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직도 1층 화장실에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휀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냉장고문을 열 것도 없이 노총각답게 일주일치 김치찌개를 해서 식혀 놓은 것을 퍼담고 전기밥솥에 밥을 하기 시작했다.

 

식탁에 모처럼 2인용 테이블을 셋팅하자 귀신같이 화장실이 열리며 낯선 금발머리에 호수색깔 눈동자의 백인 여자가 실루엣을 드러냈다.

썩은 냄새가 아닌 바디샴푸와 린스, 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의 냄새가 은은히 풍겼다.

 

 

순간 깜짝 놀란 놀란 이유는 두 개가 있다.

 

첫째, 그 노숙녀는 키가 155정도의 백인치고는 굉장히 왜소한 키였지만 서양인다운 와꾸가 있었다.

비록 깡마르긴 했어도 원래는 글래머였을 듯 싶었다.

게다가 노숙자의 거친 외모와 피부는 그대로였지만 그것만 보정하고 본다면 상당한 미모였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길거리에서 원시적 색욕에 미친 놈들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쉽게 당하기 딱 알맞기도 했을 것이다.

둘째로, 내가 Ross라는 체인스토어에서 그녀의 S 사이즈에 맞는 이브닝가운은....메시로 되어 있어 속이 절반쯤 들여다 보이는 매우 야한 것이어서 그녀에게 새로 임시로 사다준 블래지어와 팬티가 그대로 보여졌다.

 

 

“오해마시오. 부인, 그 시간에 그 사이즈가 그거 밖에 없었소. 그런 드레스인줄은 몰랐다오”

 

“......그저 감사합니다. 새옷은 어떤거든지, 어떤 명품보다 가치가 있어요” 

 

그 노숙녀, 엠마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내가 그녀를 도와준 댓가로 그런 옷을 입혀 하룻밤 노리개로 쓰려는 걸로 오해할수도 있었으며, 실제로 그녀는 일정하게 각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그녀의 깡마른 배에서 흘러나온 꼬르륵 소리였다.

 

 

“이리로 오세요, 한국 음식 먹을줄 아세요? 김치찌개라는 흔한 가정식인데”

 

“아, 알죠. IOWA에 있을 때 한국에서 유학온 친구네 집에 가니깐 해주더라구요. 캘리포니아로 와서 가끔 한국학생들의 커뮤니티 행사때 얻어 먹어 보았어요. 조리법도 배웠는데, 남편이 싫어해서.....길거리에서 누가 버린 햄버거나 먹던 처지에 진수성찬이죠...”

 

“급식소는 이용 안합니까? 이곳 노숙자들이 구걸을 안 하는 이유가 여러 봉사단체나 종교단체에서 음식을 나누어 주어서입니다.”

 

“.........급식소에서 줄을 서는데 전 늘 뒷차례로 밀려났어요. 남자들이나 힘세고 큰 여자들한테서요. 나중엔 찌거기만 얻어먹고 그나마도 떨어져서 뒤로 돌아나오는 일도 많았어요”

 

 

그녀의 배꼽시계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와중에도 수저를 들고 있지 않았다.

현직 노숙자가 음식 앞에서 내숭떨 군번도 아닐거고 입맛이 안 맞다고 뻐팅길 군번도 아닐텐데.

그때서야 난 그녀가 자제력을 발휘하며 수저를 들고 있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손님으로서 초대받았을때의 예절이 몸에 밴 듯 했다.

그녀를 위해 내가 먼저 수저를 뜨자 그녀도 수저를 들었다.

엠마는 음식을 빨리 먹었지만 나를 의식해서인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한 그릇을 다 비웠을 때 그녀는 세 그릇을 비웠고 김치찌개와 밑반찬이 완전히 비워졌다.

그럼에도 엠마는 아직 한방이 부족하다는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차나 한잔 하지요. 소화에 도움될거에요. 아직 한방이 부족한 듯 한데 이 정도도 당신한테는 조금 무리가 있을수도 있어요. 당신의 장들이 놀라서 무리를 일으킬수도 있고. 구토가 일어날수도 있고. 김치찌개와 한식은 미국인들이 요즘 들어 가끔 줄기는 기호식품이지 주식이 아니니깐 위장도 편치는 않을거요”

 

하지만 더 이상 음식을 하려면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솔직히 그녀가 먹을만한 식재료가 없었다.

나는 꽃잎차를 타서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몇달만에 따뜻한 곳에서 목욕을 하고 양껏 식사를 하고 차 한잔 하는 기분이 어때요?”

 

“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게 되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거리에서 살다가 이렇게 따뜻한 음식과 차를 마실 수 있어 행복합니다.”

 

 

엠마라는 여자는 배를 채우고서 나서야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참으로 당신의 남편이란 자는 이해할수 없군. 이런 미인 아내를 담배꽁초 버리듯 길에다 내버리다니. 게다가 지적이고 교양있는 여성이기도 하지”

 

미인이라는 말 뒤의 지적이고 교양있는 여성이라는 나의 뒷 말에 갑자기 엠마는 기분이 급히 좋아진 듯 밝게 눈을 떴고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저는 아내로서 부족함이 없다 생각했어요”

 

“남편에게 쫓겨나 길거리 생활을 한다는 그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되요. 남편이 당신을 집에서 나가라고 한거요, 아니면 차에 태웠다가 다운타운에다가 내려놓고 달아난거요?”

 

그러나 엠마는 둘중의 한 상황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듯 했고, 오히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시의 침묵이 흘러가자 나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녀의 아픔을 건드는 것이지만 그녀를 돕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야할 것이기도 했다.

 

 

“남편과는 어떻게 된 관계요? 정확히 말해주어야 내가 도와줄수 있어요”

 

“........ IOWA 주립대 신입생 시절, 시니어이자 풋볼 주장이었던 조나단을 보고 쫓아 다녔어요. 그 남자 옆에는 잘 나가는 치어걸들, 키 크고 힘센 여자들이 늘 아양을 떨었기에 제겐 차례가 안 왔어요. 조나단이 같은 학교 법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저는 늘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그가 공부하는 도서관에 찾아갔어요. 치어리더를 하던 여학생과 오래 사귀다가 깨졌을때 그는 시험마저 포기하려 했었어요. 제가 빈틈을 통해 다가갔고 그에게 마음과 몸과 용기를 주어서 변호사가 되게 만들었지요”

 

딱 봐도 알파남과 알파녀 사이에 키작은 베타녀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 맞다.

반면 그 알파남이란 놈이 이 여자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는 대강 알 것 같다.

대강 외로움 달래고 따먹고 성욕이나 해소하다가 치우려 했지만 학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난 것일게다.

2미터에 가깝다는 조나단이라는 남자와 155밖에 안되는 엠마의 7년에 가까운 성생활을 연상해 보니 도저히 물리적으로도 어울릴것 같지가 않았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한건 남편의 뜻이었소?”

 

“네, 남편은 캘리가 날씨도 좋고 일자리도 많다고 했어요. 저의 전공인 영문학을 이용해 교사자리를 찾을 곳도 많다고 했구요. 무엇보다도 절친이나 아는 동네형들이 캘리포니아의 판사나 경찰관으로 자리를 잡아서 그도 변호사로서 인맥을 활용할수 있다고 했구요........."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 것이 불행의 씨앗일수도 있었겠군요. 차라리 고향에서 계속 사셨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휴우.......얼마전까진 전 그와 함께 행복했어요.  2년 전에 그 사람을 믿고 교사직도 미련없이 관둘 정도로요. 그런데 한 일년전부터 그 사람이 조금씩 변했어요.  관계가 조금씩 소원해지더니 언젠가부터 저의 몸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놓더라구요, 어린애 같다고요”

 

“후우........여자 생겼겠지. 결혼 전부터의 행각을 보면 각이 딱 나오는데. 키도 분명 2미터급이었을거고, 조각미남에 바이킹같은 수염을 길렀을거고”


“어머 어머, 맞아요. 그이는 야성적인 외모를 가졌고, 여자한테 그리 목을 매는 남자가 아니었어요. 저를 늘 미성년자 취급했죠. 키가 작다고....그 점이 더 끌렸던거에요. 어쨌든 얼마전 그가 차를 BMW에서 벤틀리로 바꾸더라구요. 그의 수입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기에 걸맞는 소비를 하는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내 차 안에서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났고 쓰다버린 립스틱 껍데기가 나왔죠”

 

“처음부터 일정한 조짐을 보았으면 그때 잡았어야 합니다. 방치하신 당신의 책임도 커요. 뭐 지난 일이고, 남편에게 찾아갈 생각은 없소? 재결합을 요청하던지 아니면 소송을 해서 그간의 노숙생활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던지?”

 

엠마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저는 남편을 제어할 용기가 없었어요. 순종적인 아내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감시하거나 제재할 수 없었죠. 제 남편은 저를 완전히 버렸고, 경찰들도 저를 돌려보내 버렸어요. 제가 그분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소송을 하려고 해도 그분은 저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요. 그저 이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아요.”

 

“상간녀가 어떤 여자인지에 대한 정보는 있소?”

 

“그 여자는 더 젊은 미모의 여자이며 공판전문 변호사라고 합니다. 남편은 그 여자와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었어요. 제가 너무 약해서 남편을 감시하거나 그녀를 찾아가 제재할 수가 없었죠. 그 여자랑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었구요. 그 여자도 변호사인데다가 키랑 몸무게랑 미모가 저랑 비교가 안돼요.”

 

 

나는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지는 답답함을 느꼈다. 엠마라는 여자는 너무나도 약했다. 

근력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여렸던 것이다.

어쨌던 지금 너무 늦은 밤이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옆방에 침대겸 벤치가 있어요. 내가 방금 당신이 누울 얇은 매트리스와 덮을 이불과 벼게를 가져다 놓았어요. 거기에 당신의 드레스 세벌을 옮겼습니다. 오늘밤 그 방에서 편히 주무시도록 하십시오.”

 

 

엠마는 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며 감사의 말을 더듬거렸다.

 

“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오랜만에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합시다. 나는 엠마씨 당신이 자립할수 있는 길을 도와 드릴겁니다. 난 당신이 길거리에서 윤간을 당했다는 말에 눈물이 쏟아질뻔했고 당신을 다운타운으로 돌려보낸다면 똑같은 일을 당할것 같아 내 집에 데려와 보호하고 있는 것이오”

 

엠마는 내 말에 눈물을 흘리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는 원래 오늘부터 7일간 휴가였다. 

그녀로 인해 휴가를 망칠 지경이었지만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나는 9시에 1층 서재로 들어갔고, 그녀는 바로 옆방에 들어갔다.

서재에서 컴퓨터를 켜놓고 부지런히 검색을 시작했다.

엠마의 남편이라는 오렌지 카운티의 Jonathan Baker라는 변호사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간단히 그에 대한 정보를 찾을수 있었다.

법률회사 정보와 그의 개인 페이스북까지 찾아낼수 있었다.

White Book이라는 개인 전화 번호부 싸이트에 카드를 내고 결제하여 그치의 휴대폰과 집전화번호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경악했던 것은 그치의 페이스북이었다.

상당히 키도 크고 아름다운 금발 머리 여자와 낯뜨거운 키스신이 찍혔는데 그 여자의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는걸로 보아 임신 중기를 넘어선듯 했다.

 

다음 달에 이들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페북 사진의 링크를 찍고 들어가보니 그 여자는 엠마가 말한대로 공판담당 변호사였다.

보통 변호사들이라고 해서 미드 법률드라마에서 나오는것처럼 열렬하게 판사와 배심원을 설득하는게 아니고 대부분 서류작업에 매몰된다.

하지만 공판을 직접 뛰는 이들은 정말 미드의 법률드라마에 나오는 멋지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들이 담당한다고 했다.

 

[Miss Larry Harrison, 27세, 샌프란시스코 출생, 엘에이의 L법률대학원 졸업, 현재 Jonathan Baker’s Law Group에 근무하며 공판을 담당하는 변호사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페북 프로필이었다.

래리라는 여자의 페북속 여러 사진을 돌려본 결과 그녀의 눈빛은 도도하고 목표지향적인 야심이 엿보였다.

그 조나단이라는 남편놈은 예쁘지만 키도 작고 자기주장이 없고 순종적이기만 한 착한 아내 엠마보다는 좀 도도한 프로페셔널 여성에게 매력을 느낀 듯 했다.

거기에 공지 게시물엔 이미 Jonathan과 혼인신고를 마쳤다고 했고 다음달의 결혼식 일정이 안내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름이 곧 Mrs. Larry Baker로 바뀔 것이니 지인들이나 의뢰인들은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는 친절한 안내가 적혀 있었다.

 

 

“이런 젠장! 이건 현실같지가 않아.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거지? 가능해? 저건 중혼 아닌가?”

 

왜냐하면 엠마의 남편은 엠마와 이혼절차도 밟지 않고 길바닥에 내쫓은 상태인데 법적으로 부부 신분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엠마의 남편 조나단이란 녀석이 그녀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인물일 가능성과, 아니면 엠마가 횡설수설하는 것 둘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의 이혼법을 검색해 보았다.

법률용어가 많아 대강 번역기를 돌려보니, 6개월간 실종 상태이면 일방이혼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엠마가 집에서 쫓겨난건 6개월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래리라는 여변호사의 배가 임신 6개월은 지나 보였던걸 생각해보니 간단히 결론이 났다.

연놈이 둘다 변호사라고 했으니 공모해서 벌인 짓일게다.

 

핵심은 엠마에게 위자료를 주지 않을 방법과 더불어 가장 신속하고 말끔하게 이혼하는 방법을, 법률을 잘 아는 두 연놈이 이런 야만적인 행위를 했다고 떡 하니 각이 나왔다.

게다가 지역 경찰간부 중에 친구도 있다고 했으니 그런 짓을 해서 걸릴 것도 없고 힘없는 전업주부 아내를 말끔히 하루 아침에 거지로 만들어 버리는건 일도 아닐 것이다.

현금과 카드와 핸폰, 차열쇠를 모두 빼앗았다는 것은 어디에 연락도 못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

엠마에게 카드와 현금이 있었다면 모텔에서 자고 다음날 택시타고 직장이고 집이고 나타날터이니 말이다.

거긴 나름 부촌이라 경찰들이 노숙자들을 보면 지역 바깥으로 몰아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명높은 엘에이 다운타운으로 오게 될 수밖에 없다.

엠마가 거기서 윤간이라도 당하게 되면 완전히 넋이 나가서 집으로 돌아올 엄두도 못낼 것이란 것마저 계산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앞서 생각하는 것일까?

 

 

“세상엔 나보다 더 나쁜 놈들이 많지. 그래도 이건 너무 에반데? 믿겨지질 않아.” 

 

나는 컴퓨터의 전원을 내리고 서재를 나섰다.

옆방은 벌써 불이 꺼져 있고 코를 고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아침에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엠마는 연두색 드레스로 갈아 입은 상태였는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오랫만에 잘잤죠?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네, 굿모닝입니다. 근데....제 방에........죄송해요......정말 죄송해요.........저도 모르게!”

 

그녀를 재웠던 방에 들어가보니 매트리스가 젖어 있었고 소변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솔직히 열은 좀 받았지만 뭐 내가 잠잘 곳도 아니라고 생각하여 진정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요도가 열렸나보죠. 얇은 매트리스니까 세탁기에 돌리면 됩니다. 그리고 건조기 대신 마당에서 자외선에 말리는게 좋지요.”

 

 

나는 그녀가 깔고 누웠던 얇은 매트리스를 뽑아 세탁기에 넣었다.

엠마는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가 얼굴을 붉히며 세탁기에 그녀가 어젯밤 입었던 나이트가운과 팬티를 넣었다. 

 

 

“죄송해요.........”

 

“아, 그 죄송하다는 말좀 그만...!”

 

 

나는 베이글을 굽고 베이컨 몇쪼가리 남은 것과 크림치즈와 냉장고 구석에 있던 햄을 용케 찾아내었다.

서양식 식재료가 없다 생각했지만 그녀가 오고 나니 어디 구석에서 생기는건 어쩔수 없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갈아 내렸다.

커피향이 방안에 퍼지자 그녀는 베이글을 씹으며 커피에 관심이 생긴 듯 했다.

 

 

“혹시 타운컨트리 커피인가요?”

 

“냄새로 딱 아시네? 포장지는 버리고 별도로 보관하고 있는 것인데”

 

“커피에 대한 취향과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그건 미국 지방의 중소업체에서 만드는거라 구하기 힘들고 비싸요. 그런데 매니아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구하더라구요”

 

“댁도 커피에 대해 취향이 좀 있으시군”

 

“결혼하고 나서부터 커피를 가리고 공부하고 시음해보기 시작했어요., 남편에게 최고의 커피를 내려주기 위해서였죠”

 

 

스타벅스 커피는 미국에서 중급 레벨밖에 안되고, 실제 향이 그윽하고 오래가는 커피 커피는 중소 브랜드 중에 많이 있는건 다 아는 상식이다.

엠마도 커피에 대한 상식과 취향이 있는걸로 보아 확실히 최소 중류층 생활을 했던건 확실했다.

 

 

아침 식사를 다 끝내고도 나와 엠마는 커피를 두잔째 마시고 있다.

엠마는 커피 향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코를 훌쩍거리고 있다.

아마도 사랑하던 남편에게 그 커피를 대접하고 함께 마시던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 했다.

여기에 감화되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책임질수 없는 말을 해버렸다.

 

 

“남편을 찾아주겠오. 어젯밤에 검색을 좀 해봤는데 금방 나오더군요. 상간녀도 그렇고,  상간녀를 조지겠소, 남편을 조지겠소? 선택을 당신이 뭘하는지에 따라 내가 전화하는 곳이 바뀔겁니다”

 

“..........남편을 찾아 주세요. 그 여자랑 제가 이야기하는건 의미도 없고 그녀와 싸울 자신도 없어요. 남편에게 제가 뭘 잘못했는지 물어보고 오해를 풀고 싶어요.”

 

“허얼, 이런....당신은 꽤 순정파 여인이거나 순애 지상주의자인가보오. 서양여자치고는, 요즘 아시안 여성들도 당신같은 여자는 없어요”

 

나는 그녀를 리빙룸으로 불러서 집 전화기에 스피커폰 모드를 활성화시킨뒤 그 남편놈의 변호사 사무실로 전화를 넣었다.

엠마는 지방이 빠질대로 빠져버린 유방을 붙잡고서 벌벌 떨고 있었다.

 

 

(네, 조나단 베이커입니다.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저는 엘에이의 미스터 차라고 합니다. 노숙생활을 하며 범죄에 노출되던 당신의 아내 엠마 베이커부인을 구조해서 지금 보호하고 있습니다)

 

(뭣이라고? 엠마? 낫 마이 와이프 애니 모어!! 그녀는 7개월도 더 전에 불법 가출을 행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출 실종 신고도 해당 경찰국에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달전 법원에서 이혼신청이 수락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집에 기어들어오려면 늦었다고 말해 주시오)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엠마는 전화기에 가까이 허리를 수그려서 호소하기 시작했다.

 

 

(네? 가출이라뇨, 여보? 당신이 저를 내보냈쟎아요. 저는 길거리에서 살았고 길거리에서 지난 겨울을 지내면서도 당신을 그려왔어요. 제가 벌을 받는건가요? 집에 가서 당신한테 다른 방식의 처벌을 받고난 뒤 용서를 받고 싶어요......제발....)

 

(이봐, 너와 나는 이제 부부가 아니야. 못 믿겠으면 사회보장국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엠마는 얼굴이 빨개졌고 호흡이 가파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조나단과 대화하라는 것을 중단하라고 손짓을 한뒤 내가 다시 그 놈과 통화를 시작했다.

 

 

(이봐요, 정식 이혼절차도 밟지 않고 집에서 내쫓는 야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당신은 법을 누구보다 잘 알텐데요? 가정폭력에도 해당됩니다)

 

(헤이, man! 당신은 제 3자야, 그녀와 나 사이에 개입하거나 조언할 권리가 없어)

 

(알겠습니다. 저는 입다물죠. 하지만 지금 엠마 부인을 데리고 당신의 사무실이나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엠마부인에게 사용하던 자동차와 신분증과 스마트폰, 노트북컴퓨터, 그리고 자립할만한 자금 정도는 지원해 주십시오. 저도 더 이상 내 사저에 엠마부인을 보호하고 있을수가 없어요)

 

(오우 shit! 만약 그녀를 데리고 집에 오면 주거침입과 불법 주거지 배회로 경찰에 알리겠소. 내 전화 한통이면 바로 경찰차가 내 집에 도착할테니 쓸데없는 수작걸지 마시오!)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치가 전화를 끊었을 때 엠마의 눈에서는 안약을 떨어뜨린 것같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여 리빙룸 쇼파에 눕히고 얇은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거 자칫하면 내가 덤태기쓸 상황이다.

오늘 남편놈을 잘 구슬러서 저 여자를 집에다 데려다 주는데 성공하면 내 밋션은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엠마라는 여자가 답답하기 그지없었어. 착한건지 바보인건지.

게다가 남편놈의 진술과 그놈의 페북을 보면 이미 엠마가 길거리로 나온 것은 7개월 이상이 되었는데, 엠마는 한달에서 석달 사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기억에도 문제가 생긴게 틀림없다.

그리고 남편에게 버림받을 때의 상황이, 그저 집에서 쫓겨났다고도 말하기도 하고, 조나단 놈이 아무것도 소지하지 못하게 한뒤 차에 태워 엘에이 다운타운에서 강제로 밀어 내려놓고 도망갔다고 말하기도 하니 어떤 것이 진실인지도 알 길이 없다.

 

 

뭉게구름을 닮은 담배 연기를 만들려다 실패했다.

 

한편 순박할때의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제발, 자기야! 이 오빠 마음을 네가 잘 알지 않니? 내가 널 얼마나 생각했고 배려해주었는지 너도 알쟎니? 네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남몰래 너를 뒤에서 챙겨왔었어.....제발.....)


어떤 여자라도 내가 끈질기게 진정성과 성의를 보이고 겸손하게 생활하면 그 여자도 내게 감복하여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그런 잘못된 누군가로부터의 교육은 나에게 내면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연애는 그런게 아니었다.

모든걸 다 바쳤던 여자에게 환승이별을 당하고 난뒤 나는 일과 투자에 몰두했다.

증권투자라는 것도 공부를 하고 돈도 좀 까먹어가면서 배우다 보니 점점 냉혹하고 냉철해져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돈도 벌고 운동 열심히 하고 취미생활 열심히 하면서 나를 업그레이드해왔다.

그런 조건을 만들고 나서 생기게 되는 여자들은 그녀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고, 그녀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뻔히 투명하게 볼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독신주의자로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현실에 저런 여성이 존재한다는건 믿을수가 없다.

하긴 미국도 중부 내륙 쪽은 가정관과 부부관이 상당히 보수적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저런 순애보와는 관계가 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