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땐 여름이었어
아마 8월 초?

난 에어컨 잘 안 트는데도 에어컨을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무더위가 계속됐어
밤에도 그 정도였는데 낮에는 에어컨 없이는 절대 못 버티지


어느 날 위에서 또 사람들 왔다 갔다 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야
무슨 일 났나 싶어서 올라가 봤는데 수리기사가 와서 에어컨을 뜯어내고 있더라고

그녀한테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니까 에어컨이 고장나서 교체하는 중이래
물량부족 때문에 일주일 정도 걸릴 수 있다고 들었대 

그날은 폭염 주의보인지 경보인지가 내려진 날이었는데 진짜 나온지 3분밖에 안됐는데 땀이 송골송골 맺히더라고
그녀 상태도 보니까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거야

곧 수리기사는 에어컨 들고 가버렸어
혼자 있는 그녀에게 여기 있으면 진짜 사람 죽는다, 낮 시간이라도 우리 집에서 같이 있자고 설득했어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도저히 못 버티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러겠다고 했지

그녀는 곧 필요한 걸 챙겨서 내려왔고
난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서 내 현관 문턱을 넘었어.

방안은 이미 틀어져 있던 에어컨 덕에 밖과 비교할 수도 없이 시원했고
그녀의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때 같았으면 났을 혼자 사는 남자 특유의 냄새도 에어컨이 다 빨아들인 것 같았어. 

내가 건넨 수건으로 땀을 닦고 고맙다고 한 그녀
내가 다시 수건을 돌려받음과 동시에 분위기는 어색해졌어 

사실 그때까지 그녀랑 진짜 대화란 걸 해본 적도 없거든 
오고 가면서 반찬 좀 주고 감사 인사 받고 이게 다였단 말이야
그때 우리가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지

그렇게 처음으로 통성명을 했어


풀네임은 쓰면 왠지 알아볼 사람 있을 거 같아서
지금부터는 애칭으로 부를게

난 보통 연이라고 불러


통성명 한 다음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건 일사천리였어

나랑 두살차이고, 대학교 안 다니고 뭐 이런 호구조사는 할 말 없을 때 꼭 필요하잖아?

대화한지 한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는 아마 제과제빵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아
그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 
자취방에 여자가 들어온 건 처음이었거든
특히 내 이상형의 여자가

설렘50% 긴장50% 
대충 그때 상태가 이랬어서 뭐라 했는지는 기억 못해도
그때 대화가 잘 통했다는 것만 기억나

연이는 그렇게 일주일 정도 낮엔 내 방 밤엔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어

이제 완전 친해져서 에어컨이 설치됐어도 내 방에 와서 놀았어
밥 먹을 때도 내가 해준 반찬이 맛있다면서 내 방에서 먹고,
게임 할 때도 혼자 하면 심심하다면서 같이하고,
심심 할 때도 놀아 달라면서 내 방에서 놀았어

그때까지 같이 술은 안 마셨어
관계를 불장난처럼 넘기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빨리 뜨거워지면 빨리 식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서야

물론 아닌 경우도 많겠지만 내 편협한 시각으로는
그때 술 마시는 건 득보다는 실에 가까웠어


물론 그때까지는 강제로 술을 마시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몰랐었어
난 싫으면 싫다 말하는 성격이여서 술 마시기 싫으면 당당하게 말했었거든



6.
그동안 연이랑은 정말 많은 걸 같이 했어

연이 방에서 쿠키랑 빵도 만들어보고
카드 게임도 두 명이서 할 수 있는 거면 종류별로 다 사고
주식공부도 하고(이거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 할 거 같아)

하여튼 함께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게 되더라고
물론 비-김태희같이 서로 좋은 점만 보고 살 수 있다지만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궁합이 맞는 건 아니였어
결국 외면하던 곪은 상처가 터지고 말았지


에어컨 사건 이후로 한 달쯤 됐을까

대학교 복학하고 처음으로 학기가 시작됐어
2년 넘게 머리 안 쓰다 갑자기 굴릴려니 뇌가 돌아가질 않더라고
거기다가 수강신청도 실패해서 시간표까지 꼬였어
진짜 죽을 맛이었지
 
수업 따라가기도 벅찬데 놀고 있을 틈이 어딨어
9시에 도서관 가서 10시였나 11시였나 도서관 끝날 때까지 공부하다 나왔어
그 싸이클을 일주일정도 돌리니까 겨우 머리가 돌아오더라고

그렇게 일요일이 왔어

난 일요일은 쉬는날로 정해서 그날은 아무것도 안하고 놀았거든 


저녁 10시쯤 됐을까
초인종이 울리는거야

연이가 이 시간에 한번도 온 적이 없어서 의아했어
그래도 찾아올 사람이 연이밖에 없으니 묻지도 않고 문 열었지

연이는 맞았어
그런데 끄윽끄윽 울고 있더라고
오빠아아... 하고 부르는데 식겁했어
적어도 내 앞에서는 한번도 운 적 없었거든

괜찮냐고 물어보고 바로 안으로 들여왔어
알콜냄새가 진하게 풍기더라고

한손에는 내가 만들어준 십자수 손수건 꼭 쥐고 다른 손으론 눈물 닦으면서
울면서 '오빠도 내 다리 때문에 나 싫어하는 거지?' 라더라

그 말 듣는 순간 진짜 망치로 명치부분 내리치는 거 같았어

휠체어에서 내려와 내 품에서 울다 지쳐서 잠들었는데

진짜 알콜 없으면 죽을 거 같아서 냉장고에 있던 소주 바로 병나발 불었다.


인생 살면서 한번도 알콜중독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왜 그 사람들이 술 마시는지 이해가 바로 가더라

인쓰술달이라고 했었나 그때 쓴맛 하나도 못 느꼈던 거 같아.

그날이 내 인생 세번째로 필름 끊긴 날이었어.

지금 기억나는 건
침대에 재웠던 연이를 껴안고 잤다는 것
일어나니까 머리가 진짜 깨질 듯 아팠다는 것
그리고 깡소주만 4병 반을 마셨다는 것

일어나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직행해서 다 게워냈어.
나 토하는 소리 듣고 연이가 깼고
나 괜찮냐고 묻는 소리에 겨우 정신 차렸어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한테 최악의 고백이었지


그날 처음으로 연이랑 밖에서 데이트했어.

고작 약국가서 숙취해소제 사고, 근처 국밥집에서 밥먹고, 근처 공원에서 손잡고 앉아있기만 한 거지만


날씨는 진짜 더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날씨에도 손 꼭 잡고 다녔어

지금 와서 회고하기로는
우리는 서로의 긍정적인 부분만 봤었던 거지
부정적인 걸 숨기고
일부러 상처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이 오히려 상처가 된 거야


수업 빼먹고 데이트한 월요일 수업 중 하나는  팀플 조 잘못 만나서 아마 c+받았던 걸로 기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