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사하고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이었어
날씨는 가을이 다 돼서 쌀쌀해졌고 단풍이 산을 주황색으로 물들이던 시기

토요일 저녁에 알바 끝나고 같이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놀이동산이 가고 싶다는 거야

알바 때문에 같이 못 있어준 게 마음에 걸리던 참에 그 말을 들으니까 당장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렌트카 빌려서 바로 출발했지

진짜 몸만 들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차 끌고 용인까지 달렸어

도착하니까 저녁이었어
우린 뭐 신경 안 쓰고 바로 표 끊었지

들어가는 입구에서 에버랜드 직원분이 우리한테 전동 휠체어 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시더라고

연이는 처음엔 그걸 타는 걸 부끄러워했는데
그분이 이거 타면 손잡고 다닐 수 있다고 하시니까 바로 타더라 ㅋㅋ

그리고는 이거 타 본 적 있냐고 물어보시는데 타봤다고 하더라고

좀 있다가 조작이 영 어수룩해서 진짜 타본 거 맞냐고 물어봤는데
타본 적 없댄다 
왜 거짓말 했냐고 하니까 왠지 못 타게 했을 거 같아서 그랬대


그렇게 전동 휠체어 빌려서 타고 나갔는데
처음에 했던 걱정과는 다르게 진짜 아무도 우리한테 신경 안 쓰더라고
다들 자기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챙기느라 바빠보였어

수동 휠체어 타고 다닐 때는 걸어다니면서 손 못 잡았는데
처음으로 손잡고 걸으니까 기분 너무 좋더라

연이도 싱글벙글 계속 웃고 있었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고딩 때 왔을 때랑은 분위기도 다르고 뭐가 많이 새로 생겼길래
뭐 하고 있나 봤는데 레트로 컨셉 축제를 하고 있더라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경하는데 그것들 보다 연이가 좋아하는 모습 보는 게 더 좋았어
에버랜드 와서 구경은 안하고 하루종일 연이 얼굴만 보고 있었어
그러다가 서로 눈 마주치면 뽀뽀하고
그 다음에는 히히 웃고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에버랜드 간식 도장깨기였는데
둘 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해서 주변에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특이한 간식들 한 번씩 다 사 먹었어
그때 사 먹은 음식들 가격 다 더해보면 아마 티켓 하나 값 정도는 넘었을 거야

길 있는 곳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니까 언덕에 올라가게 됐어
주위엔 사람 아무도 안 보이고 벤치도 있겠다 
벤치로 옮겨서 손잡고 경치 구경했지

한참 그렇게 있으니까 갑자기 연이가 펑펑 우는 거야
같이 놀이기구 못 타줘서 미안하다고 엉엉 울더라고
괜찮다고 너랑 같이 있는 거 자체가 나한테 행복이라고
껴안은 상태로 한참 달래주니까 겨우 진정했어

끄윽 끄윽 딸꾹질하면서 눈에 눈물 글썽이는 채로 말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웃어버렸더니
주먹으로 옆구리 한대 맞았다

저녁 되니까 날씨 쌀쌀해서 추워져서 금방 내려왔어
간식 사먹었더니 배도 안 고프고 더 이상 놀 분위기도 아니어서 숙소나 잡으려고 했지

온 김에 에버랜드 리조트에서 자려고  폰으로 예약하는데 진짜 남은 방이 하나도 없더라고
남은 게 몇 십명 들어가는 방 뿐이어서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어

어찌저찌 대충 괜찮은 호텔 잡고 들어가서 하룻밤 보냈지

다음날 일어나서 에버랜드 다시 가고 싶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드라이브나 하자고 하더라

검색해서 주위 볼 만한 곳 다 돌아다니고 그렇게 하루밤 더 자고 돌아왔어


집에 오고 나서부터 연이가 다시 재활치료를 받기 시작했어
전엔 내가 치료받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을 땐 힘없이 고개만 저었거든

나중에 왜 갑자기 다시 치료받기 시작했냐고 물어보니까
나랑 같이 놀이기구 타고 싶어서 라고 해서 좀 감동 먹었음



처음엔 내가 학교 갔을 때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왔어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직접 데려다 줄 수가 없었거든

차가 없어서 병원에 갈 땐 보통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다녔어
택시나 버스를 타고 가기엔 너무 부담스럽고 태워 주지도 않는다는 거야
그나마 콜택시 타고 다니는 게 나았대

그런데 주말에 같이 타고 가보니까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좀 그렇더라고

살면서 노란색 장애인용 승합차 한번씩은 본 적 있을 거야
너무 눈에 띄고 젊은 여자가 거기 혼자 탄다는 게 쉽진 않았겠지

나랑 같이 놀고 싶어서 다시 치료 받겠다고 하는 사람 내버려두는 건 너무한 거 같아서
중고 레이를 한대 사서 직접 데려다 주기로 했지
어차피 병원가는게 주 목적이라 주행거리 좀 되는 걸 괜찮은 가격에 구했어

차 살 때 연이가 한사코 자기가 다 내겠다고 했는데
반은 내가 탈 거라고 억지로 더치페이 했어

나중에 통장 보여줬을 때가 돼서야 왜 혼자 내겠다고 했는지 알았어
나랑은 자리수부터 다르더라고... 

하여튼 차를 사고 통장의 잔고가 두 자리 수까지 떨어졌지만 난 행복했어
연이랑 같이 있으면서 돈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행복을 결정하다는 걸 배웠거든

학교 갔다와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알바 끝나고 데려오고
이틀에 한번 씩 2주를 그렇게 다녔어 

그때부터는 재활치료를 집에서 하라더라고
치료시기를 놓쳐서 빠른 회복을 기대하기 힘들대
집에서 꾸준히 재활을 도와주라는 거야

낙담하고 있는 연이 위로해주면서 
천천히 하자고 언제까지고 기다려 주겠다고 하니까 고맙다면서 울더라고


그때부턴 주말만 되면 둘이서 여행을 떠났지
차도 있고 시간도 있겠다 거리낄게 없었어

보통 토요일 저녁에 출발해서 월요일 아침에 돌아왔어
가끔씩 알바 빠지고 화요일까지 놀았던 때도 있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갔어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
내 발길이 닿는 곳
연이 휠체어가 가는 곳


두 달 넘게 그렇게 전국 방방 곳곳을 돌아다녔어
어느덧 새해가 찾아왔고 그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속초에 있었지
새벽에 따뜻한 커피 손에 들고 팔짱 끼고 앉아있었는데 이제 여행 그만 다닐까 물어 보더라고
난 내가 피곤한지 몰랐는데 그 말 들으니까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거야
연이는 내가 계속 이어진 여행에 지친 걸 눈치 챘던 거지

그 후로는 알바 가는 거 아니면 진짜 집에서 하루종일 같이 있었어

동거하기 전엔 그나마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라도 있었는데
정말 한 지붕 아래 사니까 계속 붙어있게 되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서로 다른 점이 눈에 보이더라고
예를 들면 난 미니멀리스트인데 연이는 뭔가 사 모으는 거 좋아한다던가 그런 것들

하지만 다른 점 때문에 싸우진 않았어 
서로 계속 신경써주고 조심해하니까 말도 기분 안 나쁘도록 하게 되고
그게 또 눈에 보이니까 잘해주고 싶고
선순환이 이어졌던 거 같아

그렇게 서로 다른 점 잘 맞춰나갔어