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치킨이랑 같이 마시려고 맥주를 사러 대형마트에 갔어
상당히 큰 마트였는데도 폐점 시간에 가까워서였는지 손님이 한 두 명 정도밖에 없더라고

마트 바구니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고 싶은 거 담고 있었어

마지막으로 맥주 챙기고 가려고 했는데 휠체어에 탄 그녀가 보였어

휠체어를 밀려면 손이 두 개 필요하니까 무릎 위에 초록색 바구니를 얹고 다니더라고
능숙하게 이것 저것 담는 게 신기해서 한참 쳐다보고 있었어

그때 높은 선반에 있는 물건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데 닿을 듯 안 닿을 듯 높이가 살짝 모자란 거야
온몸의 무게를 왼쪽 팔걸이에 싣고 집으려고 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100% 넘어지겠다 싶더라고
슥 다가가서 물건 꺼내서 건내줬지

감사 인사를 하면서 내 얼굴을 보더니 날 알아보더라고
시간 지나서 까먹을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어서 뭔가 기분이 좋았음

혹시 다른 거 필요없냐고 물어보니까
괜찮다고 다 샀다고 하는 거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 샀던 게 아니라 남한테 도와달라고 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 같아


그렇게 둘 모두 물건 다 샀으니 계산 하러 갔지
시간이 많이 늦어서 계산대가 하나밖에 없더라고
내가 먼저 계산 다 끝내고 도움 필요하냐고 물어보려는데

계산해주시는 이모가 
"총각 빨리 여자친구 도와줘"
하면서 혼내더라

물건 담으면서 슬쩍 처다보니까 반박할 타이밍 놓쳐서 어버버하고 있더라 ㅋㅋㅋ
그 모습도 넘 귀여웠음

봉투에 빨리 담고 건내주려는데
또 다시 이모 왈
"무거운 건 남자가 들어야지."

이게 한국의 오지랖이지
남 일에 참견하는게 나쁜 일이라는 생각을 한 자신을 반성하면서 속으로 주모한테 막걸리 세 말 시켰다.


이때 이분 없었으면 이어지기 힘들었을 거 같음
나중에 답례하려고 찾아갔는데 일 그만두셨더라...

하여튼 그렇게 밖으로 나와서 물건 자기가 들겠다고 하는 거 하나도 안 무겁다고 뺏어 들고 쭉 걸었어.
집까지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데 그동안 대화하면서 좀 친해진 거 같았어.

기름 발랐는데 요새는 안 시끄럽냐 - 너무 조용해서 이사 간 줄 알았다
직접 장 보는 거 보다 배달이 편하지 않냐 - 배달이 밀려서 안 온다

뭐 이런 이야기들 

그리고 앞에선 쎈 척 하느라 힘든 내색 안 했는데
오랜만에 무거운 거 들어서 그런지 다음날 근육통 때문에 잠 제대로 못 잤었어




4.
마트에서 그녀를 만나고 좀 지나서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 갔어

오랜만에 아들 온다고 반찬거리 사오신 손 큰 아빠와 요리 잘하는 엄마의 환상의 콜라보로
집에 어마 무시한 양의 반찬이 쌓인 상황에 내가 도착을 한 거야

kg 단위로 반찬을 사오시는데 진짜 이걸 4인 가족이 다 먹을 수 있나 싶을 정도임
요새도 가끔씩 전화와서 아빠 손 큰 거 때문에 피곤하다면서 반찬 택배로 부쳐주심 

하여튼 이때도 주말 동안 먹어치워도 티도 안 날 만큼 많은 양이었어
이대로는 다 먹기 전에 음식이 상할 거 같아 안되겠다 싶어서 친인척들에게 택배로 보냈지


먹고 자고 싸고(택배)


그렇게 폭풍같은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고
내 자취방엔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반찬이 쌓이게 되었어.

분명히 냉장고 작다고 조금만 싸달라고 했는데 엄마의 사랑이 그만큼 넘치나 봐

다행히도 난 받은 사랑을 나눠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걱정이 없었어
만약 엄마가 그때 반찬 나눠준 걸 아셨다면 복장 터지셨겠지만...

그렇게 반찬들 소분해서 윗집을 찾아갔지 

그녀가 좋아하는 거 보고 나까지 기분이 좋더라

다음날 초인종 소리에 나갔는데 그녀가 와 있더라고
반찬 통이랑 쿠키랑 빵(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남) 가지고 왔더라

그때부터 윗집과 교류가 이어졌어
난 원래 반찬 만들어 먹는 거 귀찮아했는데 그녀한테 주려고 반찬 사서 만들었지
다행히도 엄마 유전자 잘 물려받아서 요리 괜찮게 만들 줄 알았어

반찬 다 먹을때쯤 가서 반찬 건네주면
보통 그 다음날 쿠키나 빵 같은 디저트를 답례로 받았어

처음엔 노하우가 없어서 일주일 치 반찬 가져다주고 그 다음주에 또 찾아가고 그랬는데
더 자주 만나고 싶어서 나중엔 칸 나뉘어져 있는 반찬통에 2~3일치 정도만 넣어서 줬음 ㅋㅋ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되니까 처음보다 확실히 날 쳐다보는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어
 하지만 아직 통성명도 못해서 서로 이름도 몰랐어


 통성명한 썰은 다음화에 말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