언제든지 해줄게. 못 알아본 거에 대한 대가랄까.."

"뭘 그렇게까지 해. 못 알아볼 수도 있지.

솔직히, 나도 놀랐어. 완전 딴사람처럼 보이더라."

"그렇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서야 그는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때?"

"뭐가?"

"네가 보기엔 어떠냐고. 그냥 궁금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꼬며 물었다.

솔직히 답은 예상이 갔다.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설사 자신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쁘다고 하겠지.

여기서 별로라고 한다면,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농담으로 웃어 넘길 테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의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예뻐. 근데 내 취향은 아니야."


예쁘면 예쁘다지...굳이 뒷말을 붙일 필요가 있나?

할거면 하나만 하지 싶던 나는 약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눈을 바라봤지만,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섞여있지 않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말에 자기도 살짝 놀라면서, 급히 덧붙였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굳이 이렇게까지 확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지 않나...라는 그런...소리야."


의도한 건지, 의도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바뀌어 버린 기류에

우리는 둘 다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무슨 의미야? 이게 뭐지? 그린 라이트인가? 그런 건가?


"나, 난...그럼 돌아가볼게. 오늘 약속이 있어서.."

"어, 어..그래. 내일 봐."


그리고 난, 또 바보같이 도망쳐버렸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몇 번이고 매트리스를 두들겼다.

누가 봐도 고백할 절호의 찬스였다.

분위기도 완벽했잖아. 그런데 왜?


너무 무서웠다. 

그런 분위기를 깨고 나올 지도 모를 '미안.' 이라는 그 한 마디가.

그 말을 듣게 된다면,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없었다.

나도 안다. 내가 바보같은 겁쟁이라는 걸.

하지만...하지만...지금의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일상을.

잃고 싶지 않다. 이따금 볼 수 있는 그의 미소를 볼 수 없어지는 게...나는 너무 무섭다.


"...겁쟁이."


나는 스스로를 비난하며 잠에 들었다.


그 이후, 나는 화장을 그만뒀다.

지영이가 해준 풀 메이크업을 하기에는 시간도 손재주도 모자랐다.

관리해야 될 것도, 유지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자신의 걸작이 결국 실패작이 되어 버렸다며,

지영이는 아주 비싼 걸 사달라고 할 테니 각오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들은 그의 말이 귀에 울려서,

나는 평소보다 조금은, 조금씩은 더 꾸몄다.


바보같은 년. 어차피 고백도 못할 거면서.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이런저런 이벤트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찰나의 해프닝으로,

내가 항상 앞으로 내딛지 못하면서 그렇게 끝나버렸다.


1년이 지났다. 선배는 졸업하고, 우리는 3학년이 되었다.

그는 도서부 부장이 되었고, 나는 부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도서부에 신입 부원이 들어왔다. 3명이나.

다 여학생이었다. 조바심이 생겼다.

1학년생 1명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아니었다.

그냥 대놓고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대시했다.


답답했다. 

자연스럽게, 장난스럽게도 저렇게 어렵지 않게 대시하는 그녀들이

부러웠고,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그녀들이 들이댈 때마다, 장난칠 때마다...어쩌지도 못하면서

그가 고백을, 대시를 받아들일까봐 가슴 졸이는 내가 우스웠다.

그렇게 마음 졸일 거면 고백을 하라고.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그가 당연히 자신의 것인 것 마냥, 질투하고, 걱정하는 걸까.


다행히도, 그는 그녀들 중 아무의 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은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

그녀들을 밀어내는 그 말에 기뻐하면서도,

나에게도 가능성이 없음을 시사하는 그 말에 나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그렇게...오늘이 왔다.

이제 내게는 더 이상 뒤가 없었다.

오늘로 모든 게 다 끝날 터였다.

내 땋은 머리에 달린, 그가 생일 날 선물해준 머리핀의 행방도...오늘 결정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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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학사모를 쓴 강당,

졸업식 연사로 초청받은 귀빈들이 축하연설을 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웅얼거림으로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유는 다르지만, 별반 다르게 들리지 않았는지,

뒷자리에는 조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형식적인 졸업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부모, 지인, 친구들을 찾아갔다.

웃으며 사진을 찍고, 감동의 포옹을 하는 무리들 사이로

나는 먼저 부모님을 찾았다.


"엄마, 이것 좀 대신 반납해줘. 나 잠깐 갔다올 데가 있어서."

"그래, 끝나면 연락해라."


나는 한달음에 그의 반 교실로 달려갔다.

내 결심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기에는 너무도 물렀다.

그렇게 오랜시간을 들여 한 결심임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단 둘이 있는 자리여야만 했다.


"선배, 이제 앞으로 못 보겠네요."

"뭐, 간간히 놀러올게. 시간 되면."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도서부 후배 부원 그 둘.

나는 문 뒤에 숨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말 끝까지 안 받아주실 건가요?"

"나보다 좋은 남자들 많잖아. 왜 그래."

"그렇게 철벽 쳐놓고, 여자친구도 안 만들고.

사실 숨겨놓은 여자친구 있는 거 아니에요?

다른 학교 사람이라던가."

"고3에게 연애는 사치야. 그럴 시간 있으면 문제 하나 더 풀지. 안 그래?

대학교 가면 연애 할 수 있다잖아."

"그걸 믿어요?"

"믿는 건 아니지만...그랬으면 좋겠다."

"......전 진심이에요."

"나도 진심인데."

"하다못해, 왜 차였는지라도 알려주세요.

제가 뭐가 부족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미 자리는 없었다니.

처음부터,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나든, 그녀들이든...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땅을 보며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가든, 지금 이 자리만은 피해야 했다.

아무도 없는 곳...

그들과 마주칠 수는 없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나는 교사 구석의 여자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이동수업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이용하기를 다들 꺼려하던 곳.

밤에는 귀신이 나온다, 예전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같은

괴담까지 나도는 공간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공간이었다.


화장실 칸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드디어 혼자가 되자,

눌러놓았던 눈물들이 떨어지고,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사실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는 꽤 잘생긴 편이고, 성격도 모난 데가 없었다.

문제가 될만한 품행도 없었다.

여자친구가 이미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도 남자니까, 오히려 당연한 일이였다.

그저, 그저 내가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착각했을 뿐이었다.


원망이 솟아올랐다.

나 자신과 그에 대한 원망.

그럴 거면, 더 단단히 철벽 치지.

확실하게 말을 하지.

왜, 왜 기대를 가지게 하는 거야.

진짜 나쁜 사람.


하지만, 차일 용기도 없어서 고백 못한 내가 더 싫다.

진작에, 진작에 고백했으면 이렇게까지 아플 일 없이 끝났는데.

그가 계속 고백을 거절한 이유 정도는 생각했어야지.

바보같이 혼자 끙끙 앓고, 혼자 질투하고...뭐하는 걸까.

멍청이도 이런 멍청이가 없어.


"크흑...아아앙...."


한동안, 화장실에서는 서글픈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카톡. 카톡.


핸드폰 알림음이 내 울음을 강제로 멈춰세웠다.

언제 끝나냐, 무슨 일 있냐는 부모님의 상투적인 물음.

나는 억지로 일어나 세면대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꼴이 엉망이었다.

화장했을 때처럼, 또 다른 사람이 거울 앞에 서있었다.

눈이 시뻘겋고, 기초화장이 번지고, 눈가가 부은 안타까운 여고생.


"나 진짜 못생겼다...하하.."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나는 미련을 흘려보냈다.

피어보지도 못한 사랑도 같이.


얼굴을 정리한 뒤, 나는 다시 부모님을 찾아 나섰다.

강당 근처에서 기다리실 터였다.

집 침대가 그리웠다.


"선배."


누가 뒤에서 나를 불렀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난 이제 쉬고 싶단 말이야.

더 볼일도 없다고.


"선배."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는 못 들은 척을 하며 앞으로 걸었다.

제발. 나 한시라도 더 학교에 있고 싶지 않아.


"선배!"


결국 그 목소리의 주인은 내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막아놨던 눈물이 다시 내 눈에 맺혔다.

이제 그만하고 싶단 말이야.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아까 그와 함께 있던 그 후배들이었다.

그녀들도...나와 사정은 비슷한 듯했다.

둘 다 눈물자국이 눈가에 선명했다.


"....전할 말이 있어요."

















응~~ 여기서 끝이야~~

하하 여기서 끊으면 니들이 뭘 할 수 있지?

내가 1화빌런이 될게...크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